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 (골로새서 2:8-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 (골로새서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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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哲學)’이란 용어와 그 사용
우리는 종종 철학(哲學)이란 단어를 어떤 소신(所信), 목표(目標) 또는 관(觀)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생철학이라고 하면 ‘사람이 어떤 소신이나 목표를 갖고 인생을 사는가’ 하는 것이고, 목회철학이라고 하면 ‘목회자가 어떤 소신이나 목표를 갖고 목회를 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점쟁이가 사람의 운세를 예견하는 것을 운명철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생 제반의 사건이 필연의 초인간적 위력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사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운명철학이 인생철학이나 목회철학보다 국어사전적 의미의 철학(哲學)에 더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국어사전은 철학(哲學)을 ‘인생(人生)·세계(世界)의 궁극의 근본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영어로는 필로소피(philosophy)인데, 헬라어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에서 온 것입니다. 필로소피아는 사랑(love, friendship)이란 뜻의 필로스(φίλος 또는 필레이 φίλη)와 지혜 또는 지식이란 뜻의 소피아(σοφία)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필로소피아(철학)는 ‘지혜 또는 지식을 사랑함’이란 의미입니다. 철학자(philosopher)는 필로스(φίλος 또는 필레이 φίλη)와 소포스(σοφός)의 합성어로서 ‘지혜 또는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헬라어의 필로소피아(철학) 또는 필로소포스(철학자)란 말은 주전 6세기 때의 사람 피타고라스(Pythagoras, 580?-500? BC)가 ‘나는 다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요즘 어떤 학문의 분야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 최종학위를 주는데 이를 철학박사(Ph.D.=Doctor of Philosophy)라고 합니다. '철학'(여기서 철학은 국어사전적 의미)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만 철학박사 (Ph.D.) 학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공학, 심리학, 물리학, 화학 등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철학박사(Ph.D.) 학위가 주어집니다. 신학박사의 학위의 종류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신학박사(Th.D.=Doctor of Theology)’요 다른 하나는 ‘철학박사(Ph.D.)’인데, 대부분의 경우 학문의 전문성의 면에서 Th.D.보다는 Ph.D.를 더 인정하여 줍니다. 이로 볼 때, 사람들은 어지간히 ‘철학’이란 이름을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철학박사란 ‘인생(人生)·세계(世界)의 궁극의 근본원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 분야의 학문적 지식을 사랑하여 연구하는 사람’이란 의미일 것입니다.

학문 또는 지혜를 사랑함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인생이나 세계의 궁극적 원리를 연구하는 철학을 포함하여) 학문 또는 지혜를 사랑함 자체는 악이 아닌데, 이것이 잘못되면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과 적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플라톤(Plato, 주전 427? - 347?) 이후 로마와 그리스 뿐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에 플라톤의 철학이 팽배하여 있었습니다. 바울시대에도 플라톤의 철학(Middle Platonism)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사상과 주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철학(그의 「Republic」)에서 유대인의 하나님, 세계를 창조한 신은 데미우르고스(Demiurgos)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최고의 신이 아니고 다만 열등한 신(inferior or lesser god)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데미우르고스 하나님은 플라톤의 철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회 안에서 기존의 크리스천들에 대한 반대 세력(=영지주의 또는 기타 이단)을 형성하는데 기여를 하여 유대인의 하나님인 열등신 ‘데미우르고스’ 말고 ‘아직까지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최고의 신’(Unknown Supreme God)이 있다는 주장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내의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데미우르고스가 아니라 이 ‘알려지지 않은 최고의 신’이므로 그를 섬겨야 하는데, 이를 알게 하는 것이 ‘특별한 지식(또는 지혜)’인 영지(靈知, gnosis)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은 창조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게 하고 또한 적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와와 바벨탑을 쌓던 사람의 ‘철학(=지혜 사랑)’
(플라톤의) 철학이 아니라도 인간이 ‘지혜를 사랑함’의 위태로움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괴팍하게 하고, 아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나 지식이 아닌, 하나님 밖에서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사랑할 때입니다.
성경 속에 대표적인 사례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자마자 발생합니다.
하와가 뱀의 미혹(迷惑)에 넘어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에까지 이르고자 하는 욕심(=지나친 지혜의 사랑)입니다. 창세기 3장 4-6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지나치게 지혜를 사랑함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예가 있습니다. 그들이 탑을 쌓던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다시 있을지도 모를) 홍수로 인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지혜의 높이에까지 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도전을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지혜를 사랑함은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잠언기자는 1장 7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고, 3장 13-14절에서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고 했고, 또한 9장 1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6장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사랑함이 필요하되, 우리의 지혜의 출발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어설픈 학문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를 자고하게 하여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사모함에 방해거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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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할까 주의함
‘철학(哲學)’과 ‘헛된 속임수’는 두 가지 다른 경계사항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철학이라는 헛된 속임수’(hollow and deceptive philosophy, NIV)라고 해석함이 좋을 듯합니다. 또는 ‘철학을 포함한 모든 헛된 속임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헛된 속임수’(empty deceit)는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왜곡시키는 모든 잘못된 가르침을 일컫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철학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거짓선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하나님과 적대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는데, 거짓교사들은 그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아직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지 아니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송두리째 흔들고자 합니다. 그로 인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다른 신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노략하다’(συλαγωγέω)라는 다소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철학의 헛된 속임수가 우리의 하나님으로 향한 마음을 빼앗고 하나님 밖으로 다시 이끌어내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님
사람의 유전(tradition)이나 철학 또는 기타 세상의 초등 학문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발전되어 나온 철학이나 사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좇는 일이 아니라 다만 초등학문을 좇는 것이라고 바울은 변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계시된 이후로는 그때까지 몽학선생의 역할을 해왔던 구약의 율법도 세상의 초등 학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불완전할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크리스천들에게 필요한데(골 1:9-10),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후로는 불완전한 율법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철학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적대하게 됩니다.

