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28, 2013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고전 15:50-58)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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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세 개의 V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합니다(최효섭목사, 「세 개의 V자」).
첫째로, 믿음은 Vision--꿈을 갖게 함으로써 현실에 집착하는 ‘벌레 인생관’을 이기게 합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요셉은 꿈 Vision을 따라 살았기에 형들의 버림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믿음은 Venture--모험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의심을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봅니다. 창세기 12장 1-2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붙잡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판단으로는 분명히 불확실한 지시요 약속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명령이십니까? 여러분은 먼곳으로 이주하실 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길을 떠나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실 곳이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아니면 중국인지 네팔인지도 모르고 다만 하나님의 명령이 그에게 임하였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일생 여정 중에 그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의심이 때때로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의 역시 불확실한 명령이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하는 말씀까지 온전히 순종하였을 때 그의 모험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비검함과 두려움과 의심을 이기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믿음은 Victory--이 세상과 사망을 이기게 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 나라에 입성케 하는 능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시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깃발, 출애굽기 17:15) 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내셨습니다. 아말렉 군대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싸울 때 산에 오른 모세의 양팔을 아론과 훌이 높이 치켜들 때 승리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위시하여서 가나안 땅의 여러 거민들을 정복하는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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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血)과 육(肉)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육신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썩을 것(φθορά)--우리의 변화되지 않은 모습--은 썩지 않을 것(ἀφθαρία)--영원히 불변하는 세계--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몸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도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소망이 썩어지는 이 세상 가운데 마냥 머물러 있지 않고 하늘나라의 것을 생각하고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51-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忽然)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나타날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윤리적 행위에 의해서가 믿음의 있고 없음에 따라서 어떤 영혼은 낙원(Paradise)으로 또 어떤 영혼은 음부(Hades)로 옮겨집니다.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육신의 무너짐과 함께 이미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현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기준에 따르면) 낙원에 영혼으로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때에 함께 강림할 것인데 이때 영혼과 변화된 몸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썩어진 육신이 썩지 않을 몸으로 홀연히 변화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7절에 바울은 그리스도 강림과 함께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들의 순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의 영혼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몸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홀연히 변화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인데,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강림하는 잠자는 자들의 영혼과 몸의 결합이요, 둘째는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자들의 몸의 신령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다가 죽은 자들은 백보좌 심판을 받기 위하여 살아나는 둘째 부활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썩어지는 육체가 부활할 때는 그 육체의 원소(元素)대로 새로운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크리스천들 가운데 혹 우리 육체의 원소(元素)가 흙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온전한 부활의 몸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화장(火葬)하여서 그 재를 강물이나 바다에 뿌리면 부활할 때에 몸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는 분이 있는데 이는 쓸데 없는 염려입니다.
초대교회 크리스천들 중에서 상당수가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형(火刑)에 처해졌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영혼이 장차 임할 하늘나라에서 살기 위한 무너져내리지 않는 처소르 덧입는 것이므로 땅에 속한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화장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동안 입었던 옷을 태우는 것일 뿐입니다.

53절에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불가불”이라고 함은 ‘반드시’란 뜻입니다. 썩을 육체가 그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몸을 입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낙원(Paradise)을 천국(Heaven)--‘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라고도 하지만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청원할 때 그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낙원’은 영혼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낙원에 머무는 영혼은 ‘하나님 나라’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된 곳에 썩지 않을 영광의 몸으로 들어갈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니,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고백을 한 우리 모두가 다 신령한 몸과 영혼으로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이 세상을 살기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밝히 볼 수 없을 뿐입니다.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25장 8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사망의 권세는 더 이상 피조물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망 가운데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뿐 아니라 우리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승리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이길 때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다른 피조물들도 비로소 썩어짐의 종노릇 함에서 해방됩니다.
로마서 8장 19-21절에 “19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55-56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호세아서 1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말씀케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이기는 것이, 사망의 쏘는 것이 ‘죄(罪)’로 말미암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사망의 쏘임을 당하고 그 권세 가운데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죄를 알지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도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우리에게도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우리가 구원함에 이르지 못하고 죄 가운데 놓여있는 자가 분명합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 율법의 말씀하는 바에 따르면 분명히 죄이며 따라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이나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과 율법이 정한 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하여 주셨습니다.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요한일서 5장 4-5절에서 사도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길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마귀의 최고 절대적인 권세인 사망을 이기게 합니다.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권고합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미래의 삶을 바라보는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오늘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살게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장차 영광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이기에 오늘은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아요’가 아닙니다. 오늘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현실’로 임합니다.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합니다.
감당케 할뿐만 아니라 자원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힘쓰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고 하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다만 관념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구원하는 믿음도 역사하는 믿음도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함은 바로 이와같은 관념적인 믿음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요, 능력이 많으신 줄 믿고(=알고) 두려워 떨지만’ 이것이 귀신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우리 삶 가운데 우리의 능력이 되는 믿음은 우리로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힘쓰게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현재의 삶 가운데 승리하게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이 즐겁고 감사합니다.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 여전히 어려움이 많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고난이 임할 수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주위 사람들에게 수치(羞恥)와 조롱(嘲弄)을 당합니다.
해서, 믿음의 삶을 포기하거나 남들이 하는 대로 대충 대충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할 때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했습니다.
‘대충성의 믿음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우리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희미하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지만, 수고를 다한 사람에게 주어질 상급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바울의 유언적인 말씀을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의 삶이 어떠합니까?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습니까?
우리 일생의 믿음의 경주는 마라톤과도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선두그룹을 형성하며 달립니다.
얼마큼 달리다 보면 선두그룹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선두그룹에서 처지는 선수는 ‘내가 조금 천천히 달리다가 원기를 회복하면 다시 선두그룹을 따라 잡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한 번 처지기는 쉽지만, 한 번 처진 사람이 다시 선두그룹을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라톤도 그렇지만 단거리와 중장거리의 경주에서 처음에 스타트를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여 선두그룹을 형성하여야지만 상위권 입상이 가능합니다.
‘내가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다가 다른 선수들이 기력을 잃으면 그때 다 따라잡아야지’ 하는 사람은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천천히 달린다고 기운이 소모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덜 소모될 것이지만 나중에 앞서가는 선수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 위에 매일 매일 연습하는 선수들을 제치고 연습도 않고 경기 당일에 출전하는 선수가 승리하기란 불가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승리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모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승리하여야 할 것인데, 이는 우리의 상대가 죄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음은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서 그를 의지하는 자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오늘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하여 믿음의 경주를 감당하심으로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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