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그림자와 본체(本體)” (골로새서 2:16-17)

                                          “그림자와 본체(本體)” (골로새서 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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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 한 사회의 규범
1950-60년대에 한국에서 (큰 교회의 목사라고 하더라도) 목회자가 자가용을 운전하면서 교인 집을 심방한다고 하면 그는 아마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은 웬만한 부자가 아니라 굉장한 부자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인 중간이상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 안 된다(?)고 인식되어지는 목회자가 자가용을 소유하고 운전한다면 이것은 (묵시적인) 사회규범에 저촉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몇 만 명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개인적인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교인들이 때로는 분에 넘치는 선물을 준다고 합니다. 그 선물들 중에 천만 원 상당의 음향시스템이 있는가 하면 값비싼 외제차도 있다고 합니다. 그분 말씀이, 음향시스템은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었는데 외제차는 타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선물은 받고 어떤 선물은 돌려주어야 하는가를 정함은 대형교회의 목사로서 그의 개인규범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규범이 목회자 전체의 규범 또는 교회규범, 사회규범에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면, 그는 자신의 개인규범을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을 위한 기준 또는 규범으로서의 성경
신앙생활을 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어려운 것은 성경말씀의 해석과 적용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저주아래 있지 말라’(갈 3:10-13 참고)고 함으로써 이방인은 율법 책이 필요 없는 듯 말씀하는데, 크리스천들에게 여전히 구약성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은 율법 또는 말씀의 일점일획도 가감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마태 5:18; 마가 13:31; 누가 16:17 참고).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은 “믿음”을 강조한 것 같은데,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대표주자인 야고보는 (믿음의 결과 증거로서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따라야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요 이방인 크리스천인 면에서는 바울 사도의 서신들만 따르면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한국, 미국 등 모든 이방나라의 교회들 중에 신약성경--그 중에서도 바울서신들만 갖고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교회들이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구약과 율법을 버려도 좋다고 설교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에 관하여 말씀하되, 로마서 7장 12절에서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했고, 7장 14절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8장 14절에서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의 저주아래 놓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왜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이 죽기보다도 싫은 고통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 같아서 아무 의미 없이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율법이 저주요 멍에일 뿐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율법에서 자유한 것은 좋은데 방종에까지 이른다면 이는 문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기에 나의 삶은 아무래도 좋다’고 여긴다면, 이 사람 역시 바울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오해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한 국가, 한 사회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이 그 국가의 구체적인 법률들을 전부 알지 않아도 법률에 저촉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구체적인 법률이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알아야 될 때가 있습니다. 크리스천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과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총 66권의 모음을 정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관한 기록이 이 66권이 전부가 아니고 수 백 권의 많은 책들 가운데 신뢰할만하고 일관성이 있는 것들이 정경 66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정경을 영어로는 캐논(Canon, κανών)이라고 하는데, 이는 (판단의) 기준 또는 규범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크리스천 삶의 기준 또는 규범이 되는데, 이 기준은 신약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구약의 말씀도 그 기준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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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율법의 규례를 따라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과 안식일에 의해 구속(拘束)당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이방 크리스천들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되어진 율례와 절기, 사건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재해석되어진) 이들이 성도들의 삶에 새로운 기준(canon)과 규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16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먹고 마시는 문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율례와 규례를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이러한 율법들의 틀 안에 가두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거룩하고 성결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하시기 위하여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다른 식사규례(dietary law)를 가진 이방인들에게 먹고 마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짐승들도 먹었고, 생명을 상징하는 짐승의 피도 마셨습니다. 또 시장에서 거래되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로 또 시비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함으로 크리스천 삶의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고 비본질적인 것은 무엇이며,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구분하고자 합니다.
레위기 11장에 구체적으로 어떤 짐승들, 물고기들, 조류와 곤충들이 정한 것이고 부정한 것인지 열거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을 연구한 크리스천 의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정한 것으로 규정한 짐승들, 물고기류, 조류와 곤충류는 건강식품이요, 부정한 것으로 규정한 것들은 건강을 해치는 지방, 콜레스테롤(Cholesterol)이 많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사는 크리스천들도 이 규례에 따라 식사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너무 이에 매이면 율법주의적인 삶이 되기 쉽습니다.
