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4, 2013

“베드로의 부인(否認)” (마태 26:69-75)

                                                  “베드로의 부인(否認)” (마태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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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했는데, 과연 돈을 사랑함으로 곤란(困難)을 겪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의 전(前) 두 대통령이 그랬는가 하면 최근 한보사태로 어려움을 당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뇌물을 건네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심리를 한 번 생각해봅니다. 뇌물을 주는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큰 돈을 건네주고도 마음이 편했던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부형으로 선생님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던 사람이고, 부하직원으로서 상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사 사람보다 영특하여 감사의 표시가 크면 클수록 상대방이 좋아하고 자기가 바라는 일이 쉽게 됨을 보고 간덩이가 붓기 시작하여 액수가 점점 높아져 갔을 것입니다. 뇌물을 받는 사람도 처음부터 큰 돈을 뇌물인줄 알고 받던 사람은 아닙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이 사회의 미덕인줄 알고, 상사로서 부하 직원의 감사의 표시를 받았을 것이고, 액수가 올라져 감에 따라 약간은 부담도 되고 겁도 났을 것이지만 같은 위치에 있는 다른 친구들을 보니까 으례히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점점 더 대담해졌고, 나중에는 은근히 바래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뇌물을 받는 입장에 있어보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은 뇌물을 주고받은 것이 탄로나 신문에 기사화된 사람들을 가리키며 욕을 합니다. “어떻게 정부의 고위 관리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 국회의원이 어떻게?” 그러나 욕하는 사람도 막상 그 지위에 있었으면 십중팔구는 그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도 돈 문제로 곤란을 당하였습니다. 목사님이 가난하여 낡은 차를 가지고 다니다 보니까 고장이 잦아 심방하는데 지장이 많았습니다. 이를 딱하게 보던 한 성도님이 목사님께 몇 천불을 건네 드리면서 제대로 된 중고차를 사시는데 보태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극구 사양하였지만 심방을 잘 하시기 위한 것인데 어떻냐고 부득부득 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자기가 잘 아는 딜러(Dealer)가 있는데 차 사는 것도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후 그 성도님이 말하기를 지금은 마땅한 차가 없는데 조금만 기다리시면 좋은 차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 그때 사시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액수가 좀 크긴 했지만 이것을 뇌물이라고 생각했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돈을 건네준 성도님도 그것을 뇌물로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사님께 뇌물을 주어서 무슨 기대할 일이 있겠습니까? 중세시대에 카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판 일은 있지만... 그러던 중 교회에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차 사라고 돈을 건네준 그 성도님이 반대편에 서게되고 목사님의 비난꺼리를 찾다보니 목사님이 돈을 받은 것이 생각나고, 처음에는 선한 뜻으로 준 돈이었는데, 반대편에 의해서 이용되기로는 “목사가 십일조 헌금 드릴 것을 개인적으로 가져오라고 하여서 자기 임의로 유용하였다”고 “도둑 목사”로 몰아붙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할 때 갑자기 알아차리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되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가장 위하는 척 은근히 찾아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신앙고백함으로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는, 바로 다음 순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을 가장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만류를 단호히 물리치시면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우리의 행동에 정당성(正當性)을 부여해줍니다.
슈사꾸 엔도(Shusaku Endo)의 소설 침묵(Silence)에 등장하는 일본에 상륙한 포르투갈 출신의 신부들이 겪는 곤란도 정당한 사유(事由)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일본 선교를 무산시키기 위해서 이들을 취조하는 일본인 관리는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합니다. “네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을 밟으면 저 불쌍하게 고통 당하는 일본인 신자들을 살려줄 것이지만, 끝까지 거절하면 너는 물론 저들을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 신부의 마음에 나 한 사람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저 불쌍한 사람들이 죽는 것이 가엽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불쌍한 일본인 신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초상을 밟는 배교(背敎)의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이 신부들은 그들이 전하고자 이 멀리까지 온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뿐 아니라 비방하고 예수님을 믿다 잡힌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까지 이용당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한번 넘어뜨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로 한번 넘어진 사람들을 계속 사용합니다.

