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부활” (고전 15:12-34)
1
사람은 태어나서 유아기와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보내고, 노년기를 지내다가 때가 되면 흙에 묻힙니다. 어떤 사람은 그 중간단계에서 운명을 달리 하기도 합니다.
80이 된 분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하면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기력이 쇠하여가고있는 80세 노인’이 그입니까? 그의 실체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도 80년 전에는 어린아이로 세상에 태어났으며, 소년과 청년과 장년의 때를 보낸 사람입니다. 만일 60년 전에 동일한 질문을 했다면 그는 ‘나는 혈기 왕성한 20세 청년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유아의 육체나, 20세 청년의 육체나, 80세 노인의 육체는 다만 ‘진정한 그’가 거하는 거처일뿐 그의 실체는아닙니다.
미국의 6대 대통령이었던 존 퀸시 아담스(J.Q. Adams, 1767-1848)의 일화입니다. 80세의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그의 친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이보게 아담스, 오늘은 좀 어떤가?”
아담스는 대답합니다. “고맙네, 아담스는 잘 지내고 있다네. 단지 살고 있는 집이 점차 살기에 점차 불편해지는 것 말고는. 그러나 나는 그 집이 아니니까 별 상관은 없지. 이제 곧 집을 이사해야 할 것 같아. 어쨌든 아담스는 잘 지내고 있다네. 고맙네!” 아담스는 그 육신을 그의 사는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체(實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체라고 하는 껍질(nutshell) 안에 거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 갖고 있는 우리의 육체를 장막집이라고 했습니다. 이 장막집은 말하자면 80-100년 동안만 살 집이라 임시로 지은 것이어서 세월이 지나면 낡습니다. 우리(=영혼)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육신이라고 하는 장막집에 거하고 있는 것같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살 집이 필요한데 우리 영혼이 거할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 혹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 것이 ‘몸의 부활’입니다.
‘육신이 죽은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견해는 이미 헬라 철학자들도 주장한 바이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믿던 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시던--‘죽은지 사흘만에 육신으로 다시 사심’을 나타내신 것은 우리 인간은 영혼뿐아니라 몸으로도 영원히 살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몸과 영혼으로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은 마치 한 알의 씨와 같습니다.
어떤 씨는 실하여서 파종(播種)하면 좋은 싹을 내고 좋은 결실을 거두는가 하면, 어떤 씨는 같은 씨인것처럼 보이지만 쭉정이라서 땅에 심어도 싹을 내지 못합니다.
알곡신자와 쭉정이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곡신자는 그 삶의 내용물이 믿음이기에 그가 다시 땅에 떨어질 때(=죽을 때) 부활의 싹을 내고 영생의 열매를 거두는 반면에, 쭉정이 신자는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 믿음이 없었기에 땅에 떨어질 때에 부활의 싹을 내지 못하고 흙속에서 그저 썩어질뿐입니다.
다른 믿지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첫 번째는 썩을 몸을 입고 태어나지만, 두 번째는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합니다. 한 번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지만, 영생하는 축복과 기쁨을 그의 몸과 영혼이 맛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2
15장 1-11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명한 바울은 오늘 본문(15:12-34)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죽은 자가 그의 믿음에 따라 몸으로 부활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까닭입니다.
12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몸의 부활은 물론이고 영혼의 불멸도 믿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었지만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바울이 지금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반문함은 ‘죽은 자의 몸의 부활’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죽은 자의 부활’은 ‘죽은 자의 몸의 부활’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기에 부활을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나는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믿지만,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부활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13절(또 16절)에서 바울은 반복하여서 강조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땅에 오시고 육신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지킨 사람의 결국이 어떠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같이 육신의 몸을 입은 우리도 부활할 것임을 말씀함입니다.
14절(또 17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궁극적(窮極的)인 소망은 부활의 몸과 영혼으로 영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결국 우리의 궁극의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사도들과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복음을 전파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근거도 없습니다.
15절에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의 복음 증거의 핵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24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고, 31-32절에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은 ‘죽은 자가 몸으로 다시 살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부활하심은 ‘우리 믿는 사람의 삶이 어떠하리라’고 함을 보여주시기 위한 모델의 삶입니다.
18-19절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씀합니다.
