“일꾼된 바울이 전하는 비밀” (골로새서 1: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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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위젤(Elie Wiesel)의 하나님의 고통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은 그의 자전적 작품, 「밤 (Night)」에서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나치(Nazi) 강제수용소들에서 당한 고난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난 가운데 잠잠하신 하나님께로 향한 원망과 하나님의 실존에 관한 회의를 소년(=자신)의 눈과 마음을 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이 부나(Buna)에 있는 수용소에 머물고 있을 때, 그는 3명의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두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소년이었는데, 두 명의 어른은 교수형에 처해질 때, “자유 만세!”를 외치는데 죽음 앞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년은 그저 잠잠할 따름입니다. 30분 이상이나 교수대 위 밧줄에 대롱대롱 매어 달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바둥대며 서서히 죽어 가는 소년을 보면서 소년 엘리 위젤은 마음 속으로부터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은 어디 계시길래 유대인의 고통 가운데 잠잠하십니까?’ ‘엘리 위젤의 하나님’은 바로 이 순간에 소년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지시고 그의 죽음의 고통을 맛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유유자적하시면서 그의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의 자녀가 고통을 당할 때 함께 고통스러워하시며,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시며,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십니다.
고통을 당하는 성도의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어느 유명한 목사님(김 진홍목사)이 전도사 시절에 빈민촌에서 개척교회를 사역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 출석하는 한 가난한 여인이 중병(重病)에 걸렸습니다. 전도사님은 여인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입원비가 없다고 다 죽게 된 환자를 거절하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른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그 병원에서도 거절합니다. 하루종일 이 병원 저 병원을 뛰어다녀 보았지만, 아무데서도 자선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힘에 겹게 무거워진 여인을 등에 업고 걷는 전도사님은 야속한 현실 앞에 원망의 마음이 듭니다. 등에 업힌 여인의 몸이 뒤로 제쳐질 때, 그는 여인을 향하여 소리를 지릅니다. “저를 좀 꽉 잡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왜 저를 더 힘들게 하세요?” 그러나, 제쳐진 여인의 몸은 반응이 없습니다. 좀 쉴 요량으로 여인을 내려놓고 살펴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왜 세상이 이 모양입니까?’ 그때, 그 전도사님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 여인의 고통 속에 함께 있노라.’ ‘내가 너의 눈물 속에 있노라.’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 영광의 보좌에 계시지만, 성도의 고통과 눈물 가운데 잠잠하신 분이 아니시라, 지금도 우리의 고난을 함께 담당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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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성도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함
바울의 현재 처지는 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가 옥에 갇힌 이유는 복음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골로새 교인들을 만난 적이 없고 알지 못하지만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고 한 것은 바울의 복음 증거가 결국에 그가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감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골로새 성도들 사이에 에바브라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은 것은 에바브라였지만, 이 에바브라를 통하여서 바울의 복음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괴로움은 그리스도뿐 아니라 교회 전체(Church Universal)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골로새 교인들이 믿음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 교리적으로 혼동 가운데 빠져 있을 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에게 편지를 통하여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수고를 기뻐하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기도와 편지를 통하여 골로새 성도들이 바로 설 수만 있다면 이는 복음의 바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what is lacking in Christ's afflictions, RSV; the remainder of Christ's suffering, LB)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그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닙니까?
어느 신실한 어머니에게 말썽꾸러기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이제라도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바른 신앙의 삶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이 평생소원입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이 그에게 참으로 컸지만, 어머니의 더욱 더 큰 고통은 아들의 방황과 불신앙입니다. 어머니의 암으로 인한 고통은 육체가 죽을 때 끝날 것이지만, 아들로 인한 고통과 안타까움은 그가 하늘나라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 될 것 같습니다. 아들이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 될 때에야 비로소 중단될 고통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고통을 다 담당하시고 죽으셨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빌 2:9; 엡 1;20)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엡 1:21) 만물의 으뜸이 되게 하시고(골 1:1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엡 1:22; 빌 2:10)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골 1:18; 엡 1:22).
이제 그리스도께서 낙원에서 평안히 쉬고 계시면 그만일 것 같은데,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 상에서 끝나지 아니하시고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현재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사울이었던 바울이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기 위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리스도께서 빛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전 9:4, 22:7, 26:14).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사실 동안에 바울이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고 해서 그를 괴롭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렇게 말씀하심은 그가 교회의 머리되시기에 그의 몸인 교회의 고난이 그의 고난이요, 지체들인 성도들의 고난이 여전히 그에게 고난이 됨입니다.
