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3, 2013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1-5)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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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Kyoto)에서 제일 높은 빌딩(100m) 신사옥을 갖고 있는 일본전산의 나가모리 시게노부 사장은 일본의 장기불황 속에서도 ‘돈을 버는’ 대표적인 경영자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컴퓨터용 초소형 정밀모터 제조업체인 일본전산은 ‘10년 불황’을 겪으면서도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몇 배로 늘렸다고 합니다.
나가모리 사장의 사원채용방식과 경영철학은 독특하기로 유명합니다.
1973년 회사 걸립 이후 한 때 대학졸업자, 신규채용 과정에서 ‘조찬시험’을 도입, 도시락을 빨리 먹는 사람부터 뽑았습니다.
그는 신입사원은 무조건 1년간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고 합니다.
얼마 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화장실이 깨끗한 데도, 실적이 나쁜 회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청소도 못하는 사람이 신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그의 ‘화장실 청소’ 경역철학을 교회에 도입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처음 출석하여 교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적용하면 아무도 붙어 있을 사람이 없게 되겠지요?
그러나 장로가 되기를 원하는 교인이나, 안수집사가 되기를 원하는 교인에게는 적용해 볼 만합니다. 매우 성경적이기도 하구요.
낮아짐과 섬김의 도를 갈고 닦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 오거나 유학 온 한인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합니다. 해서, 교회에서도 이러한 톡톡 튀는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러다 보니, 별것 아닌 일로 서로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등을 돌리는 예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아를 죽이거나 깨뜨리는 일이 필요한데, 좀체로 이러한 사람들을 (물론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조금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아를 죽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불쑥불쑥 튀어나오려고 하는 자아를 꾸꾹 누르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폭발하면 그냥 끝장을 내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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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의 이력서: 애굽의 왕자에서 미디안 목자로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모세는 그의 인생 백 이십 년이 3 기로 확연히 구분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사십 년, 미디안에서 목동으로서 사십 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서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난지 석 달 후에 갈대상자에 눕혀 나일 강 하수에 떠내려보낼 때에 바로 공주에 의하여 건짐을 받고 애굽의 왕자로 자라납니다. 그가 장성했을 때 애굽인과 히브리인의 싸움에 껴들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애굽인을 죽이지만 않았다면, 그 다음날 히브리인들끼리 싸울 때 그저 못 본 척 했다면, 그는 여전히 왕자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인을 죽이고 죽인 사실이 탄로 나고 자기가 히브리인이란 사실이 밝혀질 때 자신에게 닥칠 징계가 두려워 그는 미디안 광야까지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사십 세이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 또 다른 사십 년을 장인 이드로의 집에 얹혀서 그의 과거의 신분과 장래성에 비한다면 참으로 무의미하게 양들이나 치면서 그저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모세의 나이가 팔십 세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의 수명의 한계는 백 이십 세이므로 모세의 팔십 세는 현대사람의 활동기력으로 환산한다고 하더라도 육십 세는 족히 되는 나이였습니다. 모세는 환갑이 지난 남은 날이 살아온 날보다는 짧은 그런 시점에 있었습니다. 그 날도 장인의 양무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미디안은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 서해안 쪽이고 호렙 산은 시나이 반도 남부에 위치하여 있는데, 양무리를 치면서 미디안 광야에서 호렙 산까지는 이삼 일은 족히 이동해야 할 거리일 것입니다. 그날따라 모세는 그가 떠나온 애굽으로 마음이 향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해서, 양무리를 몰고 그가 애굽을 떠나 미디안에 이를 때 지나왔던 자취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삼일이 지나서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호렙 산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호렙 산 또는 시내 산이라고 불리는 이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칭하는 것은 사후적인 일입니다. 이 당시 모세에게는 호렙 산이 하나님의 산인지 무슨 산인지 알려진 것이 아닙니다. 호렙 산이 하나님의 산이 된 것은 이 곳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나와 한 달만에 호렙 산기슭에 도착하고 여기서 일 년을 머물 때에 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고 두 번씩이나 십계명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후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호렙 산이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또, 이 호렙 산에서 엘리야가 오백여 년 뒤에 하나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따라서, 호렙은 더욱 더 하나님의 산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애굽을 여행하는 성지 순례자에게 호렙 또는 시내 산을 올라가는 일은 벅찬 감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모세가 이 산 위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십계명 돌 판을 받을 때 그의 기력을 전혀 쇠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 엘리야가 이세벨의 일로 낙망하고 죽기를 구할 때 그를 이 산으로 부르시고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감격이 됩니다.

