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과의 만찬” (누가 2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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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The Da Vinci Code」와 동일 제목으로 제작한 영화가 미국 뿐 아니라 한국과 다른 나라들의 기독교계를 강타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책 속에서 그가 새로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란 학계에서는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시온 수도회(Priory of Sion)의 수장이었던 다빈치가 그의 그림들을 통하여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있던 비밀을 후대에 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 중에 예수님 오른 편에 위치한 사람은 이제까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요한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로서 예수님과는 비밀의 혼인관계에 있던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에 있었고, 그는 프랑스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딸을 낳았고 이제까지 예수님의 후손들이 생존하는데, 카톨릭의 비밀 결사단체인 오푸스 데이(Opus Dei)에 속한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후손들을 살해하고 또한 예수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시온 수도회의 사람들도 죽이고자 했다고 주장합니다.
댄 브라운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혼인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1945년에 이집트의 나그 하마디(Nag Hammadi) 동굴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학서들 중에 도마복음(The Gospel of Thomas)과 마리아복음(The Gospel of Maria)의 내용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도마복음과 마리아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도마복음이나 마리아복음이 주장하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남자 제자들보다 막달라 마리아를 더 사랑하셔서 그들에게는 가르쳐 주시지 않은 영지라고도 하는 비밀스런 가르침을 마리아에게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댄 브라운은 두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하셨다는 대목을 혼인관계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사실인 것처럼 소설화한 것입니다.
2-3세기의 정통교회에서는 여자는 구원의 대상이 아닌 까닭에 여자는 세례도 받을 수 없고 성찬에도 참여할 수 없고 교회의 직분은 더욱이 가질 수 없다고 한 반면, 영지주의자들의 교회는 남녀가 평등하게 세례와 성찬을 받고 또한 여자도 교회의 감독직분을 맡을 정도로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댄 브라운은 또 주장하기를 4세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가 기독교를 국교화하기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2-3세기의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그저 ‘인간 예수’요 ‘위대한 선생’에 불과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하나님’으로 칭하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얼마나 초대교회사에 문외한(門外漢)인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돌팔이 지식인으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정경화 작업(현재와 같이 신약성경이 27권으로 정착된 것)이 완성된 것은 4세기이지만, 사도시대 이후 속사도 시대인 일세기 말부터 복음서들과 바울의 서신들이 끊임없이 속사도들과 교부들에 의하여 인용되고 그들의 인용에서 이미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1세기말의 로마의 감독인 클레멘트(Clement)의 글에서, 2세기 초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나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Polycarp)의 고백, 2세기 말의 리옹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 2세기 말 3세기 초의 교부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의 증언들에서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인간적인 사랑을 하였다던가, 결혼을 하였다는 주장들은 20-21세기에만 주장되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반크리스천, 자유신학자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제기된 것으로 그 기원은 1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몰몬교도들이 일부다처를 실시하던 근거도 기실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과 사실적 혼인관계에 있었다고 믿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초대 교회 당시 또다른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사실은 그가 아주 죽은 것이 아니고 못박힌 손과 창에 찔린 허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이지만, 제자들과 여인들이 로마병정들에게 뇌물을 주고 예수님을 사해 근처 쿰란(Qumran)의 한 동굴로 그를 옮기고 치료 후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노후까지 자녀들을 낳으며 살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후 현재까지 모든 그릇된 주장들은 어느 곳에도 그 근거가 없는 허황된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정경이든지 위경이든지 어느 단초가 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희안한 주장들을 내놓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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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일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레위기 23장 4절 이하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절기 규례를 보면, 유대인 달력으로 정월(아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다음날인 십오일부터 이십일일까지 일주일 동안은 무교절로 지켰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은 무교절의 시작을 알리는 첫날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여주심에 감사하고 무교절일 동안에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음으로 그들 가운데 죄를 몰아내고 흠 없는 살기로 결단함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새끼를 끌어오게 하신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을 예비하심에도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어 유월절을 예비하게 하십니다.
9-13절: 여짜오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주인에게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내로 들어가서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볼 때, 예수님의 지시는 매우 구체적이십니다.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미리 보시는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가 예수님이 그러시는데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인데 거기서 유월절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하니 모든 것이 그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14-16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유월절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비감함이 있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실 시각이 다가옴을 잘 아시기에 이것이 제자들과 나누는 마지막 만찬이 될 것에 만감이 교차하십니다.
제자들과는 마지막으로 나눌 유월절 저녁식사가 될 줄 아시기에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7-18절: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누가복음의 기록은 마태복음(26:17-29)과 마가복음(14:12-25)의 기록과는 달리 잔을 나눠주심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정식 유월절 식사시에는 잔을 나눔이 네 번 반복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잔을 나누시고 마지막 네 번째 잔을 나누실 때 그의 새 언약을 선포하십니다.
17절의 잔을 나눔은 첫 번째 잔을 나눔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잔 나눔은 기록에서 생략되었고 네 번째 잔 나눔이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식은 첫 번째부터 세 번째는 생략하고 네 번째 잔 나눔--곧 예수님께서 자신의 새 언약을 선포하심만 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16절에서 하신 말씀을 약간 바꾸어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19절: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떡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의 몸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몸은 그가 말씀하신 대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먹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 만나의 상징입니다.
요한복음 6장 32-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절).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추모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고인(故人)에 대한 생각--그가 생전에 베픈 사랑과 덕담을 나누는 정도의 일을 말씀함입니까? ‘그래,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 선한 일들을 하셨지.’ ‘3년여 짧은 공생애기간동안 그가 이룬 일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어.’ ‘하기에, 그는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의 4대 성현(聖賢) 중에 한 분이 되셨지.’ 이렇게 ‘예수님의 지상 행적을 단편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예수님을 기념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심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기억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자의 삶입니다.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잔(포도주 혹은 포도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관계(New Covenantal Relationship)에 들어가는데, “새 언약”은 그리스도 피의 효력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입니다.
즉,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와 허물을 사함 받기 위하여 매번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었는데,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과거 죄와 현재 죄 뿐만 아니라 미래 죄까지 다 사함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21-23절: 그러나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유월절의 만찬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됩니다.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응하는지 보기 원하여서 예수님을 파는 일을 자청하였을 수도 있고, 예수님이 한계상황에서 정치적 메시아로 임하실 것을 기대하여서 예수님을 팔고자 했을 수도 있고, 요한이 증언하는 대로 저는 도적이라 돈이 탐나서 예수님을 팔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팔므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무효화시켰습니다 (혹은 그가 제자로 불리움을 받았지만 구속의 은혜에서 처음부터 제외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가룟 유다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예수님의 신임을 얻어 돈궤를 맡았었고, 메시아의 임함을 누구보다도 기다리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성찬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참예하였지만, 예수님을 팔므로 그의 모든 수고와 행함이 헛것이 되었습니다.
3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 흘려주심은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구원하여 주시기 위한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보혈의 은혜를 얻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그의 사역을 부인하거나, 십자가의 효력을 부인하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놓인 자의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예하시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신 십자가를 온전히 바라봅니까?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실 때마다 더욱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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