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28, 2013

“부활의 몸” (고전 15:35-49)

                                                       “부활의 몸” (고전 15: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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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란 단어는 때로는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고 또 때로는 긍정적인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의 꿈은 허무하거나 헛된, 이룰 수 없는 혹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물거품같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꿈은 한 사람의 이상(理想)이요 소망(所望)입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할 때 이 꿈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꿈에 대한 고사성어(古事成語)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남가지몽(南柯之夢), 무산지몽(巫山之夢), 역부지몽(役夫之夢), 한단지몽(邯鄲之夢), 화서지몽(華胥之夢), 호접지몽(胡蝶之夢) 등이 잘 알려진 꿈 이야기들인데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장자(莊子)의 꿈 이야기입니다(《장자》「제물론」편).
장주(莊周: 장자의 이름)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훨훨 날아 다니는 나비가 되어 기분내키는 대로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문득 꿈에서 깨어보니 변함없는 장주였습니다. 도대체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아리송합니다. 인생을 다람쥐 채바퀴 돌 듯 살아가다가 돌이켜 보면 내가 현실을 산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어왔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현세상에서 무엇인가 추구하면서 살아갔지만 그것이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꿈 이야기 가운데 중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조신(調信)의 꿈”이 있습니다 (제 3권 탑상(塔像) 제 4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조신(調信)」). 신라시대 조신(調信)은 경기도 개풍의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흥교사)에 소속된 중으로서 명주(溟州) 날리군(捺理郡 혹은 날생군[捺生郡])에 위치한 장원(莊園)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곳에 내려왔을 때 그는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보자마자 반해 버립니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洛山寺)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살게 해달라고 남몰래 자기의 소원을 아룁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녀에게는 배필이 생깁니다. 이에 조신은 또 불당으로 나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그 자리에서 잠이 듭니다. 문득 김흔공의 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기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합니다: “저도 일찍이 스님을 잠깐 뵙고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하며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명령에 못이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하여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녀와 40여 년간 함께 살면서 다섯 자녀를 둡니다. 그러나 마침내 거친 음식(粗食)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사방으로 구걸의 길을 다닙니다.
10년 동안을 사방으로 헤메고 다니니 옷이 갈갈이 찢어져서 몸뚱이도 제대로 가릴 수 없게 되고, 15세 된 큰 아들을 굶주림으로 명주 해현령(蟹縣嶺)의 흙에 묻는 슬픔을 겪습니다. 그들은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우현)에 이르러 모옥(茅屋)을 짓고 삽니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허기로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10세된 딸 아이가 밥을 빌어먹으러 다니다가 개에게 물리니 부모로서의 아픔이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은 두 아이씩을 나누어 맡아 헤어지기로 합니다. 이렇게 작별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조신(調信)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그가 울며 잠들기 전에 타던 등잔불은 여전히 꺼질 듯 깜빡거리고 있는데 어느덧 희쁘옇게 날이 밝기 시작합니다. “아 다행히도 꿈이었구나”하며 조신은 꿈 속에서 모진 고생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긴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관음보살 앞에 속죄의 기도를 드리고, 세수를 하려고 시냇물에 몸을 숙이는데 물에 비췬 그의 얼굴을 보니 수염과 머리칼이 온통 하얗게 세어 있었습니다. 꿈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한 평생을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아온 듯이 그렇게 수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꿈에 큰 아들을 묻은 해현령(蟹縣嶺)에 가서 그 장소를 파보니 그곳에서 돌부처(石彌勒)가 나왔습니다. 이후로 그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착한 일만 하면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가 언제 어느 곳에서 세상을 떴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를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우리의 탐욕이나 정욕을 좇는 삶은 한낱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좇을 때 우리는 허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의 결국은 하늘에 속하는 자가 아니라 흙으로 돌아갈 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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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절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고 부활의 몸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 질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 마음에서 어떠한 몸을 입을 것인가 궁금하여서 한 질문이 아니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생이 결국은 한 알의 씨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과 믿음에 따른 삶이 ‘그 씨의 내용물이 어떠할 것’을 결정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일생도 똑같은 씨를 얻는 삶같이 보이나 천지차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생을 통하여 얻어진 씨는 씨 자체로 남아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씨의 내용물이 어떠한가 보기 위하여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씨가 죽어서 맺어지는 열매의 어떠함이 우리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했습니다.
무한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꿈 곧 소망이지만 현재의 육체와 같이 계속 늙어지고 쇠하여지는 모습으로 천년 만년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육체는 죄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점점 낡아지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이 낡아지는 몸이 죽을 때 낡아지지 않는 몸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은 자기 생명을 버리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풍성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산 믿음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기에 그가 얻은 씨의 내용물이 알찬 것이지만, 이 씨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지만 다음에는 영원히 사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애벌레가 그 껍질을 벗어버리고 아름답고 섬세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듯이, 우리 인간은 죄와 허물의 껍질을 훌훌 벗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썩지않는 부활의 몸으로 하늘나라를 향하여 날아오르기 위하여 한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신령한 몸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죄와 사망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들어왔기에 죄와 허물을 함께 묻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되어야 합니다.

