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4, 201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 27:45-5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 27: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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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라고 하는 17세기를 산 독일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열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열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3-4년이면 졸업할 것을 14년 만에 졸업하였습니다. 44세 때에 한 교회에 부임하고 결혼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늦게나마 행복이 시작되려는가 했는데, 30년 전쟁을 겪게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부터 설교권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을 휩쓴 페스트 때문에 다섯 아이 중 넷이 죽고 그 부인도 희생되었습니다. 젊어서부터 목회에 뜻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고자 한 그였지만 그의 생은 어느 한가지 제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고, 불행과 슬픔뿐이었습니다. 그의 고통과 좌절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평생에 걸친 고통과 슬픔 뒤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62세부터 신앙시를 쓰기 시작하여 123편이나 되는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우리 찬송가 18장도 게르하르트 목사님의 작품입니다: 3절에, “나 고난 받을 때나 또 주릴 때에도 내 주님 나를 항상 위로해 주시네. 추하고 곤궁하며 보잘것없으나 주 나와 함께 계셔 늘 권고하시네.”
게르하르트 목사님은 고통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며 감사하며 찬양을 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의인 욥의 고난을 압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비슷한 시기 혹은 약간 이전의 시대에 동방 우스 땅에 산 의인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모르는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의 많은 소유물과 종들, 그리고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한꺼번에 잃어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몸에 악창(惡瘡)이 생겨 온몸이 가렵고 진무르고 터지고 해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재에 앉아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를 위로하는 대신에 옆에서 비아양댑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은 입을 벌려 자기의 난 날을 저주하며 고통중에 탄식합니다. 그의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가 그를 위로한답시고 왔지만 그를 위로하는 대신에 그의 고난의 원인이 그의 범죄함에서 온 것이라 그의 의로움에 대해서 시비합니다. 그 친구의 방문은 그에게 고통을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국에 자신 속에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현하여 말씀하실 때 자기의 원망과 자기 의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온전하여지며 그에게 허락되어진 모든 소유물과 자녀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음을 알고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축복보다 더욱 크신 축복으로 함께 하십니다.

요셉의 고난이 있습니다. 요셉의 일생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의 모형(模型)이라고 불리웁니다, 그의 일생이 흠없고 티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반의 삶은 평탄치 않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다 죽게 되었었지만 넷째형 유다의 제안으로 미디안 상인에게 은 이십 개에 팔리워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 하인으로 넘기우고 그 아내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서 만난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그가 옥에서 나가게 되면 자기를 기억하여 바로에게 고하여 자기를 건져달라고 부탁하지만, 과연 요셉의 말대로 옥에서 나가 자기의 직을 회복한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옥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버리시지도 아니하시고 잊으시지도 아니하셨습니다. 바로가 해괘한 꿈을 꾸었을 때 요셉을 잊어버렸던 술관원장을 통하여 그를 생각나게 하시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심으로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로 높이십니다.

