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금욕주의는 유익한가?” (골로새서 2:20-23)

                                           “금욕주의는 유익한가?” (골로새서 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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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독에 물을 채워라”
오래 전에 아는 전도사님의 추천으로 ‘달마야 놀자’라는 한국 영화의 비디오를 빌려서 본 적이 있습니다. 조폭 간의 싸움에 패한 다섯 명의 폭력배들이 경찰들의 눈을 피해 산사로 들이닥치면서 그곳에서 스님들과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머물기를 강청하는 폭력배들의 거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로써 주지스님은 그들에게 일주일 머물 것을 허락하는데,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도 폭력배들은 떠날 생각을 안하고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발생하지만) 더 머물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라댑니다. 해서, 그들을 못마땅히 여기는 스님들과 조폭 간에 내기를 벌이는데, 부처님께 3천 배 올리기, 고스톱, 물 속에서 오래 견디기, 3-6-9 게임을 한 결과 승부는 2대 2로 조폭과 스님들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서로 떠나라 못 떠나겠다 티격태격할 때, 주지스님이 승부를 가름하는 문제를 냅니다. 깨진 독 두 개를 사찰 마당에 준비시키고,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고 지시합니다. 신발 짝으로 깨진 부분을 막으려고 해보기도 하고, 사람의 배 위에 독을 뒤집어놓고 물을 채우려고 시도도 했지만 이 방법 저 방법이 다 여의치 않고 제한된 시간은 다 되어갑니다. 이때 갑자기 폭력배들의 우두머리(박신양 분)가 독을 들고 따라오라고 지시하고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물이 제법 고여있는 개울가이고, 그는 부하들에게 그곳에 독을 던지라고 소리칩니다. 그런 후에, 물로 뛰어들어서 독을 물 속으로 누르니 깨진 독에 물이 채워지고 또 넘쳐납니다. 주지스님(김인문 분)은 이를 보며 “물이 철철 넘치는구나”라고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선문(禪問)과도 같은 질문에 대한 모범 답이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에 그 우두머리가 주지스님에게 ‘왜 우리를 감싸주느냐?’ ‘스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착한 일을 하라든지 남을 괴롭히지 말라든지 바라시는 것이 있지 않느냐?’라고 묻습니다. 이때 주지스님은 “그럼 너는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부을 때 어떤 생각으로 그것을 채웠어?”라고 질문하고, 우두머리는 “전 그냥 항아리를 물 속에 던졌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주지스님은 “나도 밑 빠진 너희를 그냥 내 마음 속에 던졌을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달마대사를 그 태두(泰斗)로 하는 선불교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지스님의 대답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모든 인생들에게 주시는 대답이기도 합니다. 우리 ‘밑 빠진 독’과 같이 부족한 인생은 우리의 능력과 수고로는 물과 같은 성령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울 수가 없습니다. 채운 것 같으면 어느새 우리의 내면 적인 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갈급하여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그냥’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던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풍덩 뛰어들 때 우리는 비로소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과 금욕적인 삶도 우리의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못하며, 우리는 여전히 곤고하며 매 마른 심령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발견할 뿐이다.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에게 성령의 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에 머물라”
물고기가 물 밖에 있으면 아무리 펄떡거리더라도 그의 모습은 자연스럽지 못하며 물고기다움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를 물 속으로 놓아줄 때 그 물고기의 작은 동작도 물고기의 격에 맞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수영솜씨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애쓰지도 않는데 물고기는 물 속에 있음으로 해서 물고기다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꼬리지느러미를 한 번 탁 치면 빠른 속도로 물 속을 헤치고 나갑니다.

믿는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자기 의지로써 경건하여지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발버둥치거나 금욕의 삶을 살더라도 그는 자연스럽지 못하며, 물 밖의 물고기가 죽어가듯이 그렇게 할딱거리며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의 그런 애씀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 K 집사가 나 없이 경건하게 살려고 참 많은 노력을 하는구나. 그 정성이 참으로 가상하니 축복해줘야겠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밖에 있을 때는 부단한 노력과 수고가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기에 다 헛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강 안으로 뛰어드니, 나의 작은 몸놀림 하나 하나가 자연스럽고 부드러움으로 하나님께 비춰집니다. 믿는 사람의 크리스천다움은 하나님 밖에서 억지로 힘들게 하는 몸놀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는 그 삶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물이 필요합니다.