37-38절에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린 나무를 묘목하는 경우에는 그 어린나무가 큰 나무의 형체를 갖고 있기에 그것이 자라면 어떠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경우에는 그것이 무거운 흙을 헤치고 올라와서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피고 열매를 내는 과정을 겪으면서 그 식물(植物)의 형체를 나타냅니다.

씨가 장래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콩의 씨가 팥을 낼 수 없고 팥의 씨가 콩을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무와 열매를 예로 든다면 가시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낼 수 없고 찔레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결실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살 때에 악한 생각을 품고 살던 사람이 거둔 씨가 좋은 생각의 나무와 열매로 다시 태어나고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살 때에는 세상의 정욕과 자랑에 따라 살던 사람의 나무에서 다음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찬송하고 영광돌리는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43-45절에서 예수님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부활의 열매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으면 뜻이 더욱 분명하여집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했는데, 결국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형체--몸(σώμα)--를 주시는데, 그 일생이 믿음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헌심된 삶이었다면 장차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형체--곧 부활의 몸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39절에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생물을 지으시되,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 등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각각 다른 육체를 주셨습니다. 같은 육체(flesh)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다 같은 육체(flesh)가 아닙니다. 같은 육체(flesh)로 지음받았지만 사람이 누리는 영광과 물고기가 누리는 영광이 다릅니다.

부활의 씨로서 우리 각 사람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씨가 부활로 다시 나타나게 될 때 그 형체는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생명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것이요 어떤 사람은 영벌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사람의 영광도 각각 다를 것인데, 그들의 믿음과 믿음에 따른 각기 다른 삶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질 상급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은 얻되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것이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칭찬이 있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40-41절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말씀합니다.
땅에 속한 생물체가 여러 가지 형체--몸(σώμα)--를 갖고 살아가듯이 하늘에서도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한 땅에서 영광을 얻듯이 또 어떤 사람은 하늘에서 영광을 얻게 됩니다.
땅에서 영광을 얻은 사람이 반드시 하늘에서 영광을 얻을 사람은 아닙니다.
땅에서는 땅의 기준에 따라 영광이 주어지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영광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땅에서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는 영광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까닭입니다.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했습니다.
죽은 것같이 보이는 씨가 땅에 떨어지면 다시 살아나듯이 우리 육체가 죽는 것같으나 땅에 묻히면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육체는 썩을 것이나 부활의 첫 열매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될 우리의 몸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에 육체(σάρξ)와 몸(형체, σώμα)이 다릅니다.
육체는 몸이라고도 표현하지만 썩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부활될 몸은 성경에서는 육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50절의 표현을 보면, “혈(blood)과 육(flesh)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했습니다.
육 곧 썩을 육체는 사망의 권세 가운데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습니다.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합니다.
이 세상의 우리 육체가 욕된 까닭은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지배 하에 있기에 우리로 원치 않는 죄와 허물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세상의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내면적으로 뿐만아니라 외적으로도 후패하여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권세 가운데 놓이지 아니하며 죄와 사망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영광슬운 몸을 입게 됩니다.
현재는 나의 마음과 육체가 모두 약하여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부활할 때 나는 강하여 우리의 원함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육의 몸(a physical body)이란 동물적인 본성(animal desires or instincts)에 의해서 지배되는 몸입니다. 곧, 식욕, 성욕, 종족번식욕, 출세욕, 명예욕, 탐욕 등 하나님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신령한 몸(a spiritual body)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몸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거룩하고 신령한 것만이 있는 세상은 육체적인 욕망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재미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재미는 순간뿐이지만 신령한 재미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45-46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에 속한 것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를 하늘에 속한 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범죄함으로 산 영의 특권이 그에게서 박탈되었습니다. 그로써 아담과 그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불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원래의 축복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살려주는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신령한 자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이에 신령한 자가 아닌 우리들을 신령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하여 신령한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47절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원래 땅에 속한 자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주심으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삼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땅에 속한 자의 결국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얻을 것인데 아담은 사단에게 미혹되어 이 하늘나라에 속함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맛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삼십여년의 삶을 사셨지만 하늘나라에 속한 권세를 상실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땅에 속한 자들로 하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48-49절에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유전자(gene)를 이어받아 육적인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은 흙에 속한 자들로 영원히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하늘에 속한 자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늘에 속하는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엡 1:9).
그 하늘나라에 속하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 명확한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5절).”
흙에 속한 사람들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은 일단 흙으로 돌아가되 하늘에 속한 자로 부활됩니다. 헬라어 아노센(ἄνωθεν)은 “거듭(again)”이란 뜻과 함께 “하늘로부터, 위로부터(from above)"란 뜻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여전히 흙에 속하여 있지만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성령께서 이 사람을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드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되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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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부활의 소망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활의 몸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것인가 바라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삶이 얼마나 축복되고 즐거운 삶인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약삭빠라서 적은 것으로 심고 많은 것을 거두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이러한 것을 그렇게 크게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믿음의 씨앗을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씨앗을 심어놓고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거두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른 자세요 바른 믿음입니다. 불신의 씨를 심어놓은 곳에서는 믿음의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믿음의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생각하는 씨를 심어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하늘에 속한 것을 거둘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믿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마음을 갖고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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