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들” (골로새서 4:7-9)
1
축구감독 히딩크의 선수 선발 기준
2002년 한·일 월드컵(Korea-Japan FIFA World Cup)을 앞두고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기용된 히딩크(Hiddink)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감독으로서 그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그는 축구 잘하는 사람을 대표선수로 뽑아요.” 대표팀을 맡은 감독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만, 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과거로부터 얼마나 방해받아왔는지 모릅니다. 한국국민들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한국선수들과 히딩크에게 열광한 것은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음이 첫 번째 이유이겠지만 그들의 선발에 정실이 없고 그들이 불굴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여 매 경기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어떤 인터넷 신문기사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히딩크의 지도자로서의 위대성은 ‘축구 잘 하는 선수를 선발하여 축구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선의의 경쟁심을 고취시킨다’는 것입니다.
한국 정치와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재가 적어서 문제입니까? 나라의 크기에 비하여 한국처럼 교육을 강조하고 인재가 많은 나라가 어디 또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많은 인재에도 불구하고 학연과 지연과 혈연을 따라서 나눠먹기 식의 인재등용을 함이 문제이요, 대통령이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서 전혀 엉뚱한 선발기준에 따라서 인재가 아닌 사람을 중요한 보직에 앉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축구를 응원하는 사람이 인터뷰에서 ‘만일 한국의 정부가 국민을 위하여, 히딩크 감독처럼 그렇게 현재 실력 있는 사람을 중용하는 사심 없는 정치를 한다면 모든 국민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정부를 성원할 것’이라고 의미 있는 말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 선발 기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의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선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일꾼인 제직을 선출할 때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일하기를 즐기며 열정이 있는 사람이 제직이 되어야 합니다. 교인의 사회적 신분과 재산 정도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웬만큼 큰 교회들에서는 믿음은 출중하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재산이 넉넉하지 않으면, 장로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에서 요구하는 장로기준에 미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의 기준에는 미달이지만, 재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은 장로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성경과 믿음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자 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서는 멀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교회의 총체적인 감독이신 하나님의 기준과 명령에 따라서 일꾼들이 선발되어져야 할 것이고, 또한 선발되어진 일꾼들은 하나님의 신실하고 사랑 받는 종으로서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생명까지 기쁨과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들을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의 편지와 소식과 위로를 전달할 두 사람--두기고와 오네시모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을 칭함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요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각각 소개하고 있습니다.
7절: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사랑을 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인 두기고
바울은 로마의 감옥 혹은 가택연금의 상태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와 골로새 교회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편지할 때 그의 세 통의 편지들을 두기고 편에 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울의 사역은 굶주림과 매맞음과 갇힘과 죽음의 위협의 연속이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바울에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힘을 얻을 수 있음은 그 주위에 그를 돕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기고도 바울 주위에서 말없이 수고함으로 바울을 도운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장 4절에 “아시아 사람 두기고”라 표현되어 있는데, 그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거의 마무리짓고 고난이 기다리고있음이 예상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에 마게도냐에서 소아시아로 향할 때 바울을 동행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이외에 디도서와 디모데후서에도 그의 이름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그는 주로 바울의 말이나 편지 심부름을 맡아 했던 사람인 듯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2절에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했고, 디도서 3장 12절에는 그레데 섬에서 목회를 하고있는 디도를 권면하기 위하여 편지를 보낼 때에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고 했습니다. 편지 한 통이나 두 통을 전하기 위하여 먼 길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함이 그리 즐겁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 같지 않습니다.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인데 나를 시킴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기고는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이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전달된 바울의 서신들이 정경(正經) 속에 포함되고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읽히게되는 귀중한 일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수고와 봉사를 기뻐하십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서신을 전달하는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우편배달부의 일을 잘 감당함으로 바울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칭찬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작은 것처럼 보이는 일에 충성하고 열심을 보일 때 우리가 감당한 그 작은 일은 더 이상 작은 일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우리의 충성과 열심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귀한 일로 여겨집니다.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서 소개할 때 “사랑을 받은 형제”라고 시작합니다. 두기고는 생색이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을 잘 감당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주위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음은 당연하고 합당한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때 그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됩니다. 교회에 이러한 성도들의 수가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입니다. 사소한 일을 감당할 때 기쁨으로 했을 뿐 아니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끝까지 한결같음으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 길을 여행함과 같이 장기간이 요구되는 일--해서, 때로는 마음이 변하여서 중도에 포기할 수 있는 일은 늘상 그의 몫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교인에게 교회 일을 부탁할 때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항상 일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처리하여 안심하고 맡길 수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한다고 맡았다가도 중간에 마음을 변경하여 일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안 놓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함에 자신의 일보다도 더 귀히 여기시고 성실함으로 감당하시는 성도님 되시기 바랍니다.
