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케 하신 그리스도” (골로새서 1:21-23)
1
부정과 비리로 인도하는 문(Gate)과 생명과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문(Gate)
부전적인 의미의 게이트의 원조는 워터게이트(Watergate)인데, 지난 1974년 워싱톤 포스트(Washington Post)의 두 젊은 기자가 폭로한 사건이후 일반화되었습니다. 워싱턴(Washington DC)의 워터게이트(Watergate)에 있던 민주당 대통령후보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한 이 사건으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년)은 세계 최고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화이트워터(White Water) 부동산개발 사기사건에 클린턴(Bill Clinton)과 백악관이 관여했느냐를 조사한 화이트게이트(White Gate)와 르윈스키(Monica Lewinsky)와 성추문을 일으킨 지퍼 게이트(Zipper Gate)로 탄핵청문회에 나가 증언을 해야만 하는 곤혹을 치렀습니다.
게이트(Gate)의 사전적 의미는 ‘문’이나 ‘통로’란 뜻인데 이것이 요즘 정계에서는 ‘권력형 비리(非理)’란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리와 탐욕으로 나 있는 한 사람의 문을 들어섰는가 했더니, 또 다른 문이 그 앞에 전개되고, 그 문 속에 또 다른 문이 나 있어 온통 미로처럼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육체의 문은 부정과 비리와 사기와 온갖 협잡으로 인도하는 데, 생명과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가자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좁은 문’은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문입니다. 우리의 문과 길 되신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실 뿐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게 하십니다.
2
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0절(20절은 18-19절과 함께 해석될 수도 있고 21-23절과 함께 해석될 수도 있음)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는 만물과 하나님과의 화목(cosmic reconciliation with God)을 증거한 바울은 21-22절에서는 그 만물 중에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인 사람과 하나님과의 화목(human reconciliation with God)에 초점(焦點)을 맞춥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됨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 골로새 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특히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를 에베소서 1장 12절에서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진 사람에게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죄인 까닭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사단의 부추김으로 자라난 교만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8-23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 속에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愚蠢)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람이 하나님 대신에 그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사람이요, 금수요, 버러지요, 무생물 형상의 우상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서, 또한 외관상 하나님의 택함을 얻지 못하여 이스라엘 밖에 있는 까닭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화목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계획이 마련되고 경륜의 때가 차매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 편에서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여서 손을 내밀매 하나님께서 이를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관계이지만(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함), 하나님의 경륜(=구원[계획])의 때가 차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사람들과의 화목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에 하나님과 원수 된 이방인인(물론 유대인들도 포함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과 화목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경륜(=구원[계획])의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택하지 아니하셔서 하나님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 바울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말씀합니다.
22절: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이제는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
헬라어 성경구절, “ἐν τῷ σώματι τής σαρκὸς αὐτού διὰ θανάτου”를 개역 한글성경은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하고, 영어성경은 “in his body of flesh by his death"(RSV) 또는 ”in the body of his flesh through death"(KJV)--”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육체의 몸 안에서“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영어성경의 번역(RSV와 KJV)이 보다 더 원문 뜻에 가깝습니다. 한글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이 육체로 죽으신 것임을 강조하고, 영어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이 그리스도의 육체의 몸 안에서 되어짐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고 바라보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육체의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람과 하나님의 화평을 이루게 하시기를 원하셨지만, 그에 앞서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하나님의 자녀들의 화평의 장소로 삼으십니다. 교회 안에 속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서로 연합되고 화평을 이룰 때,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가로와 세로의 통나무로 된 것은, 가로의 통나무는 사람들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하심이요 세로의 통나무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화목을 이루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화목이 따로따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온전한 화목제사를 드리셔서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는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형제와 화목을 이루지 못하므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듯이, 눈에 보이는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전제조건이며 이것이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심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로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거룩하고(holy) 흠 없고(blameless) 책망할 것이 없는(irreproachable)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도 그러한 모습이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물은 거룩하게 구분되고, 흠과 티가 없는 성결된 것이어야 했습니다. 약하고 죄와 허물이 많은 인생은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막힌 담을 허시고 화목을 이루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일컬음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되어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며, 거룩하고 성결되게 하신, 육체의 문(Gate)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는 담대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그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23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고,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음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심을 얻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에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 자체가 한 번 고백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은 한 번 고백한 다음에는 이에서 떠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고백한 순간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여 그분께 순종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생각나게 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즐거워하게 합니다.
둘째는 터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 터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의 반석이요 교회의 참된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에게 시련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의 삶이 순탄하지 않든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게 된다든지, 전심으로 기도해온 것이 ‘나의 원함대로’ 응답되어지지 않을 때 등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믿음의 근원이요 터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 위에 든든히 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눈과 마음으로는 어렵게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하며 우리로 복음의 소망 안에서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복음의 일꾼 된 바울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사랑과 축복의 복된 소식임을 명백히 합니다.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은 그 복음의 주체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되,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그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또한 이 복음을 주위에 전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함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복음의 일꾼 됨을 자랑하는 바울의 자랑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성도의 결단
사람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십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심으로 이웃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믿으십니까?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평안이 넘쳐 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되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 받으심을 믿으십니까? ‘어떻게 나같이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십니까? 우리의 육체의 모양을 바라볼 때 이러한 생각이 듦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성결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봄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모양으로 세우심을 얻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 같습니다.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에는 어렵고 불가능하기까지 보이는 이 일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실 때 능히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 바울이 말씀하는 믿음입니다.
이를 믿고 여러분의 삶 가운데 담대함으로 증거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