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주 안에서 아내와 남편” (골로새서 3:18-19)

                                         “주 안에서 아내와 남편” (골로새서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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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相思)의 사랑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때 송나라 강왕(康王)은 지독한 폭군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시종 한빙(韓憑)의 아내 하씨가 보기 드문 미인임을 알고 그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습니다. 한빙이 왕을 원망하자 강왕은 억지로 죄목을 정하여 그에게 성단형(城旦刑)이라는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성단형이란 낮에는 변경수비를 보고 밤에는 변경 방비를 위한 장성을 쌓는 노역을 감당하게 하는 것으로서 매우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날마다 남편 한빙을 생각하던 하씨가 혹 일이 잘못되어 강왕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남편만이 알 수 있는 표현의 편지를 써서 인편에 보냈습니다. 그 내용인즉, “비가 그칠 줄 모르고 강이 크고 물은 깊으니 해가 나오면 마음이 닿겠네. (其雨淫淫, 河大水深, 日出當心)”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그 편지가 어떻게 해서 강왕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강왕은 측근들에게 편지를 보였으나 아무도 뜻을 풀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던 차에 마침내 소하라는 자가 그 뜻을 풀어냅니다. “비가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은 당신을 잊을 수 없어서 언제나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고, 강이 크고 물은 깊다는 것은 당신 곁으로 갈 수 없다는 뜻이고, 해가 나오면 마음이 닿겠다는 것은 죽으면 만날 수 있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때 변경에서 노역하던 한빙이 자살했다는 보고가 전해졌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하씨도 사랑하는 남편의 뒤를 이어 투신자살했습니다. 한 장의 유서를 남겼는데, “임금님은 사는 것을 유익으로 여기지만 저는 죽는 것을 유익으로 여깁니다. 바라건대 저의 시신을 한빙과 합장해 주십시오. (王利其生, 妾利其死, 願以屍骨賜憑合葬)“라고 쓰여있었습니다.
화가 난 강왕은 하씨의 마지막 소원도 무시한 채 죽어서도 서로 안타까워하라고 일부러 한빙의 무덤과 마주 보이는 곳에 그의 시신을 매장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쪽 무덤 끝 쪽에 가래나무 한 그루씩이 생겨나더니 십일이 넘어서는 크게 자라나 서로 줄기가 휘어져 기대게 되고 뿌리들이 뒤엉키고 가지들이 얽혀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 쌍의 원앙새가 그 나무에 둥지를 틀고서 밤낮 없이 교대로 아주 구슬프게 울어댔습니다. 그것을 본 송나라 사람들이 그 부부를 더욱 불쌍히 여기며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상사수는 그들 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의 사연에서 ‘상사병(相思病)’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대 이혼의 급증
미국사회에서 이혼율이 높은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에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결혼한 부부 100커플 중에 43커플(43%) 꼴로 이혼한다고 합니다. 결혼한 지 10년 내에 이혼하는 비율이 30%가 넘어 이혼자의 대부분은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혼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혼 사유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가장 큰 이유인데 즉 재정적인 어려움이 부부간에 갈등과 다툼을 초래하고 그로 말미암아 갈라서게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높은 이유는 대화의 단절이라고 합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결핍되거나 단절되고 이것이 쌓이므로 인해서 불만과 오해가 누적되어 결국 이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혼의 예에서 크리스천 부부들은 자유로운가 하면 그렇지 않고 그들도 비슷한 이유와 비율로 갈라서고 있다고 합니다.
                                                 
