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의 비유” (마태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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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오랫동안 자기 집에서 일을 해온 하인들에게 가늘고 길게 새끼줄을 꼬라고 명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쉬지 않고 열심히 꼬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고지식한 하인 하나는 주인의 말에 따라 낮에도 밤에도 쉬지 않고 새끼줄을 가늘고 길게 꼬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하인들은 주인의 돌아올 날이 멀다고 생각하여서 노름하고 술 마시는 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몇 달이 지났을 때, 주인이 얼마 안 있으면 돌아온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이제까지 진탕 마시고 놀던 하인들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해서, 새끼줄을 찾아 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조급하므로 가늘게 꼴 여유는 없고 무조건 길게만 늘여갔습니다. 그들의 새끼줄은 거칠고 굵은 것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주인이 돌아와서 하인을 불러모았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른 대로 새끼줄은 잘 꼬았겠지?!” “예!” 대부분의 하인들이 주인이 새끼줄을 검사하면 어떡하나 불안하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큰소리로 대답하고 봅니다. 주인은 말을 이어갑니다. “그동안 너희들이 내 집에 와서 여러 가지로 수고가 많았다. 이제 너희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는데, 이제 광에 가면 동전들이 있을 터인데 그 동전들을 너희가 가늘고 길게 꼰 새끼줄에 끼어가거라. 그것이 너희가 내 집에서 수고한 대가(對價)이니라.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는 동전을 갖고 갈 수 없다.” 고지식하여 주인이 지시한 대로 가늘고 길게 새끼줄을 꼰 하인은 그의 긴 새끼줄에 동전을 꿰어서 커다란 부자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하인들은 그들의 게으름의 삯으로 한 잎의 동전도 꿰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따름이었습니다.
TV 연속극에 출연하여 연기하는 사람을 탈렌트(Talent)라고 합니다. 또 재주나 재능이 많은 사람을 탈렌트가 많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달란트’도 이와 같은 뜻인데, 헬라어 탈란톤(τάλαντον)에서 나왔습니다.
달란트는 무게나 화폐의 단위였는데. 한 달란트는 3,000 쉐켈(Shekel) 혹은 6,000 드라크마(Drachma)에 해당합니다 (은 한달란트는 57.75 파운드로 6,000 드라크마의 무게에 해당함).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물고기 뱃속에 있는 한 쉐켈을 취하여 예수님과 베드로의 몫의 세금을 내라고 하신 것을 보면, 3,000 쉐켈에 해당하는 한 달란트가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님을 쉽게 짐작케 합니다..
그 당시 일군의 하루품삯이 한 데나리온(denarion)인데 한 달란트는 5,000-6,000 데나리온에 상당하는 금액이므로 정상적인 일군의 17-20년 품삯입니다. 현재 달러가치로 환산하면 40-50만 불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2
14절에 예수님께서 비유(比喩)로 말씀하실새,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하십니다.
어떤 사람, 곧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주인의 소유(所有)를 맡은 종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인이 부르시고, 피값을 지불하고 사신 바 되고, 주인의 일을 위해 고용되고,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주인 되신 그리스도는 그 종들을 게으르고 나태한 상태로 버려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인은 주인의 부재시에 종들이 할 일을 남겨두었습니다.
종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주인으로부터 받습니다.
종들이 달란트를 받은 것도 주인을 위해서 경영(經營)하기 위함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김은 “타국에 갈제--먼 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 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그가(=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인이 타국에 갈제”는 그리스도께서 잠시 종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꼐서 하늘로 올리우실 때, 주님의 몸되신 교회와 성도들에게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하여 은사(恩賜)라고 하는 달란트를 선물(膳物)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의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목사의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교사로서 가르치는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구제하고 봉사하는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성가대원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달란트를...
각 성도의 재능(才能)에 따라 각기 다른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는 부요(富饒)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께서 생명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바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달란트는 또한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시간(時間)과 재물(財物)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재물이 내것인 것 같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 사용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도 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청지기로서 주님께서 맡기신 주님의 재산을 관리할 따름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0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는 은사(恩賜)요 또한 은혜(恩惠)입니다.
이 종은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또한 청지기(οἰκονόμος)라고 불립니다. 청지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는 “집을 관리(管理)·경영(經營)하는 자“란 뜻입니다. 현대어 번역으로는 ”economist"입니다.
종--청지기는 자기 소유를 돌보는 것 이상으로 주인이 맡긴 주인의 소유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청지기는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경영할 것이요,
겉으로는 그런척했지만 속으로부터 사랑하지 않은 청지기는 주인의 부재시에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대신에 자신의 이를 위해서 불의하게 주인의 재산을 탐할 것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다른 달란트도 주님을 위해서 경영하는 대신에 전혀 경영치 않거나, 혹은 자신을 위해서 불의하게 경영할 것입니다.
주인을 위해서 경영하는 사람은 주인의 영광과 기쁨만 구하는데, 자신을 위해서 경영하는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만족을 구합니다.
자기 것을 잘 경영하는 사람을 보고 “착하고 충성되다”고 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것인줄 알면서도 이를 잘 경영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합니다.
15절에 “그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길 때 각각 그 재능(才能)대로 맡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재능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보다는 모릅니다. 해서, 우리의 맡은 바에 대해서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사 혹은 선물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잘 관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재능에 비해서 너무 가벼운 것도 아니요 너무 부담스러운 것도 아닌 적당한 분량입니다.
