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야 나오라” (요한 11:38-44)
1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지식으로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것에 대하여 기도함으로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음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고 함은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당연한 모습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갖는 것이 사람의 입술로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응답받는 기도의 ABC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Ask(구하라)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 7:7-8).
두 번째는, Believe(믿어라)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고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2-23).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믿습니다)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세 번째는, Contend 또는 Claim(주장하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주장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4).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아느니라(=주장하느니라)”(요한일서 5:15)
또한 오늘 본문 11장 41절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온전히 응답되어지기 위하여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미리 주장하고 간증함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38절: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신앙 없음에 분한 마음까지 드십니다.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음이란 고통을 맛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안됐다고 여겨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울 것인데 주위 사람들에 전혀 그런 기대가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향하실 때 사람들은 그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여서 곡하기 위하여 가시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영광을 얻기 위하여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시는 것입니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니,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님의 명령에 반발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그의 누이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며 따른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음식으로 잘 대접하기도 하며 예수님의 권능과 메시아 되심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그의 믿음은 많은 경우에 피상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혹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착하게 살면 혹 천국에 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은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죽은 자기의 오라비 나사로를 당장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에 그들이 사는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 제일 먼저 예수님께 달려온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고백 자체로만 판단한다면 그의 믿음은 긍정적인 것이고 대단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오라비가 죽었지만,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대답하십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다. 해서 내가 하나님께 구할 것은 네 오라비 나사로를 살게 하는 것이다.’
“(그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분명히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신앙고백하였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의 믿음의 고백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믿음이 없는 고백입니다. 입술로는,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구하시면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막상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실 때 그것이 현재 이루어질 줄은 도무지 믿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하였지만, 아마 마음 속으로는 ‘그것도 그 때 가봐야 알겠지요’라고 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을 오래 안 마르다였지만, 기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그에게 어떤 능력과 신성이 있으신 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믿음이 피상적이며 확신이 없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약속들과 확신들을 주시고 계시지만, 그것을 바라본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이 이뤄질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 약속들을 믿으십니까?’라고 질문하면, 얼마가 ‘아멘’으로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글쎄요...’라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선포에 대한 마르다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지만, 그의 고백은 여전히 입술뿐인 것이었습니다.
하기에,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실 때, 예수님께서 그의 오라비 나사로를 일으키실 것을 기대함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신에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토를 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흘은 죽은 자의 영혼이 이제는 다시 돌이켜 돌아오지 못하는 기한이라고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고대 근동 사람들의 미신적인 믿음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이 사자의 세계를 여행하고 혹 돌아올 수 있는 최대한의 기한은 사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은 지 사흘을 넘어 나흘이 되었기에 이는 하나님이라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그가 앞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과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부활과 영생에 들어가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피상적으로, 머리 속으로만 ‘내가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을 철저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았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응답에 먼저 감사하십니다.
아직 나사로가 일어난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제자들에게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4)고 약속주신 대로 하나님께 대하여도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람의 눈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간구할 때에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이요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셨을 때 이미 이 사건이 그의 영광을 얻게 하실 사건인 줄 아셨습니다. 11장 4절에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을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42절: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기도와 간구에 항상 응답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영광을 받게 하실 것은 이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은 사람의 마술이나 술수로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인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증거하고 사람들로 믿게 하심에 또한 감사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43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님께서 열린 무덤을 향하여 소리쳐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out!)"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며, 또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었을 때 그 집을 방문하셔서 “달리다쿰 (소녀여 일어나라)”(마가 5:41) 하시므로 소녀를 일으켜 세우셨고,
또한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 관에다 넣어 무덤으로 향할 때 그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실 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Young man, I say to you, arise!)"(누가 7:14)라고 하시므로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야이로의 딸을 일으켜 세우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머물러 있던 나사로에게 명령하시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도 무덤에서 나오는 놀라운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생과 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되심을 모든 사람들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안 있으면 맞게 될 자신의 죽음 가운데서도 죽은 자들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일어나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실 것을 예견하시는 사건입니다.
3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을 바라봅니까?
바라보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일이 현재 이루어질 줄 믿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시며 분명히 이루어지는 약속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주님께서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으며, 빛으로는 나왔지만 여전히 활동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어두움에서 나오며, 영적으로 깨어나며, 활동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