마태복음 21장 이후에서 보는 바대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긴 말씀으로 그들에게 마지막 당부와 가르치심을 베푸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며 예수님이 안 계신 동안 그들이 감당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목요일 밤 자정쯤 되어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 위해 이미 일행을 빠져나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와 함께 가셔서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올리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세 차례 기도하시는 동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는 26장 38절에서 보는 바대로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쏟아지는 잠을 못이기고 쿨쿨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돌아와 잠자는 세 사람을 보고, 또 말씀하시기를 26:41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 차례 하나님께 피와 땀을 흘리시는 기도를 하시는 동안 내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금요일 새벽 2시쯤 예수님께서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 26:56에 보니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홀로 외롭게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붙잡혀 가십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결정할 것에 대한 질문을 받으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때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답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십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의 심정도 번민하심이 있으셨을 것이지만, 깨어서 기도하심으로 항상 사단의 미혹을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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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절에서 베드로는 멀리 떨어져서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까지 들어가 그들 중에 한 사람인 것처럼 하여 그들과 함께 뜰에 앉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에 둘러싸여 심문을 당하고 있는 그 때에 베드로는 69절에 보는 바대로, 제사장의 집 바깥뜰에 앉아있었습니다. 56절에서 알았듯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이 장차 어떻게 되실까 염려되어 예수님이 심문 당하시는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가까이 나아가 “내가 너희들이 심문하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되신 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할 담대함은 그에게 지금 없습니다. 이는 그가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잔 까닭입니다. 아마 지금                                                     

그의 마음속으로는 우리가 흔히 곤경을 당할 때 속으로 자신을 변명하는 것과 같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나설 수도 있지만 지금 나섰다가는 헛된 죽음을 당할 뿐이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 예고하실 때에 베드로는 자신 있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홀로 고초를 당하고 계실 때에 그도 여느 제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되 그 강도가 점점 강해집니다.
70절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소극적 부인을 합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10장 32-3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결국에 용납하심을 얻고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은 그의 잘못을 회개함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72절에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했습니다. 두 번째로 부인할 때는 맹세하고 부인했다고 했습니다.
산상수훈 중 5:34-3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헛맹세를 잘하고 우리의 잘못을 아닌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하늘로 맹세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우리의 악을 더할 뿐입니다.

74절에서 베드로는 그의 부인의 죄를 더욱 강하게 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의 저주의 대상은 자신이 한 때,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했던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기 위해서 저주의 말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여러분과 저의 모습이었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신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사람은 성령이 그 가운데 없는 까닭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고 고백한 적이 있지만, 예수님의 승천 후에 오순절 성령강림이 임하기 전의 상황이므로 성령이 그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역사하시는 때는 아니었습니다. 해서 그가 예수님을 저주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었던 까닭이요, 성령으로 말하지 않은 까닭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난해(難解)한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죄--부인함과 맹세함과 예수님을 저주함--가 사함을 얻게된 것은, 그가 예수님을 3년 넘게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아직 그에게 성령이 이르기 전에 범한 잘못인 까닭에--인자를 거역하긴 했지만 성령을 훼방하거나 거스린 죄는 아니라 사하심을 얻었다고 해석하는 성경학자들이 있는데 일리(一理)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갖고 성령의 은사를 맛본 사람이 후에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는 죄를 범하는 경우에 이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도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했습니다. 성령을 맛본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단의 미혹함에 넘어가 성령을 거스려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는 잘못을 범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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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은어(隱語) 가운데 “small dragon"(작은 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관행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만, 전에는 새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하여가면 그 교회 사람 중에 얼마가 새로 부임하여오는 목사님을 환영한다는 뜻으로 교회의 기를 든 사람을 필두로 목사님을 맞이하러 나오는 행렬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를 들고 맨 앞에 서서 열렬히 새 목사님을 환영하는 사람을 지칭하여 "small dragon"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는 이 사람이 목사님 편에 서서 목사님을 도와주는 일에 가장 앞장을 서지만, 십중팔구 이 사람으로 인하여 목사님이 교회를 물러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위의 믿음의 사람을 넘어뜨리게 하는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주위의 친한 사람을 가장하여 우리에게 은근히 다가오는 사단에게 넘어지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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