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음” (골로새서 2:6-7)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음” (골로새서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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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Nash)와 아름다운 마음(A Beautiful Mind)
1970년대 중반이후 게임이론(game theory)이 경제학의 한 인기 있는 분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게임이론은 1928년이래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과 모르겐슈테른(Oskar Morgenstern)에 의하여 연구·개발되어 왔습니다만(그들의 공저 「The 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 (1944)」가 있음), 그 게임이론이 각 분야에서 보다 본격적이고 실용적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은 존 내쉬(John F. Nash, Jr., 1928-)의 공로라고 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경제학은 물론 정치학, 사회학과 심리학 등 협상의 문제를 다루는 제반분야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22세 대학원생인 그가 1950년에 「비협력적 게임 (Non-Cooperative Games)」란 27쪽의 짧은 글로 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년 간 프린스턴에서 강사(Instructor)로 가르치던그는 그의 탁월한 논문과 천재성으로 23세인 1951년에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의 교수(C.L.E. Moore Instructor)가 됩니다. 내쉬의 협상문제(Bargaining Problem)에 관한 글과 협력적 게임(Cooperative Games)에 관한 글이 경제학계의 최고권위 저널(journal) 중에 하나인 이코노메트리카(Econometrica)에 그의 나이 22세 때(1950년)와 25세 때(1953년) 연속적으로 실렸습니다. 저의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은 내쉬의 게임이론적 협상모델과 그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수정된 내쉬 협상모델들에 대한 테스트(Test)입니다. 내쉬(Nash)가 저의 논문의 중심 인물이었지만, 제가 논문에 대한 구상을 하고 쓰고 있던 1980년대 중반에 그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는 전혀 저의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1999년 5월에 실비아 네이사(Sylvia Nasar)라고 하는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의 경제담당 기자에 의하여 내쉬의 전기(傳記)가 「A Beautiful Mind」란 제목으로 출간되면서(한국에서는 2000년 7월에 승산출판사에서 「아름다운 정신」으로 번역·출판되었는데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2002년 2월에, 동일한 제목으로 상영되고 있는 영화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하여, 「뷰티풀 마인드」라고 제목을 다시 붙여 재출간함) 그가 사람들의 주목에서 사라져버린 지난 40여 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소상하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내쉬(Nash)는 1958년도 포츈지(Fortune)에서 20세기의 가장 전도 유망한 수학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의 나이 30세에 이미 MIT의 정교수직을 받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졌었는데, 바로 이때 그는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의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20대는 수학자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단한 시기였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방황하고 갈등하는 시기였습니다. 몇 명의 남자와 동성애적인 감정을 나누고 있었고 연상의 간호원과 사랑을 나누다가 사생아까지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연상의 간호원과 결혼하는 대신에, 그는 그의 수업을 듣던 알리샤(Alicia Larde)라고 하는 한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그의 모든 외적 조건들은 그가 불행해야 할 이유를 발견치 못하게 하고 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갖춘 사람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헤어날 길 없는 “사고(思考)의 감옥(監獄)”에 갇히게 됩니다. 그의 천재성과 괴팍한 성격이 그로 다른 사람들과 융화(融和)하지 못하게 하며 광인(狂人)의 길을 가게 합니다. 그는 선망의 대상인 MIT의 교수직을 내놓고, 그의 모교 프린스턴의 빈 강의실을 떠돌며 자기만 알 수 있는 언어와 기호로 무언가를 칠판에 적고 혼자 푸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며 20대의 천재 수학자는 30여 년의 기간을 별 의미 없이 지독한 편집증 가운데 보내었습니다. 그가 정상인의 삶을 사는 것은 이제 정말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1990년대 초에 그는 거짓말처럼 정신분열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1994년에는 40년 전 그의 20대의 학문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의 공동수상자로 결정이 됩니다.
그의 전기작가 실비아 네이사는 내쉬의 삶을 그리면서 책제목을 왜 「A Beautiful Mind」라고 했는지 책 속에서 독자에게 전달하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은 내쉬의 괴팍한 천재성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에 있다’고 기술(記述)합니다. 그 위에 30여 년의 심한 정신분열증을 겪는 남편의 곁에서 소망 중에 그를 내조하고 위로하는 아내 알리샤(Alicia)의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이 내쉬의 전기(傳記)가 동일한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습니다. 기자가 영화에서 내쉬역을 연기한 러셀 크로우 (Russell Crowe)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천재 수학자 내쉬의 역을 맡고 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되었는데, 자신의 연기에 만족합니까?” 러셀 크로우는 대답합니다. “연기에 만족하냐구요? 천만에요. 내가 내 연기에 만족하였다면 나는 은퇴했어야 합니다.” 그의 대답은 그가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여 더 이상 노력할 의미가 없어질 때, 더 이상 오를 나무가 없게 될 때 그는 연기자로서의 자신의 삶의 의미가 없어져 은퇴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보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하여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여 정진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여성편력을 제외하고는, 할리우드의 대 스타들이 그러하듯이, 그의 배우로서의 연기는 참으로 성실하고 성숙해 있다고 봅니다.

