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종과 상전” (골로새서 3: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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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로님의 이야기
얼마 전에 뉴욕에서 봉제공장을 경영하시는 큰 교회 장로님과 저녁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목사님들이 참으로 존경스럽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분 교회의 목사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임금(賃金)을 지급하면서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닌데, 자기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면,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을 비롯하여 성도님들이 열심히 맡겨진 일을 잘 수행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그 장로님은 봉제공장을 하면서, 시간당 임금도 그렇게 인색하지 않게 책정하여 지급하는데도 주로 히스패닉(Hispanic)인 직원들이 성심껏 일을 하기는커녕,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고 주인인 장로님의 눈을 속이고자 하여 사람을 고용하고 일을 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고충을 말씀합니다.
한 가게의 점원으로, 혹은 큰 회사의 직원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열심과 성실로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곧 주인이나 사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인 또는 사장도 그 사람을 각별하게 대할 것입니다. 회사의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내게 당장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기쁨과 자원함으로 잘 감당하다 보면, 종국에는 내게 유익이 돌아옵니다. 그 가게의 주인 또는 회사의 사장은 끝내 그의 성실함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심 가운데 그 사람을 축복하시고 하늘의 상급을 그에게 허락하십니다.
종 된 요셉을 축복하심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사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 냥에 팔리는 신세가 되고 해서 애굽에까지 가게 되고,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억울한 경우를 당하여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요셉이었지만 형들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함으로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영면함으로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고 주의 소유의 모든 일을 관장하게 됩니다(창 39:4). 그런데,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하는 일이 생기고, 그는 그 유혹을 온전히 뿌리쳤는데, 그 여주인은 오히려 요셉을 모함하여 그는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옥에서 만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잘 해석하고, 그는 요셉의 해석대로 전직이 회복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아직 옥에 있을 때 요셉은 그의 전직이 회복되거든 나를 기억하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하지만, 그의 전직이 회복될 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2년 뒤에 애굽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매, 하나님께서 그 술 맡은 관원장으로 요셉의 일을 생각나게 하시고 요셉이 바로의 꿈을 잘 해석하게 하시고 이 일을 통하여 그를 높이시어 애굽의 국무총리를 삼게 하십니다. 사람은 종종 그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의 일을 잊어버리고 살지라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속사정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으시는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실함과 성심으로 대하는데 때로는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고 해를 당할 때도 있지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의와 공평으로 우리에게 보응(報應)하십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 종과 상전의 예를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와의 세 번째 관계를 설명합니다. 바울의 이 글은 상전과 종의 관계를 당연시 한 것이라기보다는, 현 세상에서 주종(主從) 또는 다른 상하(上下)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관계를 통하여서 우리의 하늘상전이신 하나님을 순종함이 참으로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22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종들아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
종들을 권면하되 “모든 일에”(in everything)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 “모든 일에”였는데, 종들의 상전에 대한 순종도 “모든 일에” 그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과 마찬가지로, “순종하다”란 말은 헬라어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입니다. 훞(ὺπ)은 “아래”란 뜻이고, 아쿠오(ἀκούω)는 “듣다”란 뜻이므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순종하다”는 “아래에서 듣다,”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다”란 의미입니다. 종의 신분이 아래이기 때문에 상전의 말을 아래에서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들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라
에베소서 5장 6절에서도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상전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함은 겉과 속이 같게 하여야 합니다. 체면치례(體面致禮)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일 예배에 빠지면 목사님이 뭐라고 할 테지’라고 생각해서 주일예배에 참예함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기에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기쁨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을 함에도 주인이 보는 앞에서만 열심히 하는 척하고 주인의 부재(不在) 시에는 딴청을 피울 것이 아니라, 주인이 있든 없든, 지켜보든지 안 보든지, 기쁜 마음으로 주인의 일이 내 일인 것처럼 그렇게 잘 감당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의 한 달란트를 받아서 열심으로 경영하지 않고 땅 속에 파묻은 그 “악하고 게으른 종”도 자기의 일을 함에는 그렇게 게으른 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문제는 주인의 일을 경시(輕視) 여기며 눈가림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상전에게 순종하되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워하다”(φοβέομαι)는 말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어떤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또 어떤 때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무서워하다(fear)’ ‘겁내다(be afraid)’ ‘놀래다 (be frightened)’라는 뜻이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존경하다, 경외하다(respect)' ’경배하다(worship)‘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주관자의 권력이나 사단의 권세 앞에 두려움(무서워함, 겁냄)은 믿는 사람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하는 마음이니” 했습니다. 요한도 계시록 21장 8절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세들과 환경으로 인하여 겁내고 무서워하는 마음은 불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며 싫어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세상을 향하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경배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항상 (주님께)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두려워하다”라고 함은 극한적인 경외함인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경배를 드리게 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ἐν ἁπλότητι καρδίας)는 원어적 의미로는 “단순한 마음으로 (with simplicity)”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with single-hearted devotion)"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순종하되 이거 저것 재고 얻어질 이익을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님 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단심(丹心)으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함에도 마음으로 하지 않고 입술로만 하는 사람들이 흔히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29장 13절에서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78편 36-37절에서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하나님)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은 물론 입술로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사람은 마음에 정함과 성실함이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진대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할 것입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세상 관계에서도 동일한 성실함으로 상사를 대하고 주인을 대할 것입니다.