두기고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fellow servant in the Lord)”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종”은 부정적인 개념과 긍정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개념은 주인에게 강압적으로 매여 있으므로 주인의 일을 하되 두려움으로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주인에게 복종은 하지만, 그 마음은 주인에게서 멀리 떠나 있고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자로 여기시며, 우리를 사랑스런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개념으로서의 “종”은 하나님의 일을 하되 자기를 종처럼 여겨서 충성을 다하여 한다는 뜻입니다 (고전 4:1-2).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종과 같이 충성으로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분명히 자유자요 사랑스런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랍시고 거드름을 피우거나 게으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상전을 두려워하여 맡은 일에는 철저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상 종 된 자가 일은 철저히 잘하였지만 그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종의 자세로서 일을 감당하기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내 일로 여김으로 책임감 있게 그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두기고가 하는 일과 사역은 달랐지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충성과 열심으로 한다는 면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종 된 자들입니다.
8절: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두기고를 보내는 이유
두기고를 보내는 첫 번째 이유는 바울과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편과 여러 가지 장해요인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고 있는가를 골로새 성도들에게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비록 지금 몸은 로마의 한 곳에 부자유스런 상태에 있지만 영으로 골로새 성도들과 교통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그의 현재 사정과 형편을 그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필요함은 골로새 교인들이 바울과 그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더욱 크신 능력으로 바울을 도우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두기고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로(慰勞)하게 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6-8절에 나열한 성령의 은사 가운데 권위(勸慰)하는 은사가 있는데, 두기고는 이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던 것같습니다. 권위하는 은사란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인데, 그와 대화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또 기쁨과 소망을 아울러 줍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은사를 받는 교우님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
두기고와 함께 보내는 오네시모에 관하여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란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원래 골로새 교회의 지도적 인물인 빌레몬에게 속하여 있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물 중에 일부를 훔친 후에 그 집을 도망쳐서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오네시모는 그의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오네시모를 향하여 바울은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세상 신분은 여전히 노예이요, 그의 옛 상전인 빌레몬이 그를 당국에 고소하면 죽을 수도 있는 처지이지만, 복음 안에서 바울에게는 그는 노예도 아니요 범죄자도 아니요 다만 같은 주님을 섬기는 형제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주님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으로 우리가 과연 주님의 일에 신실한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받을 만한가, 하나님께서 내게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내 일로 알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고 함은 오네시모가 골로새 교회에 속하였던 사람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의 상전이었던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고,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골로새 교회 성도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이 상전과 종이 한 교회에서 같은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상전이 크리스천이기에 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전이 속한 교회에 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이후에도 여전히 육신 뿐 아니라 영혼으로도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생활을 하지만 복음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따라서 그들의 심령과 삶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오네시모도 골로새 교회를 출석할 때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바울을 만나고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주님으로 영접하매 그의 삶이 변한 것입니다.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7절과 8절에 이어 다시 한 번 쓰고 있습니다. “저희”는 두기고와 오네시모입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통하여 바울의 근황과 필요와 사역을 전하고자 함을 반복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골로새 성도들에게 기도를 당부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바울의 현재의 형편을 자세히 알림으로써 그들로 바울과 그의 전도사역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 알게 하고, 그러므로 더욱 더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는 기도를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와 교통, 그리고 위로와 권면은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연약하여지기 쉽고 또 때로는 좌절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과 역사를 나타내기를 원하시는데, 많은 경우에 성도들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그의 뜻을 드러내시고 그의 계획과 사역을 완성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따라서 하나님의 세심하신 역사에 민감하고, 성도간에 교통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의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성도의 결단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도 아니요 특별한 사역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일의 많은 부분은 그렇게 특별한 달란트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특별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하게 젊음이나 힘을 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못함은 그 일이 시시해 보이고, 자신은 적어도 그 일보다는 보다 근사한 일을 감당할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사소한 일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생각하는 근사한 일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일들로 그 일 하기를 거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은 일은 사소하게 보이고 생색이 나지 않기 때문에 거부하고, 큰 일은 너무 부담스럽고 시간과 노력을 너무 많이 빼앗길 것 같아 거부함은 아직도 내 마음이 그리스도를 사랑함에서 멀리 있다는 반증입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 같이 주님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맡기시는 어떠한 일도 신실하고 사랑 받는 일꾼으로서 잘 감당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온전함과 신실함으로 감당하십시오. 그리할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태 25:21, 23)라고 칭찬하시며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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