물 밖에 있던 물고기가 물 속으로 놓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하나님 밖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 안으로 놓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은혜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하고 이를 위해서 기도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마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바다 속에 살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작은 몸놀림 하나 하나, 생각 하나 하나를 크리스천답게 하고 하나님께 기쁘게 여겨지게 만듭니다.

금욕주의와 하나님
주전 300년부터 유행하던 스토아 철학(Stoicism)에 속한 사람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극단적인 금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금욕은 하나님 밖에서 그들 철학의 선을 이루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믿음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2세기 영지주의자들 중에 일부(Saturninus가 대표적)와 마르시온주의자들(Marcionites)도 금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을 자처하던 이단이었는데, 그들이 금욕의 삶을 산 것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아버지, 절대적인 신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신, 데미우르고스(Demiurgos)와는 다른 신이라는 그들의 신학에 근거한 것입니다. 데미우르고스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자식을 갖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참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영원히 분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만든 신이 데미우르고스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논리 속에 있는 절대적인 신에게 귀의하기 위하여 데미우르고스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데미우르고스가 축복하는 결혼, 자녀증식과 고기 먹는 것을 금하고 철저한 금욕의 삶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조자를 대처한 그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신은 다만 허상(虛像)일 뿐 그들에게 축복을 주는 신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스스로 칭하였지만, 창조주 하나님 밖에 머물고자 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체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르시온(Marcion)의 금욕을 요구하는 삶이 사람들에게 더 종교적이요 경건하게 보였는지, 마르시온의 교회와 교인수가 2세기 한때는 정통교회의 교세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중세 수도원 생활을 하는 신부들과 수녀들이 금욕적인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삶을 산다고 말하였지만, 그 안에 적지 않은 불륜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던 대신에 카톨릭의 계율 안에서 부자연한 종교행위를 한 까닭입니다.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금욕적인 삶이 좋게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경건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규율이나 율법이나 자신의 신학에 속박되는 금욕은 부자연스러우며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금욕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 행해지는 금욕은 신앙의 성장과는 무관한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행하는 금욕은 그의 경건에는 전혀 무익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사람이 음행의 잘못을 범하기 쉬우므로 그러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11-12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을 지킬 만할 때에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마음 속에 정욕의 마음이 불같이 일어날 때 이를 참는 것은 결혼함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7장 1-2절에서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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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절: 너희가 세상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초등 학문에서 죽음
여기서 “세상 초등 학문”(골 2:8; 갈 4:2)이란 사람의 학문과 사상, 신앙을 형성하는데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한시적이고 한정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여러 가지 교육을 시킵니다. 그런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은 그 기초 교육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진보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자녀에게 초등 학문의 교육은 필요한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지만 학생들이 배운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배운 것조차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할 때 그들에게서는 학문에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초 학문에 매어 있음이 학자의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지만, 학자로서의 응용력은 그러나 학문의 기초를 배우지 않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철학도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반 사상과 신앙체계를 가르치는 것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기초 철학의 틀에 묵고자 함이 아니라 이를 발판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고 하나님을 더욱 체계적으로 잘 전달케 하기 위함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기초를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은 성경의 기초에 매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로써 광대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삶에 기초돌을 쌓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하는 것도 억지로 그런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으매 또한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알매 자연스럽고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함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세상의 기초적인 철학, 율법, 기타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얽매는 것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 율법조차도 우리를 그 아래 둘 수 없습니다.

철학의 요구에 따른, 율법의 요구에 따른, 교회법의 요구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자가 아니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기쁨과 평안도 없습니다.