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ἐκ ψυχής) 하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6장 5절(마태 22:37)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면하되,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라고 함은 ‘모든 마음으로(with all your heart, heartily, wholeheartedly)’ ‘(모든) 영혼으로(with all your soul),’ 곧 ‘전심(全心)으로’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대함에도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속일 수 없기에 거짓과 궤휼(詭譎)로 대하지 못합니다. 흔히, 육신의 상전은 나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기회만 있으면 거짓과 속임수로 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하여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잘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결코 잘 대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속이고자 할 것이며,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거짓말하고자 할 것이며, 사람을 두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두 마음으로 대하고자 할 것이며, 사람에게 변명을 잘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변명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인성의 문제요 믿음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인 한에 있어서는 이러한 것이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직 신성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이 세상에서도 살아가게 됩니다.
24절: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음
육신의 상전을 대함에 주를 두려워하듯이 성실한 마음으로 하고,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에게 유업의 상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유업의 상”(the inheritance as your reward)이란 하늘나라에서 성도가 받게 될 하나님의 칭찬이요 상급의 기업입니다.
사람을 잘 대한 사람에게 이러한 유업의 상을 주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잘 대한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잘 섬기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 그리스도를 잘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마태복음 18장 5절에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허물의 용서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6:14). 바울은 사람과 화목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엡 2:15-16). 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요일 4:20).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소자를 잘 대접하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신실함과 단 마음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함과 단 마음으로 할 수 없습니다. 입술로는 그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입술만의 고백(lip service)일 뿐입니다.
25절: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음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불의의 보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함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는 것이요 따라서 불의의 보응을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18장 41-46절에서 예수님은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하시리니 저희(=불의를 행하는 자들)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랫사람(소자)을 대하거나 윗사람(상전)을 대하거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를 대하듯이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심
“주는 외모로 사람을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2장 9-11절에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고 징벌을 내리심은 그 사람의 외모를 따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마음의 중심을 따라 어떻게 행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시고 그의 믿음의 행함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4장 1절: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믿는 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입장에 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윽박지르거나, 협박하거나, 공갈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엡 6:9), 아랫사람을 하나님의 의와 공평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함이 장차 하늘의 상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심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하늘의 상전이시요, 아버지시요, 남편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도 상대방을 어떻게 대함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요 무조건적인 의무요 도리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도리와 의무에 어긋나게 하였다고 해서 나도 상대방에 대하여 도리와 의무에 어긋나게 대할 것이 아니라 나는 나에게 주어진 도리와 의무를 다하여 신실함과 마음을 다하여 대할 것입니다.
3
성도의 결단
“인심(人心)이 천심(天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하늘의 마음을 얻는 것’이란 뜻일 것입니다. 동양사상에서 ‘하늘’은 우주만물의 운행의 원리입니다(“50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논어》「위정(爲政)」편]라고 한 공자의 ‘하늘’도 비인격적인 우주만물의 운행원리임). 그러나 성경에서의 천심은 비인격적(非人格的)인 우주만물의 운행원리(principle, matter)가 아니라 천지만물을 운행하시는 인격체(personal: 정확히는, 신격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심이 천심“이란 말의 성경적 해석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본문(또한 엡 5:21-6:9)에서 바울이 사람과의 관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 말씀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기쁨과 자원함으로 남편에게 복종하여 남편의 마음을 얻은 아내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며,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여 아내의 마음을 얻은 남편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공경함과 삶에서의 순복함을 통하여 부모님의 마음을 얻은 자녀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며, 자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격노케 하지 않고 낙심치 않게 하며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함으로써 자녀의 마음을 얻은 아비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실함과 마음을 다하여 상전을 대하고 모든 일에 복종한 종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며, 아랫사람을 대하되 하나님의 공평과 의로서 대하는 윗사람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소망하고 바라볼 것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을 경히 여기거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살아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 사람을 어떻게 대함이 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믿음의 표현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칭찬과 유업의 상을 얻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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