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5-11)
1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신문에서 가끔 일생동안 모은 재산을 교육기관이나 기타 구제기관에 쾌척(快擲)하시는 할머니들의 기사를 보면 그분들이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떠나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그분들이 여유 있는 삶을 산 분들이 아니라 평생 삯바느질로 돈을 모은 사람이며, 또 어떤 분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기도 하고 또 남의 식당에서 일하다가 식당을 경영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재산을 물려줄 자손이 없어서 공공기관에 환원하는 분도 있지만, 자식에게는 최소한의 재산을 물려주고 나머지를 다 사회에 환원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재물을 움켜쥐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에 이런 분들의 기사가 더욱 훈훈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채근담(菜根譚)에 있는 말입니다:
“나무는 뿌리로 돌아감에 이르러서야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한 것이 보람 없는 영화였음을 알고,
사람은 관 뚜껑을 덮기에 이르러서야 자녀와 옥(玉)과 비단(緋緞) 따위의 재물이 무익했음을 안다.”
나무가 무성한 한 때를 보내지만 죽을 때가 되면 일시적으로 꽃 피고 무성함이 헛된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년-만년 살 것 같이 남을 속여가면서 악착스럽게 재물을 모은들 다 헛된 일일뿐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沈淪)과 멸망(滅亡)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으로 향한 지나친 욕심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로써 시험과 올무에 걸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유한 삶을 산 사람이라도, 아무리 권세가 많은 삶을 산 사람이라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그의 재물과 권세와 이로 향한 욕심을 다 두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소망이 있는 것은 이 세상 다음에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영원하고 복된 삶이 있을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옷의 비유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까지 달라지기도 합니다. 거지라는 (신분의) 옷을 입은 사람은 그 안에 아무리 훌륭한 생각과 인격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주위사람들이 그를 거지취급하며 그도 결국에 거지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왕의 (신분의) 옷을 입은 사람은 그 속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자질 역시 열등하다고 하더라도 주위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여기고 받들기에 왕 노릇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옷,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 세상임금인 사단에 속한 사람의 옷,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간다면 주위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여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사람은 교회는 다니지만 자신을 믿는 사람으로 여기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 셔츠(Clergy Shirts) 입기를 즐겨합니다. 입기가 간편한 까닭도 있지만, 젊지 않은 나이(37세)에 신학교를 가고 40세에 목사로 안수 받았기에 제가 목사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도 각인시키기 위하여 목회자 셔츠를 즐겨 입기로 작정했습니다. 목회자 셔츠를 입고 있기에 저를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도 목회자로서 합당한 행동을 하고자 합니다. 그와 아울러 제가 목사임을 밝히기를 즐겨합니다. 그렇게 밝힘으로 목회자의 품위를 잃지 않는 행동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생각해보면, 목회자라고 밝히지 않아도 좋은 사람 앞에서도 “나는 목사입니다”라고 밝히는 제 자신을 발견하면서 후에 혼자 쓴웃음을 웃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잡상인이 찾아와서 물건을 사라고 하는데, 그 잡상인에게도 “내가 목사”라고 밝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는 늦게 입은 목회자라는 직분의 옷에 감사하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이 한 분 있습니다. 최상의 교육과 학위를 받으시고 핵 공학 계통의 연구소에 근무하시고 또한 14년 동안 장로생활을 하시면서 교회를 위하는 일이라면 항상 뜨거운 가슴으로 자신의 최선을 드리려고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현재 나이가 오십대 후반인데, 그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겠다고 보스턴(Boston)에 있는 한 신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장로로 14년을 시무하여온 교회의 ‘장로 전도사’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결정이 ‘잘된 것이라’ ‘잘못된 것이라’를 떠나서 그런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저는 몸이 감전되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남은 일생동안, 전적으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옷을 입고자 하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앞으로 목사가 될 때 목회를 잘할 것인가 잘 못할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제게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저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목회하고자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저의 목회가 못마땅하게도 받아짐을 압니다. 그러나, 제게 중요한 것은 저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2
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바울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Put to death therefore what is earthly in you)”고 권고합니다. 우리 겉사람의 생각이나 행동들 중에 땅에 속한 것들--즉,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로는 음란(fornication), 부정(impurity), 사욕(passion), 악한 정욕(evil desire)과 탐심(covetousness)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행동으로 짓는 성적인 잘못들과 지나친 욕심의 마음과 행동들을 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결하심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covetousness is idolatry)”고 한 것은 지나치게 땅에 속한 것을 탐하는 마음이 하나님보다 땅에 속한 것을 그 앞에 두게 한다는 것입니다.
