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골로새서 서문” (골로새서 1:1-2)

                                                          “골로새서 서문” (골로새서 1:1-2)
       
                                                                             1
오합지졸 이스라엘의 승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팀’의 흥함과 쇠함도 이러한 세상의 이치가 적용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분명히 오합지졸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합지졸이었기에 오히려 더 잘 뭉칠 수가 있었고, 각자의 힘을 의지하기보다는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자 하였습니다. ‘고라’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을 때에는 그가 사사건건 모세와 아론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었는데, 하나님이 그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죽이실 때(민 16장) 오히려 단결이 잘되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그들이 광야를 행진하면서 만나는 이방나라의 군대들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팀웍(Team-Work)으로 승리하는 교회
교회의 성장과 쇠함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과 잘남을 드러낼 때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잠잠하실 따름입니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 계신 성령은 그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그를 도우실 보혜사(Helper)가 되십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오래 거하는 사람이나 잠시 머무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소속감을 갖고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오합지졸임을 자처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때,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나고 성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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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골로새 교회
골로새 교회는, 고린도 교회나 빌립보 교회, 갈라디아 교회와는 달리, 바울이 개척하고 사역한 교회는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의 상태에 있을 때 그를 방문한 골로새 교회 소속의 에바브라(골 4:12) 편에 그 교회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들에 관하여 조언하고 권고하므로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기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보낸 편지 형식의 글들은 해당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돌아가면서 읽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근지역의 교회들의 성도들에게도 읽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골로새서도 골로새 교인들뿐 아니라 인근의 라오디게아 지방의 성도들도 읽게 하라(골 4:16)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위시한 성경의 모든 글들은 2,000년 전 혹은 그 이전 어느 특정지역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만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유익하며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계획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사정이나 형편 가운데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하던 바울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고 핍박당하고 갇힘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바울 자신인들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를 사로잡으시매 그가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셔서 바울을 만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변화시키신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교회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놀랍고 신비적인 경험이 없다고 할지라도 각 사람이 하나님을 찾음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하나님에 관하여 한번 알아보기 위하여 교회를 찾은 것 같지만, 교회를 찾는 그 발길은 하나님이 주장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뜻과 예정 가운데 들어있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나님을 찾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역사와 계획 가운데 되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그의 거의 대부분의 서신에서 변론하였는데, 이는 첫 번째는 그의 사도권을 인정치 않는 반대자가 많았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으로 된 사도임을 언급함으로 그가 본 서신에서 권고하는 말씀이 개인의 사사로운 조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자 했습니다.
바울 당시의 ‘사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이었지만, 사도의 본래의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의미적인)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신 것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위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고 했는데, 우리는 충성스럽게 우리에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2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1세기의 이방 교회들은 회중(congregation)의 규모가 작았습니다. 교회 건물은 3세기나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초대 교회는 따로 건물을 짓지 않고 그 지방의 유력한 사람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 가정 교회(house church)의 형태였습니다(롬 16:5; 고전 16:19; 몬 1:2; 골 4:15). 바울은 지역 교회에 편지하는 그의 서신들에서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성도들”(ἁγίο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롬 1:7; 빌 1:1; 엡 1:1; 골 1:2), 이는 “유형 건물”보다는 “성도의 모임 또는 연합”이 더욱 더 중요한 교회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성도들의 모임인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백성(“영적 이스라엘”)이요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7절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장 2절과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는 교회와 성도란 단어를 동격으로 사용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절에서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잘에게”라고 했고, 빌립보서 1장 1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라고 했습니다. 곧, 유형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임으로 모인 사람들의 연합--성도들 그 자체가 교회입니다.
성도란 말은 성경에서 단수로 사용된 예가 없습니다. 항상 복수 ‘하기오이(ἁγίοι)’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누구도 혼자서는 교회를 구성할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faithful)--믿음이 한결같고 많은 사람들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졌다고 해서 쉽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와도 같이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견디어내고 믿음의 승리를 얻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바울서신들의 서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안인사의 정형으로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또한 벧전 1:2; 벧후 1:2; 요2 1:3 참고).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는 ‘은혜’와 ‘평강’ 사이에 ‘긍휼’이 더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도 예외 없이 “은혜와 평강”의 순이지 “평강과 은혜”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 다음에 평강이지, 은혜가 없는 평강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은혜(카리스: χάρις)는 ‘우리가 행위로는 의롭지 않은 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기를 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요,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느끼는(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강(εἰρήνη; 히브리어로는 샬롬[םולשׁ])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값없는 선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화목케) 되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혜를 받았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5장 2절에서는 이 말씀을 바꾸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에 들어간 사람”(=은혜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함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강’입니다.

일등 칸에 탄 평안이 있는 크리스천
부흥사 무디(D. L. Moody, 1837-1899)는 크리스천을 세 등급의 칸을 달고 가는 기차에 탄 승객에 비유했습니다.
첫째는, 삼등 칸에 타고 가는 사람입니다. 천국 가는 기차를 타고 가기는 하지만 아직도 세상의 염려와 근심의 보따리를 꼭 껴안고 가고 있습니다.
둘째는, 이등 칸에 타고 가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려고 하는데 아직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은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령에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노력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일등 칸에 타고 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되 자기의 노력이나 생각에 의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그로 인하여 온전한 평안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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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웍으로 협력하는 성도들과 은혜와 평안이 있는 교회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자매들이라고 일컫기에 합당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로 협력할 때 성장합니다.
바울이 왜 교회를 “성도들”이라고 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의 지체로서 맡은 바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할 때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주님의 은총가운데 발전하고 성장해갑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순종의 마음과 충성의 열정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의 참 평안이 넘치는 일 등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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