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5, 201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빌레몬 1:1-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빌레몬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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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수단(手段)이 아니라 목적(目的)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야 할 터인데, 좀 더 편한 세상 삶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감각의 믿음을 갖고 그들의 생각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해석합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 감각을 가진 교인에게 한글번역 “그리하면”이 참으로 매력적인 접속사(conjunction)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고, 생활하는 문제에서 축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믿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현실 축복의 삶”에 한 조건이 됩니다. 즉,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자 함은 더 큰 매력인 현실에서의 만사형통의 삶의 비결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현실 축복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우선이요 목적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이러한 약속의 말씀 자체를 믿지 않아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자체를 살지 않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오해의 소질을 유발한다는 면에서 한글성경의 “그리하면”(앞의 구절을 조건절처럼 해석하게 한)이란 말은 부적절한 번역입니다. 영어성경의 번역이 헬라어 원문에 더 충실한 번역인데,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KJV). 이것을  번역하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원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부차적인 축복으로“ 이 세상의 삶의 방편도 마련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 현실의 삶--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들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의 접속사는 ”그리고“(καὶ: and)이지 ”그리하면"(then)이 아닙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를 잘못 해석하면, 신앙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을 현실축복 삶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재 대부분의 한국교회들의 한계입니다.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삶의 한 방편이요 수단이지 목적이 절대로 되지 못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확연한 구분이 있습니다. 그 구분은 때가 찬 경륜을 인하여(엡 1:9) 그리스도가 육신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비밀이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남으로 말미암은 구분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같이 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심이 필요하고, 이 세상에서 그들을 축복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에게 부요한 삶을 허락하셨고, 야곱을 축복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에게 많은 가축의 떼를 더하셨습니다. 요셉을 축복하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로 애굽의 국무총리를 삼으셨습니다. 다윗을 축복하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고, 솔로몬을 축복하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에게 부와 명예와 장수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현 세상에 존재하는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인물들에게 현실에 속하는 조건들로 하나님의 축복들을 확인시키셨습니까?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실의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기업의 축복이 약속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의 보증으로 각 성도 안에 성령의 역사를 체험케 하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약시대의 성도들과 교회들이 온통 현실의 축복이 축복의 전부인양 이것들로 인하여 기뻐하거나 근심한다면,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가 유대주의보다 나음이 무엇인줄 모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인류역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성도들의 삶이 아직 하나님 나라가 계시되지 않은 유대주의 입장에서 해석된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현실에서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까? 환난과 핍박은 그들의 몫이고 현재를 사는 크리스천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이 세상에서의 평안한 삶입니까?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과연 무엇입니까?
부한 삶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삶입니까?
상류층의 삶입니까? 아니면 하류층의 삶입니까?
지배자의 삶입니까? 아니면 피지배자의 삶입니까?
환경이 하나님의 축복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하는가 아닌가?’ ‘내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는 나의 입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향한 감사와 찬송이 있는가 없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환경을 초월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음은 우리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시대의 믿음의 선진들의 감사와 찬송을 좀더 진지하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자랑과 간증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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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두기고 편에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골로새서와 함께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한 장으로 된 짧은 편지를 통하여서 우리는 바울의 자랑이 무엇이며 그가 보여준 그리스도인의 형제애(φιλαδελφία: 필라델피아)가 어떠한 것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1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Paul)
요즘 간증집회를 인도하는 분들의 자랑과 간증거리는 주로 세상 삶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더니 사업이 번창하는 축복을 받았다’, ‘자녀들이 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유수한 기업의 중역들이 됐다’ 등등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할 일이지만, 세상에서 받는 축복 정도가 믿음의 분량을 측량하는 기준인 것처럼 여기는 간증은 성경의 메시지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랑과 간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a prisoner of Jesus Christ)라고 자신을 칭했습니다 (또한 몬 1:9).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절에서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라고 했고, 또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또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고 했으며,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당하고 있는 약한 처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고후 11장 30절). 세상 삶에 집착하는 현대 교인들의 자랑과는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바울의 세상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겠습니까? 바울은 그런 것보다는 그의 약한 것들을 (아니 약하게 보이는 것들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강하고 부하게 보이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약하게 보이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방나라에 증거하였는데 나는 오히려 갇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전도했는데, 나는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난한 삶 가운데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나는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나의 사업은 실패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런 실패 속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되니 나는 행복한 실패자입니다.’ 이렇게 간증하시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성숙해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고난에 처하거나 실패를 자청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성공 중에 있거나 실패 중에 있거나 한결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함이 믿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 디모데(Timothy)
디모데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소아시아 루스드라에서 만난 사람입니다(행전 16:1). 어머니 유니게(Eunice)와 할머니 로이스(Lois)는 믿음이 좋은 유대인이었으며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본시  성품이 착하고 인근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던 사람(행전 16:2)이었습니다. 바울을 만난 이래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사역에 협력하였습니다. 후에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곳 교회를 사역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절에서와 여기서는 형제(brother)라고 부르고 있지만,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는 “믿음 안에서 참아들 된 디모데”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1장 2절에서는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를 때로는 ‘형제’라, 때로는 ‘사랑하는, 믿음 안에서 참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가 바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위안이 된 사람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믿음의 형제와 자매, 친구가 필요한 것은 이들로 말미암아 믿음이 더욱 굳어질 수 있으며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Philemon)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서 전도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 그곳을 방문하여 복음을 들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가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후 골로새로 돌아와서 에바브라 등과 가정교회를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7절과 9절에서 두기고와 오네시모에게 “사랑을 받는 형제”란 수식어를 사용하였는데, 빌레몬에게도 동일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도들과 하나님께 우리 믿음의 신실함과 삶의 한결같음으로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일을 목회자와 다른 성도들과 함께 감당하는 “동역자”(fellow worker)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절: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자매 압비아(Apphia)
“자매(sister) 압비아”라고 했는데, 빌레몬의 아내로 짐작됩니다. 바울이 그를 “자매”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바울과 일면식(一面識)이 있든지 이름을 전해 들어 알든지 하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 압비아와 그 아들 아킵보의 이름을 열거한 것을 주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교회에 속한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협력과 성장은 최소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한 교회에 속한 남편과 아내가 불화하는데, 부모와 자식이 갈등하는데, 성도들이 속한 가정들의 연합인 교회가 조화하고 평안하며 성장하겠습니까?
