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27, 2013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누가 24:13-35)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누가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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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태어남과 죽음에 관해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아기는 울고 태어나지만 주위사람들은 이를 즐거워하며, 주위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그는 웃으며 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인일 때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태어남은 미지의 세계로 옴이요 죽음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옮겨감입니다. 사는 것이 항상 즐거운 일은 아닌데, 아니 고생과 슬픔의 연속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삶에 미련과 애착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그에게 다가올 미지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존재의 정지가 초기불교에서는 열반(涅槃)의 상태에 들어가는 최고의 경지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허무일 뿐입니다. 존재의 정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혹시 지옥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또 그보다는 생과 사의 갈림을 경험해야 하는 처절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으로서 죽음 다음에 전개될 낙원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곳인지 알게 될 때에 그는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낙원이 이렇게 좋은데, 내가 왜 아직까지 세상의 삶에 연연해 왔던가?’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이별하는 사람은 웃을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또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마다 되뇌이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부활의 믿음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좀더 담담하게, 그러나 부활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소망 중에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까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발견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 26:42)
세 번째도 이와 동일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셨다(마태 26:44)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에게도 고통으로 느껴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여섯 시간동안 십자가에 매어달려 계신 처절한 것이기에 그의 기도가 더욱 간절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이 혼자 견디어야 하는 장시간의 고통이라고 한다면, 그 고통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외로움을 가볍게 하여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늘 동행하여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슬픔과 번민 중에만 같이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과정 중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철저한 버림당하심과 처절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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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3장 1절을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된 곳이 바로 “예루살렘 모리아산”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장소에 예수님 시대에 건축되고 있었던 헤롯 성전은 일명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유명한 서쪽 벽만 남고 성전의 터에는 이슬람 사원인 오마르 모스크(Omar Mosque)가 지어졌습니다. 이 사원은 또한 “바위사원”(Dome of Rock)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올려놓고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큰 바위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은 이 성전 터에서 불과 100미터도 안 떨어진 곳, 곧 모리아의 한 땅입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모리아의 한 땅에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약의 원형(Type)인 아브라함에게 과연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고는 다만 그의 믿음의 고백--“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을 기뻐 받으시고는 이삭 죽임을 중지시키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달리게 하시고 6시간의 기나긴 고통 끝에 죽게 하심으로 그의 인간 사랑하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조만간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실 분이라고 믿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은 참으로 황당하고 허망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는데, “잠시 후에는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또 그 후에 잠시 나를 다시 보리라.”고 하시기도 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고 하시기도 하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그였습니다. 군중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소리쳤습니다. 덕분에 제자들도 으쓱한 기분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는데, 이스라엘 회복은 고사하고 강도들과 함께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형을 받다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또 저녁에 만찬을 잘 들고 여느 때와 같이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는 줄 알았는데 한 밤중에 그들이 왕으로 받들리라 생각했던 그 예수님께서 아무 힘없이 붙잡히시고, 붙잡히신 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어 모든 로마병정과 군중들 앞에서 ‘이보란 듯이’ 내려오시지 않나 기대도 해보았지만, 오후 세시가 되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 23:46; 시편 31:5 참조)란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제자들은 실망과 좌절로 흩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황망한 마음으로 맥없이 주님의 시체가 있는 예루살렘에 며칠 더 머물기로 작정합니다.

4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헤롯의 청직이 구사의 아내)와 요세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살로매(예수님의 이모[요한 19:25];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이 예비한 향품으로 예수님의 몸에 발러주기위하여 갔으나, 예수님의 시신(屍身)은 간 데 없고, 두 천사(혹은 한 천사)가 이르기를 “그가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돌아가서 사도들에게 알리매 다른 사도들은 허탄한 말로 받아들이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나 예수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만 발견하고 기이(奇異)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같은 날 오후--즉, 주일 날 오후--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25리(약 10Km) 떨어진 엠마오(Emmaus)라 하는 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때 한 자리 얻으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왜 고향이 아닌 엠마오로 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모든 의미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15-16절에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나, 낙담과 절망으로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그들과 동행하시는 이가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혹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지만 그것이 허황된 말로 여겨져서 곁에서 동행하는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는 도무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슷한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가(Mark)는 16장 12절에서 예수님이 “다른 모양(模樣)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셨다”고 기술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십니다.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고 했습니다.

이에 두 사람 중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이 설명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고,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었다는 것,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의해서 사형 판결에 넘겨져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소문에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데 헛소문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18-24절).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시고, 구약성경에 자기에 관하여 기록된 바를 풀어서 설명하고 가르쳐 주십니다.
25-27절에,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가르치시기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길을 더 가려는 것같이 하시는데, 그들은 예수님께 강권하여 그들과 함께 머무시도록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유하러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30-31절에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의 눈이 밝아지매 비로소 그들은 그들과 동행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으나 예수님은 이미 그 자리에 안 계십니다.

32절에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구약성경을 풀어서 설명하여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으며 떡을 떼어 주실 때에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가던 길에서 돌이키어 방향을 바꾸어 어둠이 내리 깔리기 시작하는 길을 급히 달려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에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심’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들도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이후 2,000년 뒤 현재를 사는 믿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함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향하던 이 두 사람과 동행하시던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낙담한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사람의 탄식에도 주님은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또한 떡과 잔을 떼는 성찬에도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의 눈이 뜨임 받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우리와 이제까지 동행하시며,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하시던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아보기를 원하십니다.

교인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영의 눈이 아직 뜨임 받지 못하였습니까?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어떻게 영의 눈이 뜨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본문 29절은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강권함--주님께 떼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너무 점잖게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여, 주시든지 마시든지, 응답하시든지 마시든지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알아서 안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데,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알고자,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에, 우리와 함께 유하시기를 간구하는 청원이 없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문 밖에 서 계실지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영의 눈이 뜨임 받고 그들과 동행하시던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엠마오로 향하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고통의 빛을 띠고 가는 세상으로 향한 길이라고 할 것입니다.
엠마오로 무슨 중요한 볼 일로 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을 다 제쳐놓고 급히 “주님이 부활하시고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증거하려고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을 깁던 사마리아 여인은 그에게 물을 청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고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한 4:28)라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주위에 증거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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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징(symbol)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책을 썼는데, ‘우주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이는 다만 구약시대의 엘리야-엘리사 스토리(story)를 그리스도-제자들의 상황에 맞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상처를 입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하루를 머무신 후에 에센인들(Essenes)이 거하는 쿰란(Qumran)으로 가시어서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도, 예수님의 부활도 믿겨지지 않을 뿐입니다. 합리적인 자신의 사고의 틀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요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 시간도 여러분 삶 가운데 주인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기쁜 소식을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간급한 마음으로 증거하여야 할 것이며,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웃들에게 소리쳐서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14절) 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7절) 합니다.
바울의 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 죽으심으로 실망과 좌절감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이 다시 모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아온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한 차례가 아닌 여러 차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증언합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함은 거짓말을 기록한 인간의 말을 믿는 어리석음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에 바탕을 둡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그러하였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체험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흩어졌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여 거기에 유하면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고, 성령을 체험하여 능력을 얻은 후 다시 흩어져서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을 향하여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와 같이 그들이 따르던 주님을 죽음에 내어준 상실감과 낙담의 마음으로 여전히 엠마오를 향하여 난 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만사(萬事)를 제쳐놓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급히 달려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기쁨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시기를 바라며,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에게 부활의 주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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