크리스천의 아름다운 마음(A Beautiful Mind of a Christian)
저는 개인적으로 신약성경의 인물들 중에 바울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의 삶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바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신약성경의 절반의 책(13권)이 우리에게 전하여졌다는 것보다는 그의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위한 노력과 수고,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자세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미화(美化)시키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자신의 크리스천의 삶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그는 혼신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며 증거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한 사람의 노력하는 삶이 보는 사람들로 아름다운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가 이미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룬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온전하여지고자 자신을 치는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울을 삶의 목표로 두고 있는 저의 신앙의 모습은 더욱이 부족하고 흠이 많습니다. 목회자로서 설교도 부족하며 크리스천으로서 삶도 온전하고 거룩함에서는 아직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러했듯이 저도 저의 믿음에 정진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며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고 은혜스럽게 전하여 성도의 삶에 변화를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노력하는 삶은 목회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    한 모든 사람들이 힘써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갖고 계신 선하    신 뜻과 바람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노력하며 발전하며, 그로써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며, 그리스도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며 세움을 입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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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음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라고 함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의 주인이시요 그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인 것을 인정함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고 예수님은 이제 그와 동거동락(同居同樂)하는 삶을 살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함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자 합니다. “행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는 ‘(그리스도의 주변을 맴돌며) 걸어가다(go about, walk)'는 의미입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살지니(στοιχέω: walk, live)”라고 했는데, 비슷한 권면입니다. 우리가 생을 사는 것은 여행자(또는 행인)가 길을 걷는 것과도 같은데, 우리 크리스천으로서의 인생의 여정에는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 안에서 행하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라”는 뜻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가면서도 근심과 걱정으로 눈이 가려진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이 지난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글로바와 다른 한 사람--이 엠마오라고 하는 촌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는데, 이때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동행하시고 있었지만 그들은 근심과 불안의 마음으로 눈이 가리워 있어 동행하시는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눈이 뜨임 받은 후에 비로소 그들과 동행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누가 24:31). ‘지금 내 곁에 그리스도가 동행하시고 계심’을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7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음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고 뿌리를 박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해서, 크리스천의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여서 여러 가지로 결단하지만 그 중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키는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진보에 좋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정하지만 하루 이틀이 고작입니다. 도무지 주위사람들이 나로 기도의 생활을 잘하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기도하기로 정한 그 시간에 꼭 무슨 일이 생깁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활모습인데, 이런 분들을 위하여 어떤
지혜 있는 분이 충고합니다. 새로운 결단이 작심삼일에 그쳤다고 하여 실망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다시     동일한 계획을 세우고 또다시 실천하려고 하라. 방해를 받아 또 중단되면, 이번에도 바로 다시 마음을 바로    잡고 실천하도록 하라. 그리하다보면, 비록 중간 중간에 중단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당초에 목표했던 계획에 성과를 얻게 되고, 나중에는 작심삼일로 그치지 않고 정한 일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자기가 계획하여 실천하던 일을 쉽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믿음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단지 5-10분이라도 매일 기도하고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얇은 뿌리를 내기 시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결코 두려워하거나 마약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왜 내가 진작 이러한 생활을 하지 않았나?’고 후회하게까지 하는 일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고 박아야 합니까? 이렇게 함이 그 사람으로 크리스천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별 의미 없게 들립니다. 그 말씀이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말씀이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며 그의 삶에 지혜와 지식을 주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 믿지 않는 사람과 동일하게 불안하여 하며 그 해결책을 세상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모색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 그 앞에 닥칠 때에도 너무 불안해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그와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에 위안을 받고 마음에 평온을 유지하며 말씀 가운데 문제해결의 지혜를 발견합니다. 그는 심한 비바람과 거친 파도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믿음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힘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깊게 박은 성도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그의 행사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평온하며 형통함을 경험합니다.

세움을 입음
바울은 성도의 그리스도 안의 삶을 여행자(또는 행인)에 비유하여 “함께 걸으라”고 권면하고, 나무에 비유하여 “뿌리를 박으라”고 하며, 이제 건물에 비유하여 “세움을 입으라”고 권고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일생은 믿음의 건물을 지어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굳건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견실하게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세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권세의 터 위에 건물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27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柱礎)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히 심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분주함과 자신의 불성실함으로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견실한 건물을 세워나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15절에서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믿음의 공력이 과연 금이나 은이나 보석인지, 아니면 나무나 풀이나 짚인지 시험하는 불은 때로는 그 앞에 닥치는 시련이요 위기상황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과연 그가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고 감사하는지 아니면 좌절하고 주저앉는지에 따라 그의 믿음의 건물의 견고함과 자질이 판정을 받습니다. 견고한 믿음의 건물을 꾸준히 지어나가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섬
우리의 터전인 그리스도는 그의 삶을 통하여 성도의 믿음이 어떠해야 할지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인간의 성품으로는 그도 죽음이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믿음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이 어떠할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539장의 작시자 모트(Edward Mote, 1797-1874)는 성도가 굳건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믿음으로 서있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찬송가 539장 1, 2절)

감사함을 넘치게 함
어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있는가 아닌가는 ‘그 성도의 마음과 입술에 감사함이 있는가 아니면 불평이 있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각 사람이 믿음 안에 거하고 있는가 자기진단을 할 수 있게 하는 방편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평강과 축복을 맛보는 성도에게는 외적인 환경과 상관없이 감사함이 샘솟고 넘쳐납니다. 이는 우리의 부족하고 허물 많은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깨달음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믿음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감사함이 넘쳐나야 함은 그것이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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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성도 됨을 아름답게 만듭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받아들인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매일매일 나아감이 그와 그의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의 능력과 지혜의 한계를 주님께 고백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지혜로 덧입기를 사모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기를 간구하는 성도의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향한 권고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나타나지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시며, 둘째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깊이 박음으로 인하여 폭우와 강풍, 거친 환경을 능히 견디어내며, 견고한 건물을 세우되 믿음의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은 내구성(耐久性)이 강한 자료를 사용하며, 성경말씀을 듣고 읽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고, 입술과 심령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자장 되시는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이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고, 하나님의 크신 칭찬과 상급이 있는 아름다운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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