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마태 5:13-16)
1
교회에서는 사회에서 대접받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교회에서, 주로 섬기고 봉사하는 궂은 일을 맡고, 사회에서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대접받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먼저 교회생활을 시작하여 주인 행세하려던 의사들과 엔지니어들과 박사들이 빗자루를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받드는 일에 불평을 털어놓더니, 그들의 섬김으로 전에 교회를 찾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나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즐거워함을 보고는 신이 나서 지금은 군소리 없이 열심히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나 집사의 삶이 ‘이러 이러해야 된다’고 많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기대하지만, 그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목사나 평신도 직분자가 흔치 않습니다.
저도 가끔 저 자신에 대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 자신의 말이 목사란 것을 잊고 자연인으로서의 말인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말하거나 행동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제자에 합당한 언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너무 가벼운 것으로 여기고 있는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해주십니다.
본문에 앞서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제자의 도(道)를 잘 지킨 사람들에게 임할 천국(Kingdom of Heaven)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하면 두 극단의 갈등 사이에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가난과 부(5:3), 죽음과 삶(5:4), 온유와 교만(5:5), 의와 불의(5:6), 긍휼과 비정함(5:7), 청결함과 불결함(5:8), 화평과 전쟁(5:9), 핍박과 하늘의 상급에 대한 기대(5:10-12)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왜 믿는 사람들을 이러한 극단의 갈등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게 하실까 생각해보지만, 이것이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을 믿음이 없는 삶들로부터 구분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 모든 인생들은 우리의 죄된 마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 갈등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죄된 마음으로 인하여 이렇게 변모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祝福)인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로 이러한 갈등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시지만, 주님의 바라심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천국을 소유하게되고 천국에서의 상급을 받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그 자식을 늘 품에 끼워둠으로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험한 세상으로 내어몰아 그 곳에서 견디어내는 힘을 기르게 합니다. 부모의 바램은 자식이 그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인물이 되는 것이지만, 자식은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거나 부모가 원하는 삶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독수리의 둥지는 높고 가파른 산의 절벽에 위치해있습니다. 알에서 깐 새끼가 웬만큼 자라 어미 독수리의 생각에 이제는 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면 새끼를 물고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가 매정스럽게 놓아버립니다. 한참을 수직자유낙하를 하던 독수리 새끼는 자신의 날개를 펴고 어미 독수리의 기대대로 서서히 하늘을 날기 시작합니다. 혹, 날개를 펴지 못하고 죽는 독수리 새끼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러한 독수리 새끼는 생을 살기에 합당한 독수리로 간주되지 못하는 독수리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모하는 믿는 자의 삶을 이사야 선지자는 독수리의 날개 치고 올라감에 비유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31).
예수님도 이러한 험한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는 일에 대해 마태복음 10:16에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에서 무기력하고 미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혜는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뱀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는 뱀의 지혜처럼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거나 속이는 교활한 지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덕이 되는 순결한 지혜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의 근원은 세상에 있지 않고, 그의 가장 미련한 것이 세상의 어떤 지혜로운 자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2
13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너희’라고 하는 대상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현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음식이 부패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심은 세상사람들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의 부패를 막아주기는커녕 자신이 먼저 부패되는 사람은 소금의 맛을 보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 소금은 맛을 내게하는 일도 한다고 했는데, 세상을 사는 즐거움과 기쁨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은 단지 괴로움과 슬픔 뿐의, 전쟁 뿐의, 불결함만이 있는, 몰인정한 세상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웃음이 있고, 화평이 있고, 청결함과 긍휼이 있음을 세상사람들로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우리는 소금의 맛을 잃은 소금답지 못한 소금으로서 세상의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처리되어질 것입니다.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하십니다. 빛의 역할은 세상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주는 이미지는 구원입니다. 혹은 구원으로의 초대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빛 됨은 우리 스스로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큰 빛”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입니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과 성치 못한 눈을 가진 사람이 칠흑(漆黑)의 어둠 가운데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사물을 밝히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비추일 때에 성한 눈을 가졌지만 어둠가운데 있었던 우리가 세상의 다른 눈먼 사람들로부터 구분되어 밝은 세상에서 사물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로 보게 하신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비추임으로 우리가 보게된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빛의 증거자’이요, 또 다른 ‘작은 빛’으로 아직 어둠 가운데 머물러있는 성한 눈을 가진 사람들을 밝음으로 인도합니다.
15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빛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았지만 이 빛이 계속 비춰지게 하지않는 사람은 등불을 말 아래 두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등불을 말 아래 두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이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계속 등불에서 나오는 빛이 세상사람들에게 비춰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 세상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작업’을 16절에서 제자들의 ‘착한 행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이 어렵습니다만, 잘 음미(吟味)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를 드러내는 행실을 크게 나무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와 보지 않을 때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선행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요 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착한 행실을 하라고 하심은 그들의 의를 드러내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착한 행실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함이요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6:1-4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십니다.
16절의 ‘착한 행실’의 의미가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무엇이 착한 행실인가’가 어렵다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의 착한 행실을 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착한 행실의 내용에 대해서는 5:21-48에 잘 나와있습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을 주고, 오리를 같이 가고자 하는 사람과 십리를 동행해주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등” 세세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착한 행실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며,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며,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것이되,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이는 것이며 그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착한 행실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 그 자체가 착한 행실인줄 모르고 다만 주님의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는 사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돌아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25:31 이하에서 인자가 영광 중에 오실 때에 양과 염소를 가르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양의 반열에 선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의 선행을 칭찬하실 때에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착한 행실’을 했는지 몰라 주님께 반문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이 사람의 반문은 위선(僞善)이 아니요 자신은 자신의 삶이 ‘착한 행실’인 줄 모르고, 다만 주님의 은혜에 따른 삶을 산 까닭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착한 행실이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의식적으로, 가식적으로, 혹은 모처럼 큰맘먹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평소의 삶 그 자체인데 이를 보는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의 등불을 볼 수 있고 해서 주님의 밝음으로 나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