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 16:13-20)
1
교회생활을 잘 하던 어떤 성도가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번창하였기에 일주일의 육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칠일을 온통 사업에 쏟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도무지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한 두 주일은 교회에 나가지 않음이 죄송스럽게 생각되었는데, 한 달 두 달이 지날 즈음에는 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래, 교회에 꼭 나가야 하남? 안 나가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면 되지.’ 그리고 교회에 안 나가는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몇 달을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이 성도를 안타깝게 여기던 목사님이 그를 심방합니다. 목사님이 그를 심방한 때가 겨울이었는데, 목사님은 그의 거실 벽난로 가에서 그와 마주 앉은 다음에 한동안 벽난로 속에서 타는 장작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벽난로 속의 타는 장작더미 속에서 하나를 구분하여 따로 옆에 놓습니다. 그랬더니 이 따로 떨어진 하나는 얼마 있다가 불이 꺼지고 맙니다. 다른 장작더미의 장작들은 빨간 불길을 일으키며 여전히 잘 타고 있습니다. 그 성도도 목사님을 따라 그 벽난로 속에서 불이 꺼져버린 장작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저기 따로 떨어져 나온 꺼져버린 장작이 나란 말씀이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벌립니다. “목사님,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착실하게 나가겠습니다.
우리에게 교회생활이 필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함께 섞일 때 우리는 신앙의 불로 타오를 수 있지만, 다른 교우들로부터 떨어져서 나 혼자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의 불은 꺼져버리게 됩니다. 우리를 활활 타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앙고백의 기름을 더욱 부어야 할 것인데,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교회 안에 항상 있어야 할 것이며 이것이 우리 믿음의 불을 더욱 더 활활 지펴야 할 것입니다.
2
구약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사람들이 내게 너를 보내신 이가 누구냐 물으면 내가 누구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하나님께 질문했는데, 신약 복음서에서는 그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13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 북쪽으로 25마일(40Km) 떨어져 있는 도시인데 헐몬 산(Mt. Hermon) 아래 위치해 있습니다. 분봉왕 헤롯 빌립이 자기의 이름과 디베리우스 황제(Caesar Tiberius)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이 도시는 자연경관이 이스라엘 여러 도시들 중에서 수려하기로 유명합니다. 산이 있고, 동굴이 있고, 시냇물이 맑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우상들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고대 시리아의 신전들이 산재해 있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염소의 다리와 몸통을 가진 목양의 신, 판(Pan)의 동굴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황제의 신상이 있는 대리석 신전이 높은 언덕 위에 있습니다. 이 우상과 신화의 도시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사람들이 누구라고 하느냐?’로 질문을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이 그가 누군지 바로 알기를 기대하시는 질문은 아닙니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 당시에 영혼의 전이(轉移: transmigration)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헤롯이 죽인 세례 요한의 영혼이 예수님의 몸에 들어갔다고도 믿었던 것 같습니다(눅 9:7-8, 19). 어떤 사람들은 옛날 선지자 엘리야,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도 하고,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 선지자 중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불교나 힌두교 또한 기독교 이단 중에서는 영지주의자들 중 일부가 믿는 영혼의 전이 또는 환생 사상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간에도 얼마간 퍼져있음을 알게 합니다.
15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그를 바로 아느냐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질문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현재까지 2년여 따라다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기 위한 질문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을 하면서 그들 자신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시기 위한 질문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무식하여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쳤을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오늘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 믿음의 주체에 대한 확실한 이해 없이 ‘그저’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복음서에 종종 기록되어 있듯이, 이때에도 베드로가 선뜻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ύ θεού τού ζώντος: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말로 표현된 것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진리는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하는데,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진리(the Truth)이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간결하고도 만점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면 첫째는 그리스도, 히브리어적 표현으로는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인류의 구원자(Savior)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여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예수님의 이름 중에 하나인 줄 아는데,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가 밝혀주는 호칭(title)입니다.
곧,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망에서 구원하신 구주(救主)이십니다.
그는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람들 가운데 오심은 아버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아뢸 때, 9절에서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시몬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대단히 만족해하십니다. 해서, 그를 축복하시고 칭찬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사람의 생각이나 이해에서 나온 대답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시몬에게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시몬을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Petros: 히브리어로는 ‘게바’)라고 칭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이 반석(petra)에 대한 해석이 구구합니다.
첫째는 ‘인간 베드로’를 말한다고 합니다. 베드로를 교회의 ‘시초 돌’로 삼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카톨릭에서 주로 따르는 해석입니다.
둘째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뜻한다고 봅니다.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기반(基盤)이라는 것입니다. 개신교에 속한 성경학자와 목회자들이 받아들이는 해석입니다.
그런가 하면, 셋째로는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의 주체-곧, 자신이 반석 또는 기초 돌로서의 그리스도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의미로도 해석합니다.
바울의 교회에 관한 이해는 주로 세 번째에 가깝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0-11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준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저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이중적 의미로 봅니다. 즉, 교회의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요 그 신앙고백의 대상이신 반석 되시며 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선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위에 굳게 선 교회는 음부의 권세에 의하여 흔들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카톨릭에서는 베드로라고 하는 특정인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다고 해석하여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받들고 그 이후의 교황들이 천국열쇠의 승계권을 이어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의 해석 역시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을 축복하셔서 그에게 매이고 풀리는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20절: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3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연합체인 우리 교회를 주님께서 축복하시며 번성케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입술뿐 아니라 삶으로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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