6절: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하는 것들
“땅에 속한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땅에 있는 지체를 따르는 삶’을 여전히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시고 꾸짖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징계인데 이렇게 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6절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고, 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고 했고,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이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징계를 주실 때 깨닫지 못하고 땅에 속한 것들을 여전히 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나갑니다. 로마서 1장 24절 이하에서 보는 바대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愚蠢)하게 되어 자기의 정욕과 탐심대로 생각하며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내어 버려 두신다”고 했습니다(롬 1:24, 26, 28). 그러나 아주 내어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임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를 쌓아간다(롬 2:5)고 말씀합니다.
5절에 열거된 것들을 계속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이들은 “불순종의 자식들”(the sons of disobedience, 어떤 다른 사본들에는 이 말이 추가되어 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불순종의 자식들”--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임--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7절: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골로새 성도들의 과거의 삶
골로새 성도들 그리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과거의 삶이 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 전에는 우리의 모든 가치판단이 세상에 속하던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3절에서 바울은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세상 권세 잡은 자(=사단)의 뜻을 따라 육체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는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의 대상이었습니다.
8절: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이제 벗어 버려야 할 것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 전에 갖고 있던 우리의 삶의 모습을 이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다음에는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란 5절에 열거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과 함께 8절에 열거된 것들 곧 분(ὀργή, θυμός)과 악의(κακία)와 훼방(βλασφημία)과 입술의 부끄러운 말(αἰσχρολοία ἐκ τού στόματος ὑμών)입니다.
한글성경은 분(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원문에는 “노함”(또는 노, ὀργή: wrath)과 분냄(또는 분, θυμός: anger)의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함(외적으로 표현된 화)과 분냄(마음 속에 간직된 화)은 일시적이거나 지속적인 노여움의 감정과 그 표현으로 세상의 욕심과 정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악의(malice)는 다른 사람을 헤치거나 그에게 불이익을 주고자 하는 마음의 뜻입니다.
훼방(slander)이란 노여움의 표현으로 다른 사람을 중상하거나 비방하는 말과 행동입니다.
부끄러운 말(foul talk from your mouth)은 음란의 말이나 남을 해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을 알기 전에 자연인으로서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제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32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납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사단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들을 벗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Now put them all away)”고 권고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을 때(엡 2:12)는 우리가 이와 같은 정욕과 탐심, 분노와 악의, 훼방과 부끄러운 말의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갔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속하고 하나님이 있는 자가 된 이제는 이 모든 이전의 옛 사람의 옷은 과감하게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9절: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
바울은 8절에 이어서 벗어버려야 할 것 한 가지를 더 열거하는데, “서로 거짓말을 말라”고 합니다. 이 거짓말하는 것도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못하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거짓말을 멀리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들 가운데 크리스천의 숫자가 꽤 되는데, 내일이면 밝혀질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그가 정치인(물론 다른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해당하지만)이라도 삼가야 할 일입니다.
8절에 이어서 “벗어 버리라”(put off)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라고 함으로써 옛 사람의 마음의 모습 뿐 아니라 그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까지 온전히 다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삶의 전부가 그래 왔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벗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면’(롬 8:9) 이것이 가능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는데 옛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즐기고 있는 것은 아직 그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계시긴 한데, 우리 마음 중심을 그 분께 내어드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10절: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새 사람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입술로 고백하고 그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이제 새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 사람입니다. 이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입니다(엡 4:31).
이 새 사람은 다름아니라 잃어버렸던 창조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받은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 보는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타락하기 전에 첫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 뱀의 간계로 인하여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우리로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새 사람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사람의 모양으로 살되 그들보다 더욱 커다란 욕심을 갖고 살아도 괜찮다’, ‘그 욕심을 이루는데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까닭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사람의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사람의 삶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의 세상축복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세상의 일이 순조롭습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 안에서 소망하고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은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지 결코 우리 신앙의 첫 번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전에는 사단의 간계로 창조자 되시고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따라서 잘 믿지 못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고 새 사람의 옷을 입혀주시니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고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골 1:10 참조).
11절: 거기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안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국가나 종족이나 교육이나 신분에 차별이 없음
“거기는”이라고 함은 “새 사람의 삶에는”(in this new life, Living Bible)이란 뜻입니다. 새 사람의 삶을 사는 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 할례인(=이스라엘인)이나 무할례인(비이스라엘인)이, 야인(barbarian)이나 스구디아인(Scythian)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기(Christ is all, and in all)"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계시며(골 1:15),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고(골 1:16),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고(골 1:17), 그가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28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국가나, 종족이나, 교육이나, 신분이나, 성에 차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곧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엡 2:14-15 참조).
3
성도의 결단
우리 믿는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믿지 않는 사람의 세상과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과 한 사회,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삶을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 구분된 삶을 살 것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동화되지 말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의 옷을 입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아직도 음란과 부정,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분냄과 악의, 훼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이 있습니까?
이러한 옛 사람의 모습과 행위는 과감하게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하며, 그리스도의 영을 안에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나타내는 새 사람의 삶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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