“또한”이라고 한 것은 앞의 말(16-17절과 13-14절의 반복)을 이어받음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터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죽은 자가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굳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죄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한 까닭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우리도 여전히 사망의 권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여전히 있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그러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은사로 우리 믿는 사람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 오늘을 살지만 소망 중에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힘을 얻고 ‘오늘’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과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첫사람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계획 중에는 ‘사망’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썩어짐과 사망이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2: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되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인간에게 내리셨던 징계를 풀어주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같이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부활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21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이하의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논리와 같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와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듯이 의롭다함과 부활과 영생도 사람으로 말미암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고사성어가 있는데, ‘매듭을 맨 자가 풀어야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이 고사성어의 논리와 비슷한 것으로서 사람이 맨 매듭을 사람으로 풀게 하겠다는 것인데, 첫 번째 아담은 죄를 범한 자로 그러한 능력이 없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신 마지막 아담으로 그 일을 이루시게 하신 것입니다.
22-24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씀합니다.
부활될 사람의 순서를 설명함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현재는 영혼으로 낙원에서 쉼을 얻고 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강림하여 그들의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여전히 지상에 살고있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썩을 몸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썩지 않을 몸으로 변형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임하는 ‘몸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의 결국을 말씀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의 순서와 같습니다.
25-26절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이후에 일어날 사건의 순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공중재림하시어 7년동안을 머무신 후에 지상에 재림하시고 천년동안 왕노릇하실 터인데 그때에는 아직 완전히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기 전입니다. 천 년 동안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셨지만 천 년이 차매 잠시 세상에 내어놓으셔서 그동안에 불어난 사람들의 믿음을 다시 한번 보십니다.
그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는데, 이로서 믿지않는 자들에게 행위에 따른 심판을 내리시고,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기록한 대로 그 이후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이 있게 됩니다.
27-28절에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게 하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재림이후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의 대상과 그 역사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만물이 그의 발 아래 복종케 될 것인데, 이때 그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의 역사는 백보좌 심판이 있은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까지로서 그 이후에는 다스리심의 권한이 성부 하나님께 이양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끝나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의 다스리심이 계속될 것입니다.
29절에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라고 질문합니다.
고린도 지방에서 잘못 행하여지고 있던 관습입니다. 곧,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가 부활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가족 중 혹은 친구 중에 누가 그를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활 때에 믿지 않고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부활될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잘못된 것이지만, 바울이 지금 이것을 말함은 부활의 소망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30절에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라고 반문합니다.
바울을 포함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죽음이 두렵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몸이 부활되고, 부활된 몸이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믿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함은 그당시 바울이 처한 죽음에 직면한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의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삶’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 때 나의 자아(自我)는 죽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 23-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救援)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고 부인하는--‘자기가 하고자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귀한 선물로 주어집니다.
32절에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천의 윤리적인 삶의 의미는 부활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되지 않을 터이면, 만일 우리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없고 죽음 가운데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면, 이 세상을 나의 배만 위하고 방탕한 삶을 산들 무엇이 대수이겠습니까?
교회를 다니면 사업이 잘되고 세상 복을 얻는 줄 알고 다니고 이 세상을 살 때 마음이 편하여서 다닌 것이라면, 그리고 죽음 이후는 없는 것이라면,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좀 나쁜 짓을 하면 어떻고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는 삶을 산들 어떻습니까? 어차피 죽음 이후는 아무 것도 없는데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후에 내 혼(魂)이 심판 받는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몸으로 부활될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주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의(義)의 첫째 부활’에 참예할 것이요, 또 어떤 사람들은 백보좌(White Chair) 앞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 받기 위해서 ‘불의(不義)의 둘째 부활’에 참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인생은 어차피 한 번뿐, 죽음이후는 아무것도 아니니 자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일 것이지만, 죽은 자는 반드시 선악간에 판단을 받기 위해서 부활합니다.
우리가 무슨 부활에 참예하여야 할 것입니까?
영생(永生)의 부활에 이르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3-34절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3장 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권면합니다.
부활을 바라보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좋은 씨뿌리는 삶이 없으면 내일의 좋은 결실을 거두는 삶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기억에 매임을 당하여 살고, 어떤 사람은 내일 마치 큰 일이 이루어질 듯이 내일을 먹고 사는데 우리는 오늘의 바른 삶이 필요합니다. 그 ‘오늘’ 중에서도 이 시간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주님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생각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영생을 누리되 영혼으로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요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한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산과 바다로 가족과 함께 놀러 다니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또 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굳이 생활의 일부를 쪼개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릴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그것으로 나와 가족의 배를 채우는 것이 더 낫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위험을 감수하고 나의 욕심과 자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내가 몸으로 부활할 것을 바라보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부활의 믿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에 대한 바른 목적과 바른 믿음을 갖고 여러분 자신을 부활의 주님께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