교회생활을 하는 부부들 중에 의외로 많은 가정들이 불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내와 남편의 믿음의 정도가 달라서 불화하고, 믿음의 색깔이 달라서 다투는가 하면, 기존의 갈등이 그들의 신앙생활을 원만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에 오는 차안에서 한바탕 다퉈서 얼굴이 벌건데, 예배 중에 찬송을 부른들 은혜가 있겠으며, 설교를 들은들 그 말씀으로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는 신앙의 색깔과 의견의 차이로 아예 서로 다른 교파의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화목과 주님의 일을 위한 협력과 동역을 생각한다면, 부부는 오랜 애정생활의 결과로 생김새와 성격이 닮아가듯 신앙의 모양과 정도도 “발전적으로” 닮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남편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할 때 아내도 함께 기도하며, 아내가 교회를 위해서 봉사와 희생하기를 원할 때 남편도 봉사와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는 믿음의 가정과 교회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바울 주위에 있는 부부 중에 대표적으로 신앙의 본을 보인 부부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그들은 누가 더 먼저요 나중이랄 것도 없이 바울의 사역에 전적으로 동참한 부부요 바울과 그 사역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 3-4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압비아와 빌레몬 부부도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함께 협력하고 봉사한 부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협력과 동역이 있었기에 아들 아킵보가 골로새 교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함께 군사 된 아킵보(Archippus)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서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교회를 사역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아킵보에 대하여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군사 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3-4절에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목회자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하기를 원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함께 군사 된 자”입니다. 군사 된 사람의 할 일은 대장이신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맡겨진 복음증거의 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House Church)
초대교회는 가정교회들 중심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가정교회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행전 12:12)에 있었고, 빌립보 가정교회의 처음 시작은 자주(紫紬) 장사 루디아의 집(행전 16:40)에 있었고, 로마에서의 가정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롬 16:5; 고전 16:19)에 있었고, 라오디게아에서의 가정교회는 눔바의 집(골 4:15)에 있었고, 골로새에서의 가정교회는 빌레몬의 집(몬 1:2)에 있었습니다. 지역이 비교적 넓은 갈라디아에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데(갈 1:2) 이들 또한 여러 명의 성도들이 자신의 집들을 예배의 장소--가정교회--로 제공한 것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들도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와 동일한 것으로서 이들은 살벌한 문화혁명(文化革命) 기간에도 모이기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모여 문화혁명이 끝난 다음에 교회가 말살되지 않고 오히려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혁명 전보다 몇 십 배 증가하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거처를 예배 장소로 제공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집과 사역을 축복하셔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놀랍게 증가시키셨습니다. 바울 당시의 이런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성장과 복음이 땅 끝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까?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누구나 다 꺼려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구역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인데,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그 위에 수시로 모이는 모임의 장소로 집을 제공하는 것이 보통 믿음으로 되겠습니까? 장소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과 마실 것, 또 때로는 먼데서 찾아온 방문객을 위하여 잠자리까지 제공해야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현대를 사는 많은 교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나 감당하는 것들이지 오늘날 교회생활을 하는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의 이야기가 하나님 말씀인 것은 그것이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함
바울서신들의 서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문안인사의 정형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그런데, 한 군데도 예외 없이 “은혜와 평강”의 순이지 “평강과 은혜”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 다음에 평강이지, 은혜가 없는 평강은 없습니다. 성경적인 은혜, 카리스(χάρις)는 태양처럼 크고 뜨거운 하나님이라고 하는 본체에서 발산되어 우리에게 미치는 그의 ‘다함 없는 사랑과 긍휼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감(體感)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사랑을 갈망하는 성도들에게 은혜의 증거 또는 표현으로서 선물(gift as an expression of divine grace)을 주십니다. 이 ‘은혜의 선물’을 카리스마(χάρισμα)--(성령의) 은사(恩賜)라고 하는데, 이는 좀더 구체적이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강(εἰρήνη; 히브리어로는 샬롬[םולשׁ])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화목케) 되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롬 5:1-2). 이 하나님의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이 쉽게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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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떤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갇힌 자 된 것도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삶 가운데 여러분에게 임하신 축복을 자랑하되, 남의 눈에는 안 된 것처럼 보이는 축복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을 사시되, 성도들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주시고, 성도들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받는 자가 되십시오. 또한 목회자들에게는 협력자요 동역자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 속한 것들을 교회를 위해서,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는 헌신적이고 넓은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여러분 삶 가운데, 여러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되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평강(평안)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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