다윗의 고통이 있습니다. 다윗은 일생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려고 하였지만 겉으로는 성공한 듯 보이는 그의 일생도 고통과 번민의 연속입니다. 그가 사랑했던 그의 왕이요 장인이었던 사울의 미움을 사고 쫓깁니다. 그가 윤리적 죄를 범하면서까지 사랑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첫 번째 아이가 나자마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임을 당합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이 대낮에 지붕위에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의 첩들을 희롱하고 그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어옵니다. 또 그의 신하들이 그를 배반하고 그들에 의해 쫓김을 당합니다.
시편 22:1 이하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절규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다윗의 부르짖음이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이 과연 그를 버리셨다는 뜻입니까? 그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다는 뜻입니까? 그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셨다는 뜻입니까?--아닙니다. 다윗의 부르짖음은 그의 고통과 번민을 하소연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임을 알기에 조속히 그를 그 고통의 깊음에서 건져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실 것임을 알지만 지금 당하는 그의 고통이 인간의 능력과 인내로는 참을 수 없기에 절규하는 울부짖음입니다.
해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같은 시편 22:22-24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아브라함의 고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흘 길을 행하여 모리아산에 이르고 그 산의 꼭대기에 올라서 이삭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아들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물어볼 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들에게 말했지만, 그의 나이 백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아들을 향해 칼을 치켜든 아브라함은 고통중에 마음 속 깊숙히에서 부르짖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의 생명보다 더욱 소중한 이삭을 죽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버리심이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세가지 약속--땅과 민족과 복의 약속을 버리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 깊숙히에서부터의 절규를 들으시는 분이신줄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들 이삭을 지금 번제물로 죽인다 하더라도 그를 다시 살리시고 그에게 약속을 이행하시며 그의 신실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신줄 믿고 소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17-19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아들 이삭도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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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금요일 오전 두 시경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신 이후 오전 9시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끌려다니시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즉결심판(卽決審判)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올랐던 모리아산에서 멀지않은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올랐던 이 모리아산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졌음을 우리는 압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지 6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정오부터 온 땅은 어두움으로 뒤덮히고 세시까지 계속 되어집니다. 큰 못으로 손과 발이 박히시고, 여섯시간이 경과함으로 인하여 그 온몸의 물과 피가 아래로 몰린 예수님의 고통은 극에 달합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여진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를 질러 부르짖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이 시편 22:1에서 절규하던 그 부르짖음이십니다. 인간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뒤틀리고 찢겨지는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 절규하시는 부르짖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절규하시는 것입니까?--아니, 지금 그가 당하는 이 고통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정된 것이며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인 것을 아시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가 감당하고있는 이 고통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것이기에 이렇게 부르짖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온전히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고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에 매달리심은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7-8에서, “그는(=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救援)의 근원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고통을 감당하심은 인간의 고난을 몸소 경험하시고 그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2:18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했습니다.

십자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짐작하기에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는 줄 생각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대로 종말론적이요 묵시적인 인물로서 마지막 때에 다시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이었기에 그들은 아마 예수님께서 “엘리-” 하는 부르짖음을 그렇게 알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들 가운데서 “엘리야가 과연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기에 이 고통의 십자가에서 능히 내려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심은 고통중에서 사단의 마지막 유혹을 이기고자 함이십니다. 예수님게서 이 절망의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지만, 그리할 때 인류의 구원의 계획은 무산(無産)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육신의 고통으로 인하여 절규하지만 이것이 그가 마셔야 할 잔인 줄 아시기에 자신의 능력 행함을 허치 않으십니다.

50절에,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靈魂)이 떠나시다”고 했습니다. 이 50절에서의 마지막 부르짖음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계셨을까요?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절규하실 때에 말없이 그 고통 가운데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들의 고통가운데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칼을 들고 마음 속 깊숙이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아셨기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였노라. 이삭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 하시며 그를 중지시키시고 이삭 대신에 수양을 준비시키시어 대신 번제물로 드리게 하셨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사랑함을 보이시기 위하여 바치실 때, 이를 중지시킬 존재가 없습니다. 십자가 주위에 몰린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심을 알았나이다. 이 고통을 멈추시고 우리의 중심으로부터의 번제를 받아주십시오” 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대신에,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시험하고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의 종노릇하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위에서 뛰어내리라” 예수님을 비웃으며 시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그 몸을 떠날 때에, 51절에 보니,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무슨 현상입니까?--이는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고통 가운데 계셨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하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간들과의 막힌 담을 헐으심입니다.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사이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제사장만이 일년에 몇 차례 기회를 얻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육체의 찢기심으로 이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10:19-20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聖殿)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성소의 휘장(揮帳)으로, 육신을 찢기심에 내어주심은 우리 인간들로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나아가게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공생애를 사실 때에 “성전을 너희가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새우리라” 말씀하신 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십니다.

지진과 되어지는 일을 보고, 로마의 백부장과 병사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54절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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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로마서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절규함은 절망과 낙담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는 것이며 자신은 그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겸허한 고백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생명과 구원의 근원되신다는 간증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심은 하늘 아버지를 향한 불신앙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인간 육신의 연약함과 고통 가운데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를 이 사암의 고통 가운데서 속히 건져내어 낙원으로 옮겨주시기를 소망하는 부르짖음이심입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에게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는 자기 부인의 탄식이 필요하며, 아울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짖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그토록 사랑하던 옛사람을 죽임에 내어놓는 이러한 고통하는 절규를 해보지 않는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사람을 입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옛사람이 죽는 고통의 부르짖음을 해본 적이 없으십니까? 바라기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의 옛사람이 죽는 처절한 고통을 저에게 주시며, 왜 이 순간에 저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절규를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절규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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