이 식사규례(dietary law)에 따라 천년이상을 살아온 유대인들에게는 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스러운 것이요, 부정한 음식은 보기만 하여도 비위가 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분을 모르고 몇 천년을 자신들의 음식문화에 젖어온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위해서 이 음식문화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주의 크리스천들 중에 상당수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유대인의 율법과 할례와 함께 식사규례를 지켜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계속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0장(9-16절)에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서 부정한 것을 정한 것으로 바꾸신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부정한 것으로 여겨오던 것들 먹음을 허락하셨습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드 바르도(Bridget Bardeau)가 동물애호가의 입장에서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성경해석으로 보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비난이요 주제넘은 행동입니다. 한국에서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들의 수는 아마도 기껏해야 10-20% 정도일 것이요, 아무리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도 애완용 개를 잡아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솔트래이크(Salt Lake) 동계올림픽 기간 중에, 쇼트트랙(Short Track)의 김동성 선수 판정시비 사건이 있던 날 밤에 NBC 야간 코미디 프로그램의 호스트인 재이 레노(Jay Reno)가 한국의 개고기 음식문화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였다고 하여서 한국국민들이 열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또한 바울이 지적한 대로, 타국의 음식문화를 코메디의 소재로 삼았을 뿐 아니라 더욱이 비하하는 대상으로 여겼기에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절기나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
이스라엘인들이 오늘날까지 지키는 삼대 절기가 있습니다.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가나안 땅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애굽인들과 구분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장자를 살려주신 유월의 날(Passover)을 기념하여 이날로부터 일주일동안 무교병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    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때 그들에게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추수한 곡물 가운데 첫 부분을 드림으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아직 장기저장 시설이 개발되지 않은 때에 곡물들을 오랫동안 썩지 않고 신선하게 보관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월삭(a new moon)은 새로운 달을 맞이함을 기념하는 날로서 매월 초하루에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민 28:11-15).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신 5:12)고 말씀하신 대로 육일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에 안식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삼대 절기가 유대인에게는 역사적 의미와 민족적 의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 자체로는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유대인 절기 그 자체의 목적으로 절기를 지킴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월력(음력)이 아니라 일력(양력)을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월삭은 별로 의미 없는 날일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0-11절에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경계의 말씀을 줌으로 의미 없는 유대주의로의 향함이 믿음의 삶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그 까닭은 그 날 안식하면서 그들의 삶을 보호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세부적인 금기조항들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면, 이는 진정한 안식이 될 수 없으며 참된 쉼과 평안을 마련하여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안식일의 의도가 훼손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초대교회 신도들은 때로는 안식일에 때로는 주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던 숨어서 지내던 성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칠 선생이 필요한 날 비밀스럽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위험한 고비들을 넘긴 교회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안식일 대신에 주일에 찬송과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성례전을 행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평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날 안식을 취하고 예배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을 허락하신 의도를 이해하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식을 즐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let no one pass judgment on you)"고 말씀합니다.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비본질적인 문제요, 의미가 적은 것들--즉, 유대인의 식사규례(dietary law)를 따라 먹고 마시는 것, 유대인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삼거나 책잡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유대주의 선생들이 이러한 비판을 함으로 골로새 성도들이 동요되었는데,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17절: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공동번역은 “이런 것은 장차 올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고 그 본체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These are a shadow of the things that were to come; the reality, however, is found in Christ. (이러한 것들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실체는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어집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장래 일의 그림자와 본체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먹고 마시는 것을 포함한 율례들, 절기들과 안식일, 그리고 여러 사건들은 다만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8장 5절에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고 했고,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림자 또는 모형은 참형상--본체(本體)가 아니라 본체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먹고 마신 만나와 바위에서 솟아난 물은 그 자체로는 그림자요 모형일 뿐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로써 그들의 생명양식을 삼고 힘을 얻었지만, 광야에서의 만나와 물은 실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2-33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35절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11장의 정한 음식도 또한 성결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6장 53-57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애굽에 머물러 있을 때 애굽인들의 장자들과 구분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장자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고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었는데, 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절기도 결국은 인류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맥추절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추수 때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믿는 사람들을 알곡으로 거둬들이실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입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서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고, 마태복음 13장 29-30절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주인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장절은 무엇입니까? 이 역시 본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곡물과 기타 식물(食物)을 썩지 않게 잘 보관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신약시대에서 이 잘 보관되어지는 곡물과 식물은 바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사람들 안에 영으로 함께 계시매 그들이 썩지 않고 온전하게 잘 보관되어집니다. 우리 자신들의 약함과 죄성으로 인하여는 쉽게 타락하고 부패할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킴이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과 평안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매(마태 12:8)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쉼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안식일을 지킨 이스라엘의 안식(=쉼)은 진정한 안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히브리서 4장 8-9절에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은 불안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취한 안식은 다만 모형이요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본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몸은 그리스도시니라”(the substance belongs to Christ)고 했습니다. 영어성경 NIV의 번역대로 구약의 먹고 마시는 일, 절기나 월삭과 안식일, 기타 다른 사건들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속사(Salvation History)적 입장에서 구약성경의 가치는 구약의 사건들과 기록들이 구원의 본체 되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케 함에 있습니다.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가 본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나타나고 해석되어지는지 우리로 하여금 발견케 하십니다. 구약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알게 하십니다.
                                                       
유대주의의 식사 규례, 절기, 월삭과 안식일들,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은 그 자체로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별로 의미가 없고 따라서 이방인들은 이 율례와 절기와 안식일과 사건들의 멍에(또는 저주) 아래 자신들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갈 3:10, 4:5 참고). 그러나, 이러한 것들(그림자)이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될 때--생명의 양식, 유월절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추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심, 그리스도의 평안과 안식, 그리스도의 동행하심--이는 크리스천의 삶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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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현재를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무엇이 중요합니까? 본체 되신 그리스도만 온전히 바라봄입니다.
규범이나 기준 그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의 해석과 적용은 시대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문화와 환경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불완전한 그림자요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이 계신데, 바로 우리의 영원한 길과 생명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대로(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현재를 사는 성도들 가운데 여전히 그림자를 바라보고 붙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에 전적인 소망을 두고 안주하고자 하는 사람은 실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있음입니다. 육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은 실체 같으나 그림자일 따름이요 영원한 것 같으나 다 지나갈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이요, 그림자 같으나 참된 실체입니다(히 8:5 참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사시며 증거하신 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요 실체인 하나님나라입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미혹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질 그림자를 붙잡고자 평생을 헛된 달음질을 하지말고, 우리의 길과 생명이시요, 우리의 본체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실체의 실체인 영원한 본향 하나님나라와 하나님께만 소망을 닻을 내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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