“의문(儀文)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치 물 밖에서 헤엄치고자 펄떡이는 물고기와도 같이 많은 노력과 수고는 하지만 여전히 부자연스럽고 물 밖에 있음으로 해서 조만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초등 학문, 의문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이는 순종을 강요당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본 사람의 자발적 순종입니다.

    21-22절: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붙잡지도, 맛보지도, 만지지도 말라
무엇을 붙잡지 말고, 무엇을 맛보지 말고, 무엇을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지 않지만 금욕주의적인 삶의 일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결혼과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규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독신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결혼을 해도 좋은가 하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독신의 삶이든 결혼의 삶이든 이는 다만 환경일 뿐이며 그 외형 자체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중심입니다. 그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으면 그의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삶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마시지 말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거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보다는 우리 마음에 성령이 계신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독신과 금욕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를 자랑하거나 이로써 그가 하나님 나라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미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금욕적인 삶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 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음
외형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으로는 이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주의 선생들이 율법의 요구에 따라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라고 하고, 또는 영지주의자들이 금욕주의적인 삶이 엘리트 크리스천의 신앙이라고 선동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강력한 어조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외형적인 절제와 극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외형적인 삶의 성숙한 모습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경건과 금욕의 모양이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외적 경건의 삶이 나타나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29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으로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함은 입으로 하나님께 가까이함과 입술로 하나님을 존경함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으면서 입과 입술만의 봉사와 예배를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주보나 설교를 통하여서 예배시간 전에 나오셔서 기도하심으로 준비되고 성결된 예배를 드리시라고 광고합니다. 또 타지방을 여행하시더라도 주일을 꼭 지키시라고 말씀드립니다. 크리스천의 삶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신앙생활의 기초를 교육시키고자 함이지만 이러한 교육적 차원의 광고가 여러분을 얽맬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초등 학문에 속하는 사항이며 사람의 명과 가르침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기를 사모한다면, 이러한 주보의 광고나 설교를 듣지 않고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자원함으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23절: 이러한 것들은 자의적 숭배나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 무익한 것들
겸손을 가장한 자의적(恣意的) 천사숭배(골 2:18)나 오늘 본문의 금욕주의는 그 명분은 그럴 듯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 같으나 기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더욱 경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순리와 지시하심에 반하는 삶일 때가 더욱 많습니다. 예외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돕는 배필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순리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3-5절에서 바울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여짐은 외형적 독신이나 금욕적인 식사생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되어진다고 했습니다.

외형적인 금욕주의와 육체를 좇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무엇이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금욕적인 삶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거룩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과 같은, 또 때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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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08장: “은혜의 바다로 가라”
찬송가 408장 작시자 심슨(A. B. Simpson, 1843-1919)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바다로 배를 맘껏 지어가라고 권면합니다:                                                   

        1.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 보라.
        3.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졸여서 못 가네.
        (후렴)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고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모래사장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깊은 바다로 가지 못하는 이유는 얕은 물가의 찰싹거리는 파도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지나쳐 가는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그것을 넘어가면 무슨 일이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나치는 것이 우리의 결단이요 봉사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의 깊은 은혜를 맛보게 되며 맘껏 하나님께로 향한 뱃길로 배를 저어갈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결단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정한 방법과 생각대로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좋다고 생각하니 하나님도 좋아하시겠지’라고 여깁니다.
초대교회로 시작하여 오랜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종종 등장한 것이 금욕적인 삶입니다. 이것은 자기 희생이 큰 것 같습니다. 속으로는 정욕이 불일 듯 일어나고 탐욕의 마음으로 가득하더라도 우도 신앙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경건하고 거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밑 빠진 독과 같습니다. “금욕(禁慾)의 돌”로는 밑 빠진 독을 매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어떤 (금욕적인) 노력과 수고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안에 채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와 수고와 노력이라는 금욕적인 삶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던져야 할 것입니다. 던지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할 때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사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할 때,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 부족한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게 됩니다. 성령의 물로서 충만하게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요, 그리스도의 전적인 도우심입니다. 기도하는 여러분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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