한동안 순종의 전형처럼 여겨졌던 일본 여성들 중에 상당수(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가 근자에는 남편이 은퇴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은퇴하면 퇴직금의 반을 요구하여 그것을 갖고 자신의 남은 삶을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즐기고자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뭐 좋은 표본이라고 따라가고자 하는 한국 여성들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은 신실하고 거룩해야 할 혼인서약을 무시한 처사라고 할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시작
남자와 여자의 혼인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에 이어서 바로 시작된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웅동체(雌雄同體: androgyny)인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지만,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셨습니다. 반쪽 인간이 되기 전에 온전한 한 사람으로 만들어진 아담이었지만, 혼자 지내는 것이 하나님 눈에 안 좋게 보였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에게는, 아무리 완전한 사람이라도, 같이 지내면서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보다는 둘이 있을 때가 하나님 앞에 좋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해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 곁에 두십니다(창 2:21-22). 남자와 여자는 각각 다른 육체로 거하지만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창세기 2장 24절(또한 엡 5:31)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4-6절에서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의 연합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창세기 2:24)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과 아내-주님과 성도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허락되어지는 제도나 관계는 때로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상전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전형적인 모형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와 음녀 고멜의 결혼을 통하여 남편 되신 하나님과 아내 된 이스라엘의 관계를 가르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고멜은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어서 호세아의 곁을 떠나지만 호세아는 사랑으로 고멜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입니다. 패역하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세상 신을 사랑하여 하나님 곁을 떠난 이스라엘이 신실하고 영원한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호세아서 12장 6절에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연합은 주님과의 연합을 알기 위해 우리에게 이 세상 살 동안에 허락되어진 아름다운 연합입니다. 하나님이 한 남자에게 아내를 허락하시고 한 여자에게 남편을 허락하시어 그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를 이루게 하심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됨의 비밀을 가르쳐주시고자 함이며, 주님과의 연합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인가를 가르쳐주시고자 함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아름답고 거룩한 연합에서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는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음란으로 정욕을 따라 연합할 수도 있습니다. 곧, 세상과 짝하여 사는 사람의 삶은 연합은 연합이로되 음란과 정욕으로 인한 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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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3장 18-19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 20-21절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 3장 22절-4장 1절에서 상전과 종의 관계를 통하여 주님과 성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서 아내와 남편의 예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복종하다”(ὑποτάσσω)란 말은 ‘...의 권위(authority) 혹은 명령(command) 아래 자신을 두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뜻은 남편의 권위아래 들어가 남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했는데, 이는 철저히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은 노예가 그 주인에게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두려움의 대상이므로 하는 복종은 아니며, 사랑하기에 남편의 말을 청종하고 행하는 자발적이고 기쁜 복종입니다.
이어서, 에베소서 5장 23-24절에서,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설명했는데, 즉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으로 성도의 연합으로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을 몸된 성도의 연합인 교회가 준행하듯이, 몸 된 아내도 범사에서--모든 일에서--가정의 머리된 남편의 뜻과 명령을 잘 받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남편은 머리요 아내는 그 몸이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2장 4-5절에서 바울은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심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아내 된 자들이 이렇게 살지 아니 할 때, 이는 이렇게 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르치는 것이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말씀을 무시하고 훼방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2절에서 베드로 사도도,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순복함은 믿는 남편에게 뿐 아니라 믿지 않는 남편에게도 효력이 있습니다. 아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남편과 항상 불화하고 가정과 자녀를 돌보지 않고 교회나 기도원에만 매달려 있다고 한다면, 이를 통하여서는 믿지 않는 남편에게 그리스도를 전도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 남편이 예수님 믿는 사람되기를 원한다면, 남편에게 말로는 믿음을 가지라고 하면서 바가지를 긁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할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아내의 정결하고 믿음이 있는 행위가 남편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순종은 주님 안에서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주 안에서 마땅함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 주님 안에서 마땅한--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마땅하다”는 것은 이것이 남편과 아내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순리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질서와 순리에 관하여 여러 군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해산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서 바울은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서 하나님, 그리스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관하여 말씀할 때,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질서를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한 것같이(빌 2:8),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순종하고, 여자는 남자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순종할 것입니다.
                                                   

잠언 12장 4절에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했고, 21장 9절과 25장 24절에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고, 21장 19절에 또한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국속담에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내가 집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다투거나 지나치게 바가지를 긁는 것은 하나님의 순리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격언이나 속담은 아무 근거도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일들이 주변에서 때때로 발생하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한다면 한번 마음에 새겨볼 만합니다.
“남편이 잘되고 못됨은 아내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순복할 때, 남편은 매사에 자신감을 얻어 자기 능력이상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19절: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아가파테(ἀγαπάτε; 원형 ἀγαπάω)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러하듯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조건을 내걸기가 쉽습니다. 아내는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함을 보이지 않는데,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순종해요?” 남편은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순종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이렇게 다투기 쉬운 우리를 향하여 바울은 “조건을 내세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아내 된 자는 ‘남편이 나를 사랑함을 보이지 않을 때도 먼저 순종할 것’이며, 남편 된 자는 ‘아내가 온전히 순종하지 하지 않을 때도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말도 있듯이 부부관계에서도 ‘지는 쪽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먼저 순종할 때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고, 남편이 아내를 먼저 사랑하고자 할 때 아내의 순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권면함으로써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의 질이 어떠할 것을 알게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 사랑으로 하듯이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함 역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주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8절에서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되 교회가 흠과 티가 없이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신 것같이 남편도 아내 사랑할 때 이와 같이 할 것인데 이렇게 하여 아내가 아름답고 거룩하게 되게 하는 것은 남편이 그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아내를 사랑함의 결과이므로 결국은 자기 몸--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5장 33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권면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함께 동거하여야 할 것은 여자는 연약한 그   
릇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아내는 영원한 나라의 기업에 함께 참예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아내와 불화할 때, 기도의 문이 막히며, 기도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우리의 삶 속에서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괴롭게 하지 말라
“괴롭게 하지 말라(μὴ πικραίνεσθε)”고 권면합니다. ‘모질고 거칠게 대하거나 쓴 마음을 갖게 하지 말라’(do not make bitter, do not become bitter, do not be harsh or embitter)는 뜻입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 것은 이 세상에서 아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오직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여기서는 아내)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그 형제(여기서는 아내)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이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헤아려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배우자와 부모, 형제와 자매, 성도들과의 관계를 잘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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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결혼하여 부부의 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할 것이며 아내는 남편을 복종과 경외의 사랑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자나 여자 모두 우리의 영원한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의 비밀을 깨달아 알고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되 우리를 위하여 희생적(犧牲的) 사랑으로 죽으신 주님께 복종(服從)과 경외(敬畏)의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도 가하고 하지 않는 것도 가한데, 이왕에 결혼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과 복종함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나 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믿는 사람의 집단인 교회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비밀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제도입니다. 그 이후에 천국에는 결혼하는 것도 없고,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없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분도 없고, 종이나 자주자의 구분도 없이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연합한 거룩한 성도만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결혼관계에 있습니까?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하심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비밀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혼자 지내시는 분이나 아직 미혼이신 교우님들도 영적인 남편이신 주님과 연합함의 크고 놀라운 비밀을 깨달아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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