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주님” (요한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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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을 하면서 여행객이 겪는 큰 어려움이 있다면 그 중에 식사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는 전혀 식사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국인 목사님들뿐 아니라 미국인 목사님들도 식사시간을 즐거움으로 기다렸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빵과 생선요리가 맛있다고 했습니다. 빵과 생선요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 중에 적어도 두 가지는 빵과 물고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섯 개의 빵(=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시고 열 두 바구니를 남기신 기적과 일곱 개의 빵(=떡)과 두어 마리의 물고기로 4,000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신 기적이 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간이 음식점의 주 메뉴가 생선이며 그 이름도 “베드로 생선(Peter's Fish)"이었습니다. 유대인 식당을 가든지 아랍인 식당을 가든지 속이 빈 납작한 빵의 맛이 일품이었는데 그 빵의 이름이 "피터 브레드(Pita Bread)"였습니다. 속에 샐러드(salad)를 집어넣어 먹기도 하고, 입맛을 돋구는 것에 찍어먹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장삿속으로 베드로의 이름을 너무 남용한다 하였는데, 알고 보니 이 빵의 이름은 ”Peter"가 아니라 “Pita"였습니다.
갈릴리 해는 호수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바다 같은 느낌이 들고 또 바다라고 하기에는 물이 막혀있어 좀 어색하지만, 안내를 맡은 유대인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 갈릴리를 “호수”라고 부르지 않고 “바다”(Se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접한 마을의 이름을 따라 성경에 보면, 게네사렛 호숫가(누가 5:1) 혹은 디베랴 바다(요한복음 6:1, 21:1)라고도 불립니다..
예수님께서 5병 2어의 기적을 베푸셨다는 답가(Tabgha)라고 하는 곳에서 언덕을 내려와 오후 5시경에 “예수님의 배”(The Jesus Boat)라고 명명된 배를 탔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탄 것으로 추정되는 배의 네 배 크기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호수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인데, 배를 탈 때에는 잔잔하던 물결이 배를 타고 갈릴리 해의 한 가운데쯤 오니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 파도가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배에서,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하면, 마가복음 4장(35-41절)에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물결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또, 배의 엔진을 끈 상태에서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어둑어둑해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그려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붙잡히시던 금요일은 한 밤중부터 하루종일 고난과 실망과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든 제자들이 흩어졌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같은 뜰에 있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否認)하였습니다. 몇몇 제자들이 먼 발치에서 예수님이 이제라도 무슨 초인적인 힘과 기적을 보이시겠지 막연한 기대를 갖고 바라보지만 그들의 바램은 좀처럼 이루어질 기미가 없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아침 9시에 “슬픔의 길”(Via Dolorosa)이라고 불리게 된 그 길을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시며 걸어가십니다. 로마 병정이 힘에 겨워하시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하고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달리십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단은 그 군중들의 목소리로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시며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태 27:40; 마가 15:29-30), “네가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너를 구원하라”(누가 23:35),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 27:42),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너를 구원하라”(누가 23:37).
제자들도 물론 입장은 다르지만 이들과 비슷한 외침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의 진정한 메시야시라면 지금 이 순간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조롱하는 이 무리들을 멸하소서! 그리고 우리의 왕이 되소서.”
그러나, ‘자기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섯 시간동안 십자가상에서 고통 당하시다가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시는 순간을 지켜보는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또 다른 마리아와 여인들, 그리고 멀리 서있는 제자들의 마음은 이제까지의 노고가 헛된 것임을 자각함에 따른 한없는 실망과 좌절과 또 분노로 휩싸입니다.
무덤에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을 머물러 계시던 예수님은 안식후 첫날 새벽 미명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모습을, 예수님을 그 마음 속에서부터 가장 많이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그 후에 그날 저녁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요한복음 20:2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씀하실 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님은 사명 맡기기를 원하시는데 곧,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행전에도 기록된 바와 같이 ”성령과 그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의심많은 제자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한 차례 더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팔일이 지난 날, 열 한 제자가 다 모여있고 문들이 닫혀있는데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도마는 감격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며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2
오늘 본문 사건은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을 제외하고 그가 친히 사도로 부르신 제자들에게는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3-35절과 마가복음 16장 12절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글로바와 다른 제자들에게 한번 더 나타나셨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사도로 부르신 제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에서 마태는 갈릴리의 한 산에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은 누가복음 5장 1절이하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장면과 흡사합니다.
그 날도 밤이 맞도록 고기잡이를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새벽녘에 돌아와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있는 어부들과 두 배를 보시고 그 중에 한 배에 오르시어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때 시몬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더니 잡힌 물고기가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갈릴리로 돌아가라 하신 말씀을 듣고, 또 전에 고난 당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생각나 갈릴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몰라 세월만 보내고있을 뿐입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머물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고 사명을 맡기셨는데 그들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대신에, 아니면 주님께서 그리하셨듯이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대신에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마저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함을 등한시할 때, 우리의 기억과 체험은 나의 삶에서 가물가물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과 야곱과 요한과 다른 두 제자, 이렇게 일곱명이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무료하게 날을 보내던 그들이 예전과 같이 물고기를 잡으러 가고자 합니다. 하루밤을 꼬박 새웠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날이 거의 밝아 배를 바닷가로 저어오는데,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외칩니다 5절에, “얘들아(=이 사람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로 번역된 ‘파이디아(παιδία)’는 친근한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인데, 날이 아직 채 밝지 않아 그들을 이와같이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을 잘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또 외칩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말씀에 확신이 있으며 권위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끌리는 마음으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에 요한복음에 몇 번 반복되어서 기록되고 있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한으로 추정되는 그 제자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라” 말할 때,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배가 해안 가에 닿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허둥지둥 물 속에서 빨리 뛰어가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아마도 착잡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뵈었지만 그때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했을 것이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주님은 이미 사라지셨습니다. 육지에 오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숯불과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 하시고선, 그가 굽고 계시던 떡과 생선과 함께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십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주님이 부활의 한 증거였다고 한다면, 갈릴리에 나타나신 주님은 그들이 이제 이후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러하기에, 식후에 베드로에게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시며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21:18-19).
갈릴리 바닷가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주님께서 어부이던 그들을 부르실 때,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마태 4:19; 마가 1:17; 누가 5:10)고 하셨는데, 삼 년여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이 생각한 것이라곤 감투와 권력이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나 뵈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들을 그들이 주님을 처음 만났던 곳으로 부르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며, 그들이 그 사명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여주시기 위함입니다.
3
우리에게도 주님을 처음 만난 장소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바울이 공생애를 사시던 주님을 만나보지는 못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빛 가운데 임하실 때그의 생애가 180도 바뀌어진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만난,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만난,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삶이 180도 바뀌어져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실망이 있고 그늘이 있습니까?
오늘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삶이 재충전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운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이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와 동행하시나 누가복음 24장 16절에 표현한 대로 “저희의 눈이 (슬픔과 근심으로)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우리의 세상 짐으로 부활하신, 나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교우님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므로 동행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혹은 교인 혹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이나 원망의 마음으로 부활의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고 그 주님이 그로 감당하기를 원하는 사명을 잊고 생활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부활의 소망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에게는 눈물과 한숨과 이별이 있지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더 이상 이별은 없고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이 주어집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시기를 바라며, 처음 여러분이 주님을 체험한 그 순간의 감격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며, 해서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며 증거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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