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 (마태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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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보니까, 보통 사람은 24시간이 지나면 그가 읽거나 보거나 들은 내용 가운데 90%를 잊어버리고 10%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기억하는 것이 적어도 70-80%는 되는 줄 알았는데, 이 글을 보고 다소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 관찰이 사실이라면, 대인관계에서 우리가 잊어버리는 90%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해준 것이고, 잊어버리지 않는 10%의 대부분은 그가 우리에게 잘못하거나 섭섭하게 한 일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섭섭하게 하거나 잘못한 일은 왜 그다지도 분명하게 기억되는지 10년이 지나고, 또 때로는 3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하여,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직장에 이르기까지 보기 싫은 사람이 으례히 한 두 사람쯤은 꼭 있음이 참 신기할 지경입니다.
이 친구만 없으면 나의 삶이 참 행복할 것 같은데 그 친구가 있어서 문제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간 후에도 여전히 행복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새로이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사정은 여전합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 믿음이 쑥쑥 자랄 것 같은데, 그 때문에 내 믿음이 시험받고 정체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미워하고 싫어하고 용서 못하는 마음을 심어준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단은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 근심을 끼쳐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일만 골라서 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싫어지거나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여기시는 마음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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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세리출신이라서 그런지 그의 복음서를 통하여 특별히 경제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6장 19-24절에서 재물 혹은 돈에 대하여, 17장 24-27절에서 세금에 대하여, 18장 21-35절에서 빚에 대하여, 19장 16-30절에서는 부에 대하여, 20장 1-16절에서는 노임에 대하여, 25장 14-30절에서는 (달란트의) 경영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형제의 죄와 용서를 설명함에도 경제용어인 ‘빚’(ὀφχειλ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3년여 기간동안 말씀하신 가르치심들 가운데 특별히 경제적인 것들을 많이 기억한 것 같습니다. 오늘 일 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21절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형제가 잘못하면 ‘세 번까지는 용서하여 주라’고 한 것을 감안하면, 베드로는 큰 인심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490번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無限定)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의 의미를 잘못 알고, ‘내가 이 번에는 참는다. 그러나, 다음에 또 같은 잘못을 하면, 용서 못한다.’고 다짐하는데 이는 ‘용서’가 아닙니다.
이는 다만 ‘자기 화의 폭발’을 다음으로 연장시키는 일일뿐입니다.
그러나 ‘참 용서’는 다른 사람이 내게 범한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 것, 곧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찬송가 429장 2절에 보면,
“이전에 방탕하게 지낼 때 교만하여 맘대로 고집하던 이 죄인 사하소서.
내 지은 죄 다 기억 마시고 주 뜻대로 늘 주장하소서.“라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다윗은 시편 25편 6-7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안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 용서 구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43장 25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돈인가 하면, 보통 노동자의 20년 품삯입니다.
하루 일당이 50불인 사람의 경우 일년 300일간 20년을 일하면 1달란트를 벌 수 있습니다.
연봉이 15만불인 사람의 경우 쓰지 않고 2년을 모으면 1달란트를 모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만 달란트란 연봉 15만불 수입자의 경우 2만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2만년이란 아담과 하와의 때에서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가 세 번 반복되어야 하는 엄청난 기간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정부에서 징수한 조세의 총액이 약 800달란트 정도 되었다고 하니 이것의 12배가 넘는 일 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달러로 환산하면, 30억불이 넘는 큰 금액입니다. 현재의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3.5조원 정도 됩니다.
무엇입니까?
일만 달란트의 빚은 보통 사람의 경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입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큰 빚인데 그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엄청난 빚을 전부 탕감하여 줍니다. 해서 그 종은 그 엄청난 빚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기서 ‘빚’이라고 함은 우리의 임금 되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입니다. 빚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펠레이 (ὀφειλὴ)는 ‘의무’의 뜻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죄(罪)를 빚이란 말로 표현하셨나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행치 아니하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치도 아니하고 그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왔습니다.
죄인이 판관을 두려워하듯이, 빚진 자는 빚을 준 자를 무서워하고 피합니다.
또 이 사회의 많은 죄들이 돈과 연루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죄는 채무나 의무의 불이행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채무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전부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빚 곧 죄를 탕감하여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의 죄를 탕감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빚 또는 죄를 다 탕감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바울은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곧,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죄의 빚을 용서하여 주심으로 그가 이제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 빚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헬라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나누어줌으로 갚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갚을 길 없는 빚을 하나님께로부터 탕감 받았는데 오늘 본문의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과 같이 우리는 우리에게 그저 적은 잘못--빚을 지은 우리의 불쌍한 이웃, 친구, 또는 교우를 용서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의 빚 또는 잘못에 대하여 따지고 끝까지 물고늘어집니다.
동관이 종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은 그 종이 임금에게 졌던 빚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빚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때로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거나, 자라온 환경이 다르거나, 생각이나 성격이 다르거나, 신앙의 색깔이 다른 까닭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성숙한 크리스천들이 마땅히 잘 감당하여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마치실 때 35절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우리는 먼저 우리 형제와 교우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항상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용서를 실천하기 위하여 하루 하루를 맞이할 때 전날과 연결시키지 않는 새로운 하루를 살고자 노력합니다. 물론 잘되지 않습니다.
어제 특별히 마음이 상한 하루를 보냈다면, 그 하루는 그 날로 잊고자 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모든 불쾌하고 상한 기분은 기도함으로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과 감사한 기억은 기도함으로 오래오래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새롭게 떠오른 태양을 보면서 새로운 기분으로 맞고자 합니다.
이것을 반복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상한 마음과 고통은 많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 불쾌하거나 상한 마음과 기억은 쉽게 잊어버리시는 연습을 하시고, 미워하는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용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며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어떤 악한 여자가 죽어서 지옥 타는 불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그의 수호천사가 이를 안타까이 여기며, 그가 생전에 혹시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한 일이 없나 조사하다 보니, 언젠가 밭에서 나는 파를 한 대 뽑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준 일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렸더니, 파 한 대를 가져다가 그것을 그 악한 여자에게 붙들게 하고 그 파가 부러지지 않고 견디면 천국으로 올라올 수 있고 그것이 부러지면 그의 운명이 지옥에 있을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수호천사는 기뻐서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여자에게 팟대 끝을 잡으라고 하고 그것을 천천히 끌어올립니다. 지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살겠다고 그 여자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천사는 다른 사람들이 붙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끌어올리고 팟대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와 같이 천국으로 올리움을 용납할 수 없어서 저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밀어 제치고 발길로 찹니다.
이때 이제까지 더 많은 사람들이 매어 달려 있어도 끊어지지 않고 잘 견디던 팟대는 끊어지고 그 여자는 영원히 지옥에 머무는 운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효력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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