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위엣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1-4)

                                              “위엣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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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엣것”을 찾는 현실
얼마 전에 미국 종교 월간지 「무디」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습니다. 「무디」가 제시한 교회를 분열시키는 10가지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둘째, 교회 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셋째, 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넷째, 사랑 안에서 결코 참된 것을 말하지 말라;
다섯째, 불평 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 두라;
여섯째, 남을 용서하되 오직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자만 용서하라;
일곱째,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여덟째, 공중기도 시간을 통해 교회에 대한 불만을 다 토해내라;
아홉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열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교회를 분열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믿고 행하라.
이러한 사례들은 땅엣것을 생각함으로 망하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한 소년이 길을 가다가 20불 짜리 지폐를 주었습니다. 그는 공짜로 생긴 20불에 재미가 들려 혹 또 이런 일이 있을까 하고 땅만 쳐다보고 걷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는 평생을 땅만 쳐다보며 걸어 다니면서 물건을 주웠는데, 단추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 그리고 그밖에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것들을 줍느라 평생 맑은 하늘과 푸른 나무들과 지저귀는 새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잃고 결국 넝마주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격언에 “땅엣 것을 바라보는 자는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눈만 땅엣 것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땅엣 것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갑니다. 한국의 어느 조사기관이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정직하게 세상의 법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는 항에 “그렇다”고 답을 한 사람이 80%가 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정직하게 세상의 법대로 살면 손해를 보는 곳입니다. 해서, 들키지만 않는다면, 부정한 방법으로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문을 보면서 분개하고 자신은 자유로운 것 같은 부분들에서 실패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경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복 주실 믿음을 지키는 삶, 정직한 삶을 살아가면 당장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볼 것 같기에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마태 5:13-14)고 말씀하시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16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A장로가 그대로 살지 않고, B권사가 또한 그대로 살지 않고, C집사가 그렇게 살지 않는데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반문하며 그러한 삶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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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찾으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조건 절로 시작합니다. 바울의 권면의 말씀은 아직 자아와 교만과 주장이 죽지 않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와 함께 죽은 것을 믿는 사람들을 향한 권고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때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함께 부활한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누가 이런 사람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믿기로 작정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의 고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불의에 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0-11절에서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고, 또한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산상수훈의 장인 마태복음 5-7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설교하실 때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이 몰려든 것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갖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제사이요, 병고침과 귀신 내어쫓음과 다른 이적은 젯밥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사가 아니라 젯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과 초점은 말씀에 있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고, 모순투성이요, 그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볼 것 같은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고 은혜가 되고, 따라서 그 말씀대로 살기를 사모하고 힘 쓸 때 이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직 믿음의 사람이 되어있지 못하고 젯밥 때문에 몰려든 사람들을 향하여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3)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일진데 우리의 생각하고, 찾고, 구할 것은 “위엣것”--“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땅엣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위엣것”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2절에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반문하셨는데, ‘믿어지지 않던 하늘의 일’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힘써 “위엣것”을 찾아야 할 이유는 그 “위에” 예수님께서 계시되 죽음과 악의 모든 정사와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20-21절에서 바울은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힘써 “위엣것”을 찾아야 할 이유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빌 3:20)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오거나 유학 오려는 사람은 미국이 어떠한 곳인가, 내가 가는 주(state)는 어떤 곳인가 열심히 자료조사를 합니다.
미국 내에서 타 주로 이사하려는 사람은 그가 이사할 주(state)와 타운(town)의 환경과 지리에 대하여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막상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생활에 서툴지 아니하고 빨리 적응하여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위엣것”을 찾아야 할 것은 이 세상 시민권은 아무리 길어도 백년이 고작인데, 하늘나라의 시민권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4-5년 공부할 곳에 대하여 혹은 20-30년 살 곳에 대하여 그렇게 미리 조사하고 익숙하기를 원한다면, 영원한 삶의 기반이 될 하늘나라에 대하여는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곳이 어떤 곳이며’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더 평안하고 즐겁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살피고 알아봄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곳에서의 삶이 우리 믿음과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 성도가 어떤 모습과 태도로 사는가’와 무관하지 않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되, “땅엣것”에 얽매이며 지나치게 탐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절: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엣것을 생각하라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인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ōgĩto ērgŏ sum)라고 했고,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생각함으로 존재하고, 사람은 생각하기에 다른 동물과 구분됩니다.
땅엣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이 땅에 존재하고, 위엣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명이 하늘에 존재합니다. 우리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위엣것을 생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육의 몸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육신의 생각대로 우리가 살면 우리는 이 세상에 묶이며 이 세상과 함께 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살리는 영의 생각--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장 5-7절에서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영의 생각을 하지 않고 육신의 생각--자연인의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하며 또한 할 수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크리스천이 무엇으로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과 구별될 수 있습니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없느냐로 크리스천 여부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크리스천이요, 아직 믿음이 없으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아직 크리스천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물론 성령의 은사들과 열매들로 알 수 있지만, 내가 영의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로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있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아무리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라”고 외쳐도 위엣것을 찾을 수가 없고 위엣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위엣것을 찾고” “위엣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선물로 또는 증거로 주십니다.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땅엣것을 생각하는 것”은 육신에 속한 것이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롬 8:6) 때문입니다. “땅엣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5절에 열거됩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라”의 헬라어 ‘프로네이테(φρονείτε: think, have in mind)'는 현재형 명령인데, 이는 단 한 번만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각하라‘(continue to think)는 권고입니다. 따라서 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지속적으로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보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에서 일주일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책을 집어들면 그 내용이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학문에 진보가 있기 위하여서는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를 계속 생각하여야 합니다.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그 주제에 대하여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자기의 연구하는 것에서 커다란 진보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에 성공하려면, 자나깨나 장사를 생각하고 사업장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거나 혹은 망하기도 합니다. 몇 개의 세탁소를 갖고 있는 분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이분이 골프를 하는데 골프가 장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골프에 재미가 들려서 일주일에 2-3일 골프장에 나가는 사람 치고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나의 믿음과 크리스천 됨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와 그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게 없을 때 이러한 일은 커다란 부담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실 때, 이러한 일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요 감사거리입니다.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우리가 “땅엣것을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은 땅엣것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죄와 허물과 땅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하여 죽기로 작정하고, 그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그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못 박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성도의 생명은 더 이상 이 세상 임금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그의 생명이 감추인 사람은 그가 이 세상을 살 때 연약한 것 같으나 강하고, 죽은 자 같으나 기실은 산 자입니다.
에베소서 2장 4-7절에서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신 것”,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을 과거적인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헬라어 문법으로는 a-orist). 우리가 죽은 자들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될 것과 하늘에 앉는 자가 될 것이 확실하기에 이와 같이 과거적으로(헬라어 문법의 a-orist는 사실은 과거적인 용법이 아니라 one-time action임, 시제가 아니라 사건이 단회적인 것임을 강조함)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남
믿는 사람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아니 하셨다면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주여 곧 오시옵소서”(마라나타)라고 하며 주의 다시 나타나심을 고대하며 그들 앞에 놓인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성도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요, 성도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살전 4:16) 나타나실 때 성도들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3
성도의 결단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세상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이 당장에 잘되는 것을 보면 그 방법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위엣것”을 찾지 않게 하며 “땅엣것”을 찾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어가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위엣것”을 귀히 여기고 찾는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위엣것”을 기쁨으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비로소 우리는 즐거움으로 “위엣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을 믿는 믿음과 소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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