2절: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떨기나무에 붙은 불
호렙 산의 기슭까지 이른 모세의 눈에 그 산 위의 나무에 무슨 불같은 것이 환하게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는데 아직 모세로부터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모세는 떨기나무에 붙어있는 불꽃에 정신이 팔려 아직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합니다. 모세가 떨기나무를 멀리서 바라보니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도 않고 불이 사라지지도 않는 기이한 현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3절: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모세가 발걸음을 돌이킴
모세의 마음이 온통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 쏠려있습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으면 당연히 타야 할 터인데 타지 않고 있으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해서, 모세는 이것이 어찌된 까닭인지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을 떠난 것은 호렙에 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애굽가까이에 가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나이 사십 세에 도망치다시피 떠난 애굽의 형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자기를 친아들 이상 아껴줬던 바로 공주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왕은 그대로인지 아니면 바뀌었는지, 자신에 대한 애굽 궁정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한지, 또 그곳에 자신의 친부모가 있을 텐데 그들은 과연 지금 어떤 형편으로 지내는지 등등 많은 것에 대한 궁금함으로 발걸음을 애굽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애굽 땅은 들어갈 수 없더라도, 다만 멀리서나마 바라보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이민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또한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이민하였을 것이요, 어떤 분들은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기에 이민을 결심하였습니다. 한국이 좋은데도 어쩔 수 없이 떠났거나, 아니면 싫어서 떠났거나, 아니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잠시동안 떠난 삶을 살거나, 사람들에게는 항상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는 더욱더 고국이 그리워집니다. 멀리 떨어져서 이제 다시는 못 돌아갈 고국이라고 생각될 때에도 그곳의 소식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수구초심(首邱初心)입니다.
사십 년이 지난 다음 모세의 마음과 발걸음이 애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감정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모세를 향하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에 모세를 애굽에 가게 하시지만, 그것은 모세를 그곳에 머물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곳으로부터 인도하여 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모세를 사용하실 때요 계획이 있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간지점에 장애물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호렙 산의 불꽃떨기는 모세를 부르시는 징표이기도 하지만, 또한 모세가 그가 떠난 애굽 가까이로 가고자 할 때 그 진행을 막는 장애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붙은 타지 않는 불꽃이 무슨 까닭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발길을 돌이켜 산을 올라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생활을 하지만 하나님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고도 교회생활은 가능합니다. 교회는 내가 어제 만났던 사람들과 장소만 바꿔서 다시 만나는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머리 속에 들지 않습니다.
찬송을 부르지만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곡조가 좋아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래부르는 것이 좋아서 부릅니다. 교회에서 유행가를 불러도 좋다고 하면 별 부담감 없이 유행가라도 부를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의 이치와 환경에 머물러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찾는 장소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축복의 비결을 찾는 장소일 뿐입니다.
