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그리스도의 할례” (골로새서 2:11-15)

                                          “그리스도의 할례” (골로새서 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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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죄와 허물의 청산(淸算)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제반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국가이기에,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조상들과 자손들이 살아가기에 잘못이 청산되어지기는 해야 하는데 때로는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단죄형식으로 행해짐을 봅니다. 언젠가 진보적인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주동이 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 708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친일파로 규정하고 언론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들만이 친일을 하였겠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친일을 했어야 했을 것이며, 반대로 거의 모든 조선사람들이 외형으로는 친일을 했으나 그 마음 속에서는 애국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희망의 나라로”의 작가 현제명씨나 “울밑에 선 봉선화”의 작가 홍난파씨도 단지 친일파로만 매도하기엔 그분들 마음 속에서의 상황은 좀더 복잡하였을 것입니다.
인위적(人爲的)이고, 작위적(作爲的)인 친일파 규정은 진정한 사과나 회개와 용서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친일을 하여 민족이나 어떤 대상(또는 그룹)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일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리할 때, 그를 용서해주고 다시 그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는 대신에,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되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무마한 사람은 버젓이 중요한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밝혀지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은 잘못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떼는 것이 낫다는 그른(?) 생각을 갖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드러난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시비를 걸다가 흐지부지되면 또 그대로 자리 지킴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인 것이 문제입니다.                                                 

일제치하에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자의반 타의반 신사참배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심한 체벌(體罰)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들 중에 고문을 받다가 또는 옥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해방이 되어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회자들이 출옥(出獄)할 때 그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암담한 현실을 겪어야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는 대신에 종교계의 기득권 세력이 되어서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들을 다시 한번 광야로 내어 몰았습니다.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선하고 거룩한 얼굴로 신도들을 향하여 우상에게 절하는 죄를 절대로(?) 범하지 말라고 외쳐댑니다.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하면 되지 사람들에게는 안 하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지만, 목회자의 신사참배는 본인만의 잘못이 아니라 신도들을 오도(誤導)한 것이기에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용서를 구해야 할 사안이었습니다. 과거에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최근까지 들리고 있지만, 자신의 과거잘못을 청산하기 위하여 글이나 말로 적절한 회개를 한 목사님이 있다는 소문은 거의 들은 바 없습니다.
목회자를 위시한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왜 사람들 앞에 잘못을 시인하기를 꺼리는 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체면입니다. 그랬다가는,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자 할 때, 그는 사람들의 용서를 얻는 것은 고사하고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사참배를 한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닐진대, (하나님 앞에서는 회개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그냥 모른척하고 버티면 될 일인 것을 구태여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계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존경을 받는 인물들 중에서 신사참배를 하고 독재정권을 옹호한 사람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세월이 흐른 다음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과거에 대해서 적절한 변명 내지 사과를 한 사람은 거의(?) 전무합니다.

정부 지도자가 “부정-비리를 척결하라”고 강한 어조로 의지를 천명하지만 왜 부정-비리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행하고 있습니까? 지도자 자신이 과거의 돈의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친·인척들이 적지 아니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는데, 집안단속은 못하면서 “부정-비리 척결”을 외침이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부정-비리를 저지른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한 마디의 사과나 용서를 구함이 없이도 몇 십 년을 무사히 잘 지내왔습니다. 이러한 토양에서, 당장 눈앞에 이익이 있는데 부정과 비리를 안 하는 사람이 바보처럼 여겨집니다. 첫째는, 발각되지 않으면 되고, 두 번째는 들통이 난다고 하더라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되고, 세 번째는, (조사하는 검찰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정-비리에 얽히고 설켜 있기에 걸고 넘어가면 흐지부지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크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일이 터지더라도 처벌되는 사람들은 잔챙이들이지 몸통이 처벌된 사례는 거의 없었습니다.

정치, 경제와 사회, 그리고 종교 등 제반 분야에서 진정한 자성(自省)이 없이는, 부정-비리-부패의 거대한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아니하면, 친일파가 여전히 활보하고, 신사참배자가 더욱 존경받고, 부정-비리 정치인들이 한국을 다스리는 풍토는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 임금은 악의 세력인 사단이니까요(요한 14:30; 엡 2:2).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해야 할 크리스천들 역시 부정-비리-부패의 거대한 연결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교회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교회들이 진정한 복음은 전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돈 잘 벌고 출세하는 비결로서의 잘못된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 방법이 어떠하더라도, 돈 잘 벌고 세상에서 잘되었다면 믿음이 많은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로 그 방법이 어떠하든,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커다란 교회건물을 갖고 있으면 유능하고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받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아니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오히려 부정이나 부패를 방조하거나 무성하게 하는 온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는 부정을 해도, 비윤리적인 삶을 살아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무마될 수 있다는 교리는 아닙니다.                                                  

