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머리를 붙들라” (골로새서 2:18-19)

                                             “머리를 붙들라” (골로새서 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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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물’
노자는 낮추기(또는 겸손)를 잘하는 것의 대표로서 물을 들고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있는 말입니다:

    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스스로 낮추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以其善下之)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故能爲百谷王)
    백성 위에 있고자 하면 (是以欲上民)
    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必以言下之)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欲先民)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합니다. (必以身後之)
    그러므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이 그 무거움을 못 느끼고 (是以聖人處上以民不重)
    앞에 있어도 백성이 그를 해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處前以民不害)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즐거이 받들고 싫어하지 않습니다. (是以天下樂推而不厭)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다투지 못합니다.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도덕경, 제 66장)


노자는 또 이르기를,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습니다. (天下莫柔弱於水)
    그러나 단단하고 힘센 것을 물리치는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니 (而攻堅强者莫之能勝)
    그것은 바꾸지 않기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입니다. (以有無以易之)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弱之勝强)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 (柔之勝强)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지만 (天下莫不知)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莫能行)
    그러므로 성인은 말합니다. (是以聖人云)
    나라의 더러운 일을 떠맡는 사람이 사직을 맡을 사람이요,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나라의 궂은 일을 떠맡을 사람이 세상의 왕이라고. (受國不祥, 是謂天下王)
    바른말은 반대처럼 들립니다. (正言若反)

    (도덕경, 제 78장)

물은 높은 곳에 두더라도 높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물의 이 속성은 짐짓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변할 수 없는 속성입니다. 또한 물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의 모양이 없습니다. 네모난 용기에 담으면 네모난 모양으로 있고, 둥근 용기에 담으면 둥근 모양으로 있고, 울퉁불퉁한 용기에 담으면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산을 깎아 내리며 바위처럼 단단한 것을 부수는 힘이 있습니다.

물과 관련한 노자의 가르침은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주로 해당하는 것이지만 세상에서 원만한 처세를 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겸손(謙遜)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치심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성도에게 물과 같이 아래로 처하고자 하는 겸손과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부드러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힘을 발하여야 할 때, 물과 같이 거칠 것이 없는 기세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12절(또한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물과 같이 자기 자신을 낮춤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약함을 고백하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겸손의 의미와 교만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겸손이 좋다는 것은 많이 들어서 아는데 겸손해야 할 때 겸손하지 못하고, 담대해야 할 때 그렇게 함은 교만이라 여기고 겸손한 척 한다는 것입니다. 겉모양으로는 겸손이 있는데 속으로는 상대방보다 또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을 낫다고 여김은 겸손이 아닙니다. 다만 교만을 겸손으로 포장한 것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나 아니면 다른 성도가 교회와 관련한 일을 부탁할 때, “제가 뭐 할 줄 아나요” “아직 그만한 능력이 제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저는 기도할 줄 몰라요. 제게 기도시키시면 교회에 안 나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기도에 대한 겸손의 모양이 아니라, 그 속에 아집이 있음을 드러내놓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부탁 받았을 때,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면서도 그 일을 감당코자 힘씀은 교만이 아니라 믿음의 담대함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저의 믿음이 변변치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죽어봐야지 알겠지요!”라고 대답함은 겸손한 대답이 아니라 여전히 믿음이 없는 대답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예. 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보며 ‘아 저 사람은 교만한 믿음의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의 생각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겸손의 때를 모르고 있는 것이며, 교만함과 담대함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겸손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는 대신에 자신의 능력과 세상 지혜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이 (담대하나) 겸손의 고백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음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연고로 교만의 주장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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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상치하는 것들에 관하여 경고하고 있는데, 첫째는 거짓된 철학의 가르침(8-15절), 둘째는 율법주의적 주장(16-17절), 셋째는 겸손을 가장한 천사숭배(18-19절)와 넷째는 잘못된 금욕주의의 강요(20-23절)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18절: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천사 숭배는 일부러 겸손한 것임
믿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謙遜)이 좋다는 것은 자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동하고 말함이 겸손인지는 잘 모릅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의 마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되, 그 하나님은 그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여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을 듣기 원하십니다. 그 사람이 겉으로만 겸손한 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겸손하되 하나님께 담대함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겸손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고, 교만함과 담대함을 구분하는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아이들을 엄하게 키우다 보면, 어떤 아이는 아빠한테 이런 말을 하면 야단맞지나 않을까 자신이 없을 때 다른 형제나 자매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아빠에게 말을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아빠로서 저는 그 아이가 직접 나와서 말을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 아이가 자기의 요구나 주장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함이 아쉽게 생각됩니다. 물론 그 중에는 꾸중을 들을 요구도 있지만, 그래도 제삼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아빠인 제게 얘기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골로새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겸손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겸손인 줄은 잘 몰랐습니다. 그들 주위에 천사숭배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장인즉, ‘우리 사람들은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냐? 그것은 교만이다. 하나님께 직접 나가 하나님께 간구하기보다는 천사에게 간구하고, 하나님을 직접 숭배하기보다는 천사를 숭배하자. 그러면,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하나님, 하나님’라고 외치며 ‘이것 해주십시오. 저것 해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이 주제넘고 경망스러운 일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이라고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는 것도 잘못된 일같이 생각됩니다.  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대신에 천사에게 요청하여 천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숭배자들의 부추김에 넘어가게 되고 그들의 믿음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겸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천사숭배자들을 따라가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경고하되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온전하신 사람이신 그리스도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들어올 수 없는데,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 천사를 그 중간에 두고자 할 때 믿음의 상급을 빼앗기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인간구원을 위해서 한 일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는 사람의 숭배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헛되이 과장함
천사숭배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러이러한 일을 말해주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에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환상이나 때로는 계시를 통                                                   

