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새 사람의 옷과 띠” (골로새서 3:12-14)

                                       “새 사람의 옷과 띠” (골로새서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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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점정(畵龍點睛)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남조(南朝)인 양(梁) 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료로서도 상당한 지위에 올랐지만,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신의 경지에 이른 그의 그림솜씨였다고 합니다. 장승요(張僧繇)는 온갖 것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렸다는 중국의 전설적인 화가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금릉(金陵: 남경)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龍)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는 사방의 벽면에 용 한 쌍을 그렸습니다. 뭉개 치는 먹구름을 박차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은 그 비늘 하나에도, 날카롭게 펼친 발톱에도 강한 생명력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용의 벽화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상한 것은 용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날이면 용이 벽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기 때문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고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고 졸라댑니다. 장승요(張僧繇)는 마침내 눈동자를 그리려고 먹물이 흥건한 붓을 한 마리의 용의 눈에 내려놓았습니다. 순간 벽 속에서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용이 벽을 박차고 튀어나와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벽을 보았습니다. 아직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용만이 그냥 벽에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수형기(水衡記)에서》
여기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생겨났습니다. 화룡점정이란 “용 그림에 눈동자를 찍는다”란 뜻으로서 ‘사물의 가장 핵심적인 곳’을 나타낼 때 또는 어떤 일의 가장 중요한 끝마무리를 할 때 쓰는 말입니다.
“화룡점정을 결했다”라고 하는 말은 전체적인 꼴은 갖추었지만 가장 요긴한 것을 빠뜨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새 사람이 된 사람의 옷을 이 안락사(安樂寺)의 용 그림에 비유한다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는 장승요가 눈동자를 제외하고 그린 용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은 외견상으로는 용에 틀림없지만 꿈틀거리거나 비상하지 않는 그림 속의 용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천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모든 성품들은 있는데 사랑이 그 가운데 없다면, 이는 “화룡점정이 결하여 있는 상태”입니다. 사랑이 결하여 있는 성령의 은사나 열매들, 구제, 자비와 긍휼은 자칫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용의 눈동자와도 같은 사랑을 가미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서 활동하는 온전한 새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형제와 자매, 성도들과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청년의 고민
신앙생활을 잘 하기를 원하는 어떤 청년이 목사님께 상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삶을 살아가기로 작정하였으나 그의 친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대화를 하면 계속 꼬이고 얽히고 설켜서 짜증만 늘어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이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훼방하는 사단의 간계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미움과 다툼이 사람들 마음 속에 없었는데, 타락한 이후에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이간질하며, 다투며, 때로는 죽이게까지 하였습니다.
가장 서로를 위해야 할 형제들끼리, 형제와 자매가 싸우며, 때로는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원수 맺는 일까지 자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가인으로 아벨을 죽이게 하고, 라멕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하고, 사람들의 총체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초래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과 에서가 장자권을 다투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하고, 압살롬이 아비 다윗과 다투는 인간비극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엇입니까?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종종 말하는 ‘인간성’의 상실은 사실은 신의 성품--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상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오심은 우리가 상실했던 (본래의) 인간성--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화룡점정인 “사랑”의 마음의 회복입니다. 이 사랑의 숨결, 기운을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 되게 하십니다.
미운 형제, 짜증나는 교우,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이웃을 사랑함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실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형제, 교우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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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인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으로 되어지는 일인 것 같지만 기실은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태 22:14)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만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총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단에게 속하여 하나님 밖에 있던 경박하고 천한 자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거룩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복하여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 45, 19:2, 20:26, 21:8; 벧전 1:15, 16; 또한 레 20:7, 21:6; 민 15:40 참고)고 말씀하시므로, 그의 자녀들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친히 천한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오실 뿐만 아니고,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그리스도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 마음에 늘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 각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형제들과 자매들을 더욱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새 사람의 옷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거룩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임금인 사단에게 속하였을 때 입고 있던 옛 사람의 옷은 벗어 던져야 합니다. 옛 사람의 옷 또는 성품은 5절과 8절에 열거된 대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 (5절), 분, 악의, 훼방과 부끄러운 말 (8절)입니다.
대신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옷,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하는데, 이 새 사람의 옷이란 곧, 긍휼(compassion)과 자비(kindness)와 겸손(lowliness, humility)과 온유(meekness, gentleness)와 오래 참음(patience)입니다. 이 새 사람의 옷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긍휼’(σπλάΥχνον οἰκτιρμού: compassion)은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장 77-78절에서 누가는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χρηστότης; kindness)는 친절한 행동을 의미하며 실천적인 선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be kind to one another)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 lowliness)은 낮은 곳에 처하기를 자청하는 마음으로서, 하나님 안에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강조되는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생이 이 겸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온유‘(πραῢτης; gentleness, humility, meekness)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적으로 있어야 할 겸손하고 부드러운 자세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온유할 자가 기업으로 얻을 땅은 곧 천국입니다.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 patience)이 있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중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쾌락에도 빠져보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음이 이러한 유혹을 견디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1-2절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또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서 바울은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13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의 옷
“혐의”로 번역된 헬라어 ‘몸훼-’(μομφή)는 ‘불평 또는 불평의 원인’(complaint or cause for complaint)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그 마음에 불평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이를 잘 참고(=“용납하여”: ἀνέχομαι, forbear, endure), 참을 뿐만 아니라 “용서하라”(χαρίζομαι)고 권면합니다.
“용납하다 또는 참다”는 말은 마음에 여전히 불평이 있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인데, “용서하다”는 말은 밖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긍휼히 여겨 불평의 마음을 지우고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단이 주는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좋은 감정은 쉽게 잊게 하고 나쁜 감정은 오래 오래 기억나게 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영이 주신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쉽게 잊어버리게 하고 좋은 감정은 오래오래 기억나게 하고 그로 인하여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다름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쉽게 잊어버리므로 그 사람을 용서하여야 할 것은 그리할 때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 받기를 원하는 우리가 먼저 할 일은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용서하여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허물을 우리의 기억에서 지어 낼 때 하나님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주께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지만,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그리하지 못함을 아시고 그리스도께서 먼저 용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를 죽음에 내놓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간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옷을 우리도 입어야 할 것입니다