믿는 사람의 옛사람 청산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한지가 오래인데, 아직도 믿음의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옛사람이 청산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마음에 여전히 부정하고 거짓된 것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버림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위안을 받기 원하며, 이러한 것을 간직한 채 바라는 것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서 잘 사는 동안은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어려움이 닥칠 때 그의 믿음은 송두리째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성결된 삶을 살기 위하여,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그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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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리하심으로 나타나게 된 결과들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음
창세기 17장에서 보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covenant)을 맺으시되 아브라함(사람들) 편의 언약의 표시로서 그와 그의 가계에 속한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새로 사내아이가 태어나 팔일이 지나면 그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할례는 양피를 베어내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대로 하나님의 명하심에 순복하며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겠다는 약속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할례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들이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바울에 앞서(롬 2:28-29) 이미 구약시대에도 손으로 행한 외형적인 할례보다 마음으로 행한 진정한 할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또한 레 26:4; 신 10:16). 예레미야서 4장 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시고, 6장 10절에서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또한 렘 9:25-26). 예레미야서에서 할례는 교만(驕慢)을 도려내는 행위입니다. ‘마음의 교만’의 가죽을 베어내야지만 온전히 하나님께 속할 수 있으며 ‘귀의 교만’을 도려내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회개하고 그에게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44장 9절(또한 44:7)에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신약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곧 마음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이 할례가 무엇입니까?
                                                   
육적 몸을 벗음
“육적 몸을 벗음”입니다.
신약성도들에게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마음의 할례--가 필요한 것은 육적 몸을 벗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육적 몸”이라고 함은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골 3:5)이요 “옛 사람의 모습”(골 3:9)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기 전에는 여느 세상사람들처럼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골 3:5)이 가득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에 속하여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전에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였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옛 사람의 옷--곧 육적 옷을 벗어버리는 그 일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가능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곧 마음의 할례를 받음은 “심령으로 새롭게 됨”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
이는 곧 “그리스도의 할례”(περιτομή τού Χριστού)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베푸시는 할례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그 효력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성도의 교만한 마음을 도려내고 그의 죄와 허물의 부담을 벗기시고 새로워지는 심령을 허락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육적인 몸”-“옛 사람의 옷”은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의 옷”-“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의 마음 안에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은 죽고 새로워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이요 거듭난 삶(重生)입니다.

    12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됨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성령의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 우리의 죄된 육신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게 합니다.
크리스천에게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도는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 2-4절에서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장사되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음
바울은 로마서 6장 10-11절에서 “그(=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할례”--곧 성령의 세례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장사됨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일으키심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기 위함입니다.
                                                   

    13절: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골로새 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로서 죄와 허물과 육체의 할례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아니었던 까닭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11-12절에서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온 세상사람들을 사랑하시매(요한 3:16), 예정하신 경륜의 때가 이르매(엡 1:9)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그를 바라보는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심
(이방) 사람들을 살리시되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며 묻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때, 사람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살리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우리로 저(=그리스도)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은 죄와 허물에 대한 부담감을 여전히 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에서 자유로운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것입니다.

    14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삭제-못 박으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 조항의 모든 부담과 저주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에 율법의 저주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시사항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사항들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부담이 되고 이로 인하여 죄책감 가운데 불안하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삽니다.

할례가 원래는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 헌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할례의 표를 지닌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자발적이며 기쁨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부담이요 저주 아래 놓이게 하였습니다. 율법이 각 사람에게 죄를 생각나고 깨닫게 할 뿐 아니라(롬 3:20)그 중량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해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여주실 뿐 아니라 우리로 율법의 세부조항들을 따라 행하지 못하는 부담에서도 벗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이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서 그 자체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또한 갈 4:4-5 참고).                                                 

    15절: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의 승리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심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죽음의 권세 가운데 매인 바 되지 아니하고 승리하셨음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ἀπεκδυσάμενος τὰς ἀρχὰς καί τὰς ἐξουσίας”라고 함은 악의 천사들의 세력 가운데 묶인 바 되지 않고 그들의 세력을 격퇴시킴입니다.
공동번역은 15절을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를 밝히 드러 내심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정사들(powers, rulers)과 권세들(authorities)을 제압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정체가 밝히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정사와 권세들--공중권세를 잡은 악의 천사들 혹은 사단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모습들을 감추고 광명의 천사들을 가장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15절에서 바울은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악의 천사들이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he made a public spectacle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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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과거는 청산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 죄와 허물의 청산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여도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직 죄와 허물의 자백이 없었던 사람은 이 시간을 통하여서 죄사함의 확신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할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새사람의 옷, 곧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여주셨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의에 대하여 살리시고 이제 우리를 얽매고 있던 이 세상 임금의 세력 뿐 아니라 의문에 쓴 증서로부터 온전히 자유케 하십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를 이기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만 바라보심으로 여러분의 신앙의 삶에서 진정한 승리와 기쁨을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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