16-18절에서 우리는 세 종의 다른 경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종 중 두 종은 맡은 달란트를 잘 경영하였음을 봅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신실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바로 갔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맡기신 일을 경영함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지체함이 없습니다.
“장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하는 영적(靈的)인 장사는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잘 섬기거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이 장사에서 성공하여 추가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를 맡았던 종도 그리하여 추가로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는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을 시기하지 않고 주인이 그의 능력을 따라 그에게 맡긴 두 달란트를 기쁨으로 잘 경영하였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자는 땅을 파고 그 돈을 감추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주인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자기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서는 무언가 부지런히 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 달란트가 결코 적지 않은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이 악한 종의 마음에는 시기와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은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다른 종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달란트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19절 이하는 오랜 후에 돌아온 주인이 종들과 회계(會計)하는 장면입니다.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는 종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디 오는 것 같음은 교회봉사와 복음증거의 사명을 맡은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를 경영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시기 위한 주님의 오래참으심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8-9절에서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는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회계할 때에,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종이 주인에게 고합니다: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이 종은 먼저 감사한 마음으로 주인이 그에게 준 다섯 달란트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는 그가 받은 은혜를 기억함이며 그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는 그의 부지런함을 보여줄 것입니다.
에베소서 5:15-17에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합니다.
주인은 21절과 23절에서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남긴 종을 똑같은 말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은 먼저 종을 칭찬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런 다음 두 가지로 상급을 주겠다고 합니다.
첫째는 “많은 것으로 맡기겠다“고 말씀합니다.
200만불이 넘은 다섯 달란트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지만, 장차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의,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과 천국에서의 삶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둘째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당한 모든 수고와 고통은 그칠 것이며 우리의 눈물은 씻겨질 것입니다.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이 그의 충실한 종이긴 하지만 그의 상속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그의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공동상속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받습니다.
24-25절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은 그 자신을 변명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는 자신의 시기하는 마음과 게으름을 인정하는 대신에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고 탓합니다.
26-27에서 주인은 그 게으른 종을 꾸짖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며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있는 종에게 주고 그는 어두운 데로 내어 쫓습니다.
3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만일 장사를 하여 한 달란트를 남겼다면 주인은 그를 다른 두 종과 함께 동일한 칭찬으로 칭찬하고 상급을 약속했을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남기지 못하고 게으름으로 두 달란트만 남겼다면 그에게 임하는 주인의 칭찬은 아마도 두 달란트를 받아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보다 적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가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연약하고 재주도 없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너무 비하(卑下)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약한 성도도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시간과 여력이 있습니다.
한 난쟁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거꾸로 서서 공을 굴리는 재주를 보여주며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 잎으로 그 날 그 날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구경꾼에 둘러 쌓여 이 난쟁이가 공 굴리는 장면을 지켜보던 한 수도승이 그를 불쌍히 여겨 수도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에게 따뜻한 음식도 먹게 하고 잠자리도 제공합니다. 수도승이 길거리에서 본 난쟁이는 구경꾼이 놀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잘 웃음으로 대꾸하던 사람인데 수도원에 들어온 후에는 말수도 적어지고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승은 난쟁이의 얼굴에 다시 웃음과 생기가 도는 것을 보고 속으로 무척 반가왔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이 그에게 다시 이와 같이 생기와 웃음을 주게 되었는가 궁금하여 그의 행동을 주시해 보았습니다. 난쟁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제단 앞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난쟁이는 예수님의 상을 향해 말합니다. “예수님, 저에게는 별 다른 재주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재주가 있는데, 거꾸로 서서 공 굴리는 재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의 이런 재주로 곧잘 즐거워한답니다. 주님께도 저의 재주를 보여드려 주님을 즐겁게 해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난쟁이는 거꾸로 물구나무서서 공을 발에 올리고는 본당을 그렇게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지칠 때까지 돕니다. 그리고는 다시 예수님 십자가상 앞에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내려오셔서 난쟁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해주었다. 네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함을 내가 아느니라” 말씀할 때, 지친 이 난쟁이는 그 말씀으로 얼굴에 생기가 나고 기운이 절로 샘솟음을 느낍니다. 난쟁이는 매일매일 반복하여 그의 공 굴리는 재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재주에 금방 식상해하시며 따분해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늘 기뻐 받으십니다.
십 년째 병상에 누워있는 연로하신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권사님은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기한이 다 된 줄 아시고 목사님을 부릅니다. 목사님이 권사님이 누워있는 병상에 이르렀을 때, 권사님은 간신히 나오는 작은 목소리로 목사님의 귀에다 대고 말씀합니다. “목사님, 내가 이제 얼마 못살 것 같으니 나를 대신하여 교회를 위해서 매일 기도할 교우 한 사람을 구해봐요.” 목사님은 자신이 목회를 잘 하여서 교회가 평안하고 잘 성장하는 줄 알았는데, 이와 같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이 병상에만 누워 계신 노 권사님의 기도로 교회가 잘 되어나간 줄 알고 다시 한 번 권사님께 감사하고, 할 마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교회를 위해서 그의 가진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크고 작은 달란트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별 것 없이 보이는 재주일지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칠 때, 사람들은 인정하여 주지 않을지라도 주님은 인정하시며 기뻐 받으십니다.
교회의 직분자로, 혹은 직분을 맡지 않은 가운데라도 우리의 가진 바 각기 다른 달란트를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고 이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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