한 그 신비적인 일들도 자기가 본 것을 주장하거나 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에 유익을 주고 그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의 일에 힘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이 영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본 것(또는 보지 못하였지만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고 믿음이 없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은사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와선 마치 세상의 모든 되어지는 일을 깨달은 사람이 된 양 교회 안에서 목회자를 비롯하여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는 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잘못된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이며, 욕체의 마음을 좇아 본 것(혹은 보지 못한 것)을 헛되이 과장하는 사람입니다.

    19절: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머리를 붙들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된 겸손으로 천사를 붙듦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님을 붙듦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능력이요 지혜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이 찢기심을 당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전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때를 얻어 들어갈 수 있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지성소에 이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담력을 얻어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고자 하는 성도들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붙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오(κρατέω)’는 적당히 느슨하게 붙잡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놓치지 않게 꽉 붙잡다(hold fast, hold firm, seize)'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잡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해야지만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길을 잃지 않고, 또 때로는 손을 놓침으로 낯선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엉뚱한 곳으로, 위험한 곳으로 끌려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강하신 손으로서 우리를 꼭 붙들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해서, 때로는 우리가 주님의 곁을 잠시동안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에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길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듦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의 각 지체요, 마디요 힘줄인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질서가 있는 자요 유기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속하여서 머리의 명하심에 따라 움직이는 몸이요 지체일 때 우리의 교회와 각 성도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에 따라 그 믿음과 삶이 온전하게 성장하고 따라서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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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바울의 머리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의 비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 뿌리가 공급하는 수분과 양분을 흡수함으로 인하여 잘 자라고 건강한 가지가 되어 싱그럽고 풍성한 과실을 맺을 수 있듯이, 몸의 지체들도 머리에서 내리는 명령을 따라 서로 연합하고 적절한 운동을 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충성스런 믿음의 자녀의 모습을 갖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겸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겸손은 가장된 겸손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겸손이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감도 아울러 함께 하는 건강하고 바른 겸손의 모양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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