바울은 지체인 성도들의 잘못됨과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여 그리스도가 여전히 당하시는 그의 “남은 고난”을 그가 감당하기를 원하며,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그의 바른 복음증거와 그에 따른 교회와 성도들의 바로 섬을 통하여서 줄어들고 결국에는 없어지기를 원하는 바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되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골 1:22)로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25절: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교회에 일꾼 된 바울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일꾼이 된 목적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according to the divine office which was given to me for you)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교회 일꾼 직분”은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주어진 것”입니다. 한글성경이 “경륜(經綸)”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단어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는 “경제(economy)”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오이코노미아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청지기의 사명”이란 뜻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만물의 주인 되시기에 우리가 현재 ‘나의 것’인양 여기는 시간과 재물과 생명까지 원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다만 이 세상 살 동안만 청지기(오이코노모스=경영인, οἰκονόμος)로서 하나님의 시간과 재물과 생명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오이코노미아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번역할 때, 이 경륜(=오이코노미아)는 “구원계획”을 의미합니다(엡 1:9). 결국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입니다.
세 번째는, 본 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경륜”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맡기신 직분 또는 사명입니다. 즉, 이때 오이코노미아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직분 또는 사명 (commission)’입니다 (고린도전서 9:17).
바울이 감당하고 있는 교회의 일꾼 직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신 ‘복음 전도자의 사명’입니다. 바울만이 이러한 직분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께 속한 믿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꾼 직분을 친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복음 증거자의 사명을 맡은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복음”--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저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26절: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감취었던 비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한 구원계획을 마련하신 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이 인간을 타락케 한 사단의 에이전트(agent) 옛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란 모호한(mysterious) 말씀을 하시는 데 이것이 감취었던 비밀(μυστήριον; mystery), 곧 인간구원 계획입니다.
성도들에게 나타난 비밀
하나님께서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동안(for ages and generations) 감추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은 인간에 대한 징계요, 내어버려 두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내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때가 차매(엡 1:9)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로 말미암는 구원계획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이 ‘드러난 구원계획’은 여전히 비밀(revealed mystery)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원계획이 감취어져서 비밀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구원계획이 밝히 드러나 있는데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향하여 있지 않기 때문에 보긴 보아도 발견할 수 없으며, 듣긴 들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27절: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비밀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심
바울이 말씀하는 “비밀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자에게 주어질 영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매여서 살 동안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영광스러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장차 그 나라가 이를 때, 그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아무리 설명을 하려고 하여도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이 어떠한지 짐작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을 고통 중에 살면서도 충만한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 된 바울은 이 비밀의 영광의 풍성이 어떠한지 그의 옥에 갇혀 있는 형편과 듣는 사람들의 둔함에도 설명하고 또 설명하여 주고자 애씁니다.
비밀인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
하나님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영광과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열쇠--곧 (계시된) 비밀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실체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들어갈 곳이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살 때에도 소망 중에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해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에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아무 소망이 없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소망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28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그리스도를 전파하되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침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요 영광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고 마음에 품은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게 되었을 뿐아니라 그 구원계획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취었던 비밀인 구원계획과 영광의 풍성함을 먼저 안 바울은 이 영광과 축복인 복음과 그 내용인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가르쳐 알게 하고 그 안에 머물게 하며, 그 안에서 자라고 완전한 자로 세우기를 원합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속성에 얽매인 자들이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기도 원하는 그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자기도 원하지 않는 일들은 죽기 살기로 행합니다. 행함 다음에 후회함이 이어지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이러한 일들을 반복합니다. 한번 복음을 들은 사람이 그 가르침을 다시 듣지 않아도 복음에서 떠나지 않은 삶을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번 성령의 감동을 맛본 사람에게 그 감동이 지속되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만 행하고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은 우리를 그대로 내어버려 두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뒤흔들며 미혹합니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나와서 우리 자신들을 내어놓고 말씀을 듣는 데도 변화가 없거나 더딘 것은 바로 우리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이 세상 삶은 변하지 않는 가운데, 믿음의 출발선 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주술적이며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깨닫고 믿음의 온전한 데로 나아가기 위하여 찬송과 기도와 말씀을 들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변화되고 성화되는 삶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
전도자로서 바울이 괴로움을 기뻐하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에 힘쓰는 것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은 그 말씀으로 양육되어 완전한 자가 되게 하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보람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골 1:22). 이를 위해,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며,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않는 자들 되기를 원하십니다(골 1:23).
29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바울이 그의 괴로움 가운데 기뻐할 수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으나 복음증거자의 사명을 계속 감당하기를 원함은 그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꾼의 직무를 다하고자 할 때, 주님께서 그들을 도우시사 하나님의 크신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의 일꾼 된 자로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며, 우리의 힘을 다하여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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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홀로 내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의 성도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대로(마태 28:20) 그들의 삶과 여정 중에 늘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들이 고통 당할 때, 낙담할 때, 슬퍼할 때, 그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이 가시덤불에 걸려 있을 때 그들을 꺼내 주시며, 그들이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을 때 큰 바위가 되셔서 그들을 숨기시며 막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직무를 감당하고자 할 때에도 주님께서 의지와 능력이 되어 주셔서 그들 앞에 놓인 힘들고 거친 일들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현재에도 원하시는 것은 그의 몸 된 교회가 강건하며, 몸의 지체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직임과 직무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하나님께서 경륜을 따라 각 사람에게 주신 일꾼의 직무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잘 감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로 발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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