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을 버려 두고” (마태 4:18-22)
1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그를 따라다닌 사람들 중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를 반대하고 비난하고 고소하기 위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들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병 나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모세의 율법을 범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 말씀과 행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고자 함이 없었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꼬투리를 잡고자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구경 삼아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을 보고 놀라고 호기심이 발동하였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태 12:39)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현세의 문제를 해결 받고 현세의 축복을 받기 위해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갔더니 질병의 문제가 해결되고 배고품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도 자기를 드리고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 받고 현세축복의 목적을 위해서 따라갈 뿐이지 그 이상의 헌신을 하고자함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과 생각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으면 쉽게 떠나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좇음’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따르다 보니까 욕심이 나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시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세 번째의 사람들도 제자라고 부르나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자’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에 보니까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마음에 섭섭함이 생기십니다. 그가 그들의 배고품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의 양식을 공급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떠나는 사람들이 안타깝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가 친히 부르신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한 6:67)라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이를 들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그 마음에 기뻐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부르심(outer calling)’입니다. 이 부르시는 음성은 누구나 다 듣습니다. 비판하고 트집잡기 위하여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이적을 구경할 요량으로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현세 문제해결과 축복을 위하여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습니다.
현재의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되, 설교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도 듣고, 구경삼아 방청객의 입장으로 앉아 있는 사람도 듣고, 현세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듣고,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도 듣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삶이 변화되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삶이 전혀 변화되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교회생활을 합니다.
왜 부르심을 듣고도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지 아니하며 증거하지 아니하며 삶의 변화가 없습니까?
이는 주님의 ‘내적 부르심(inner calling)’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귀와 구경꾼의 눈과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만 갖고는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자기의 것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내적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말씀과 삶을 좇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든 가릴 것 없이 누구든지 자기 전문 직업이 있는 동시에 성별된 주교와 사제가 됩니다.”고 했고, 미국의 교회 지도자 넬슨(John Oliver Nelson)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목회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을 목회자로 삼으십니다.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청년을 부르실 때 부르시는 그런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거듭난 청년들을 부르시고, 설교하시고, 계획을 세우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는데 외적 부르심뿐아니라 내적 부르심의 음성도 들으시기 바랍니다.
2
18절에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이 갈릴리입니다. 그는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교회 건물도 아니고, 재정도 아니고, 사람에게 첫 번째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배장소와 재정 기타 모든 것 위에 사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바칠 수 있는 사람만 만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장소(場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저 숲속의 현자의 은둔처가 아니요,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당시 어부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대상(對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시되 세상의 학문이 많은 자나, 종교 지도자나, 부자나 다른 특권 계층의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스스로 평범 이하의 우둔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되 일상적인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혹은 지혜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의 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되 그들이 생업에 분주하게 종사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이 무엇입니까? 어부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인 물고기 잡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을 때 ‘너희들 정 할 일이 없으면 나를 따라 오지 않을래? 내가 너희에게 할 일도 주고 또 먹을 것도 줄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거나 사양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너무나 바쁘다는 것입니다. 생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냐고, 자녀들 학교 따라다니랴, 음악렛슨시키랴, 운동시키랴, 또 차 태워주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의 때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때,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붙잡고 있는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종용하십니다. ‘나를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마태복음 8장 21-22절(누가 9:59-60 참고)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1-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쑴하십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릴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드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19절에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δεύτε ὀπίσω μου, come after me)고 말씀하심은 육체(Physical body)만으로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삶을 사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삶은 특권의식을 느끼게 하거나 특별히 외적인 자랑거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의 첫 번째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심에 있습니다. 곧,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을 빛과 생명되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케 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삶 그 자체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신 대속물로 드려지심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을 부르시고 제자를 삼으신 목적은 그의 희생적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게하고 또 그들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여 또 그들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공생애의 시작에서 이를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끝에서도 이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되,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심으로 믿는 자의 감당할 사명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모든 족속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전도하는 것--이, 곧 “사람을 낚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맡기신 첫 번째요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20절에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곧 그물을 버려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망설임의 흔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시매 아무 주저함이 없이 “곧(immediately)" 그들의 생계의 수단인 그물을 버렸습니다.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은 사람의 결단입니다.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는데, 헬라어 "아콜루세오(ἀκολουθέω)"는 ‘따라가다(follow)’, ‘동행하다(accompany)’의 의미와 함께 ‘제자가 되다(be a disciple)'의 뜻도 있습니다.
21-22절에서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리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에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이들 역시 할 일 없이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그물의 찢어진 부분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생업의 준비를 하느냐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매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배는 어부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재산입니다, 부친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를 포기함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매 그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재산과 사람을 포기하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11절에는 “저희가 ...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물, 배와 부친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이러한 행동을 하게 했습니까?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고민과 주저 없이 가장 중요한 것들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을 좇을 때, 그들의 앞날에 어떤 이익이 있을 것임을 알았기에, 그들이 장차 어디로 갈지 알았기에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중에 주님께서 부르시매 그 부르심을 따라 간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4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은 이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동일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동일한 주님의 말씀을 읽는데, 왜 어떤 사람은 이에 순종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에 순종하지 않습니까?
“외적 부르심”은 다 듣지만, 어떤 사람은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이 사람은 “내적 부르심”을 듣지 못합니까?
그의 이기적인 욕심과 이것저것 재는 인간적인 복잡한 계산이 그의 영의 귀를 막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우리를 버리고자 할 때, 우리는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이때 비로소 우리는 아무 주저와 고민 없이 주님을 좇아갈 수 있으며,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의 권능을 우리 가운데 체험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를 좇아간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전승(傳乘)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안드레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이로써 복음이 세계로 전파됨에 밑거름이 되고, 요한은 소아시아 서해안의 한 섬 밧모 섬에 귀양가고 그 후에는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냅니다.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임을--아니 보통 사람들보다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앞뒤를 재지 않는 단순한 마음(simplicity)과 주님을 위해서 그들을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원하는 가슴입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으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with spirit and truth)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4:24).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며, 여러분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마음을 드리며 여러분의 가장 귀한 부분--시간, 몸, 재물과 생명을 희생하실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망설임과 주저함 없이 주님을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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