주일예배를 참석하고 또 그이상의 종교행위를 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과 발걸음은 여전히 날마다 하나님이 아닌 떠나기로 작정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을 발견하고 바라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과 발걸음이 모세가 향하였던 애굽이라고 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산 호렙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기를 사모하지 않던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서 모세에게 보인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을 볼 수 있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4절: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심
여호와께서 모세가 애굽으로 가던 길을 돌이켜 호렙 산으로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2절에 나타나신 분은 여호와의 사자인데 4절은 여호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경우에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행전 7:30, 33 참고).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나 천사에게 그의 전권을 위임하신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의 부르심의 때와 장소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어서 빨리 만나고 싶은데 아직 만나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의 착각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라고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을 일반화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잘못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착각 속에서 만들어지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오래 전에 신화 속으로 사라지셨어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한 대다수의 교인들에 의하여 나타나고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고, 경험한 소수의 믿음의 사람에 의하여 증거되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그 뜻과 계획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모세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모세를 향하신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사십 년 전에 그를 애굽 땅에서 불러내신 이가 모세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를 사십 년 동안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살게 하시고, 또한 그 이후 사십 년 동안 미디안의 목동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이스라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침내 모세 앞에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

5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향하고 있던 모세의 마음과 발걸음을 돌이키기 위하여 호렙 산에 떨기나무 불꽃을 마련하시고 그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오르게 하셨는데, 그리고 그가 산에 다 올라왔을 때, 그를 향하여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셨는데,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모세가 더 가까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그가 벗어버려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벗어버려야 할 것은 그의 신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인생경력을 살아왔는지 알게 하기 위하여 이력서(履歷書)를 쓰는데, 이력서(履歷書)란 한자어는 신발을 끌고 온 역사의 기록이란 뜻입니다. ‘가방 끈이 길다’고 함이 공부를 많이 했다는 뜻이라고 한다면, ‘신발 끈이 길다’고 함은 이력이 화려하다는 뜻이요, ‘신발 끈이 짧다’고 함은 변변히 내세울 이력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신발은 어떤 사람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대학시절 남자와 여자가 열렬히 연애를 하다가 남자가 군대를 간 후 여자가 딴 남자를 사귀는 것을,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남자를 향한 여자의 사랑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신발은 어떤 사람의 체면이기도 합니다. 군대갔던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미처 신발을 신을 사이도 없이 맨발로 뛰어나와 아들을 반갑게 얼싸 앉습니다. 사랑하는 님의 부름에 여인은 고무신을 신지도 못하고 버선발로 달려나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체면치레를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신발은 어떤 사람의 삶의 역사요 인격이나 자아의 현재입니다. 물에 빠져 자살을 하는 사람은 흔히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물로 뛰어내리거나 들어간다고 합니다. 신발을 벗음은 자신의 이제까지의 삶의 역사나 인격이나 자아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심은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맡기에 앞서서 믿음의 사람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심입니다.

신발은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경력을 의미합니다. 신발은 한 사람의 자존심이요 체면이요, 인간적인 마음이요 성정입니다.
모세에게 자존심이 남아 있습니까?
그가 애굽을 떠난 이후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면서 사십 년을 목동으로 살아왔는데도 그의 마음 가운데는 여전히 과거의 영화와 권세의 잔재와 그리움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모세와 같이 권세자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에게는 대부분 자신에 관계된 것--집안, 자식, 재산, 하는 일 등--을 과장하여 말하거나, 말하지는 않더라도 속으로 자랑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못 사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현재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무리 겸손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말을 하다보면, 같이 생활하다 보면 그 속에 대단한 자존심이나 체면이 감추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것이 반드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예외 없이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신이 지푸라기처럼 꼭 붙잡고 있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그 인간적인 자존심까지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에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미련 없이 벗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할 때,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땅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5장 15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군대장관인 천사를 통하여서 여호수아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 앞에 놓인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섰지만 전쟁은 이제부터입니다. 그의 앞에 놓인 전쟁은 가나안 땅에서도 강하기로 소문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수아에게 잔재해 있는 자존심과 자신의 힘에 의지함이 철저히 버려져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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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하나님은 지금 교회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내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의 발에서 신을 벗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길고 화려한 인생경력에 대한 자랑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변하기 쉬운 인간적인 마음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지나온 모든 삶의 역사도 잊어버리시고, 인격이나 자아의 허물도 훌훌 벗어버리기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발에서 신을 벗고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충성스런 종으로서 오직 그 분만을 위하고, 그가 명령하심에 따른 삶만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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