    9절: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심
플라톤을 비롯한 헬라 철학자들의 주장과 사상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와 참 하나님을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플레로마(충만한 하늘)에 존재하는 여러 이온들(Aeons, 신적 존재들) 중에 하나였습니다(발렌티누스 영지주의자들은 30개의 이온이 있다고 주장). 또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θεότης: Godhead, 여러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닌 참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나님의 부분이 아닌 참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몸으로(σωματικώς) 거하신다고 변론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성이 부분적으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이 전체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람들 가운데 오시고 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의 일부분을 보는 것과 같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줄 짐작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시고, 14장 11절(또한 10절 참조)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온전히 거하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온전히 거하심으로,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하나되심을 강조하십니다.
                                                   

    10절: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짐
참 하나님의 신성이 온전히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였던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신성으로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여집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로 고백하고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며, 이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충만해진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충만하심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기에 우리가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자에게는 보증으로 성령이 들어와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지고 성령으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며, 그가 천사들과 동격이 아니라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머리되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심
“정사(rule, principality)와 권세(authority)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정사와 권세"는 천사의 이름으로서 거짓교사들이 그리스도와 동등되다고 주장하던 존재들입니다. 바울서신들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존재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이는 바울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그리스도와 대등하게 여기고 숭배의 대상으로 본 까닭입니다. 숭배의 대상은 아니더라도, 하나님과 사람들의 중보의 존재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함으로 정사와 권세 등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천사들이 영적 전쟁의 대상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로마서 8장 38-39절에서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천사를 숭배의 대상 혹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로 여기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서 요한은 “내가 그(=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천사는 하늘에 있는 선한 천사라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중보가 될 수 없습니다. 천사 뿐 만 아니라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하여 기도해서도 안 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리아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 겸손이요 이 기도를 하나님께 기뻐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요, 아직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나 마리아를 통한 기도가 잘못되었듯이 신부(神父)를 통하여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바라는 고해성사(告解聖事)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인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까닭입니다. 전에는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때를 얻어서(속죄일) 일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으나,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의 찢기심과 함께 찢어짐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성도는 어느 누구나 담대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2절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고,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서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도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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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일은 세상의 철학이나 학문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밖의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이는 우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에서 자라게 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과 대적하게까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과 그의 영이신 성령의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눈에 놓여 있던 비늘이 떨어지고 우리가 밝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총명에서 자랄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이 우리의 눈을 덮는 수건이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에서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놀라운 축복을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이시며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 위에 머리되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 안에 영으로 역사하심을 믿고 고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충만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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