    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의 띠를 더함
바울이 12-13절에서 열거한 새 사람의 옷--긍휼, 자비, 겸손,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또 20-21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바라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녹이며,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사랑이 결여된 채, 잠시 잠깐동안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옷을 입은 것같이 남에게 보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다만 모양일 뿐 내용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새 사람의 외형만 있을 뿐 심장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첨가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속과 겉이 온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새 사람의 옷에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위아래가 함께 붙은 통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속옷을 입고 겉옷을 입었지만 허리에 띠를 매어야만 옷이 안전하고 모양새가 납니다. 띠를 매지 않으면 속옷이 흘러내릴 수도 있고 바람이 불 때 겉옷이 겉잡을 수 없이 흩날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사랑을 옷 차림새의 마무리를 짓고 맵시를 내는 띠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의 비유를 사용하면, 마른 뼈 위에 덧입혀진 힘줄과 살과 가죽이 그 뼈들을 사람의 모양을 갖추게 한 것과 같이, 마른 뼈와 같았던 우리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옷을 입을 때 우리는 새 사람의 외모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마른 뼈가 힘줄과 살과 가죽을 덧입었지만 그 안에 생기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직 생명력을 갖춘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새 사람의 힘줄과 살과 가죽을 갖추었지만 사랑--생명의 기운, 생기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 온전한 새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역사함으로써 온전한 새 사람의 옷과 띠를 갖춘 새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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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복음성가 작사자 오티스 스킬링스(Otis Skillings)는 “사랑의 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하나되고 사랑의 띠로 묶였네.
    2.  모두 다 함께 찬양해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전하세.


 온전한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써 하게 됩니다. 새 사람인 우리는 사랑으로써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덕목들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띠는 우리의 입은 새 사람의 옷을 온전하고, 아름답고, 맵시 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또한 서로 모양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교우들을 하나되게 묶는 띠입니다. 따라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칫하면 일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고 온전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새 사람의 옷을 입되, 하나님의 성품인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의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사랑의 띠를 더하여서 온전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그러므로 우리 교회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사랑하신 성도의 연합으로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몸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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