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 (마태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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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집 문을 두드리는 몰몬교에 속한 사람이나 여호와의 증인에 속한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우리 소위 “정통 교회”에 속한 사람이 갖고 있지 못한 열심을 봅니다. 그 사람들은, “목사”라고 하는데도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집집을 두드리는 이유가 그들의 “기독교”를 전하고자 함이라면 믿는 사람의 집은 지나쳐가야 할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기존의 믿는 사람도 그들이 생각하는 소위 “바른 믿음”을 갖게 하고자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의 믿음도 바로 잡아줄 수 있다는 확신이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통일교에 속한 일본목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게이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대학졸업 후 통일교에 매력을 느끼고 통일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미국에 통일교에 속한 선교사로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하여 왔다고 합니다. 통일교 지도층이 미국선교에 요즈음은 한국사람 보다 일본사람을 더 많이 활용하고자 하는데, 이는 미국사람들이 한국사람보다는 일본사람들 말을 더 귀담아 듣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통일교의 활동상황을 물었더니, 통일교가 지식인층 사이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있다고 하며 각 대학 캠퍼스에서 가장 큰 기독서클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유명대학마다 200-300명의 통일교 학생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기성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목사나 일반성도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이 바른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들은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나 기타 다른 이단 종교에 속한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믿음이라고 자부하는 것들과 하나님을 믿는 바른 자세라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다만 사상누각(砂上樓閣)이요 우리는 입을 벌려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도 못하고 그가 중심이 되는 그가 명하신 삶을 살고있지도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입으로만 정통교리를 믿는 정통교회에 속한 정통 신앙인일 뿐입니다. 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는 잘하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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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장 전체를 예수님은 그 당시 정통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나무람으로 채우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만큼 정통적 유대인이 없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유대인입니다. 바울도 그의 바리새인됨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빌립보서 3:4) 유대교의 지도자들 중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만큼 모세의 율법이나 장로회의 유전에 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종교적 최종판결을 하는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행하는 율법은 그들의 자랑을 위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이신데 그들이 하는 행동은 무소부재하시며 항항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의식(意識)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우리들의 하는 행동도 이에서 나을 것이 없음을 압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 역시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믿음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돌이켜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때는 전혀 믿음 없는 사람의 행동을 하다가 교회의 아는 사람 앞에서만 믿는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직분자들인데, 또 기도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를 하는데, 그들 앞에 놓인 문제를 결정할 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마음으로 세상사람들의 결정을 내립니다.
오늘 본문 다음의 23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일곱 가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화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化身)인줄 알았는데 23장만을 읽어보면 전혀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누룩이 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선(善)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단적으로 교훈하심입니다. 1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16절에,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5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게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7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灰漆)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9-31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해서, 예수님께서는 33절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혹독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그들의 행동이, 때로는 말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것을 본받지 말라 하지 않으시고 3절에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행동에 있지 말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16절에 성전으로 맹세한 것을 지키라 하지 않고 성전의 금으로 맹세한 것은 지켜야 된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만.
목사나 장로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의 문제도 이러한 것이라고 봅니다. 자신은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4절에,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아니하며” 합니다.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5:3에서,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십니다.
또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고 입으로는 얘기하면서, 그들의 삶은 기실 세상중심적, 자기중심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7절에,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經文)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하십니다.
그들의 옷 가장자리에 써넣는 경문은 주로 모세의 율법서 중에 출애굽기(13:2-11; 13:11-16)와 신명기(6:4-9; 11:13-21)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신명기 6:4 이하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되어있습니다.
우리들도 어떤 작정한 일, 행하기 힘든 일을 할 때, 책상머리에, 방벽에 구호를 써붙입니다. “필승!” 이라든지 “금주, 금연”이라든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은 그들이 옷술에 경문을 더 많이 써넣기 위하여 옷술을 넓힌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와 같이 많은 경문을 써넣은 것이 그것을 보며, 기억하며, 행하고자 함이 아니요 사람에게 드러내고자 함인 까닭입니다. 또, 그들이 써넣은 것을 잘 지키지 못하여 나무란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는 그 경문대로 사는 것처럼 과시하지만 돌아서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그들의 이중인격을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족하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합니다. 해서, 그럴 때마다 더욱 하나님께 매어달리며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여야 할 것인데,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뻔뻔스럽게 사람 앞에서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산 것 처럼 말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도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해서, 그들의 삶의 모든 모습과 마음까지도 아시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겸손의 삶인데 이 사람들은 잔치에 참여하여서도 스스로 상석(上席)에 앉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도 스스로 상좌(上座)를 차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장터를 지날 때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문안인사를 올리는 것을 좋아하고, 율법을 해석하는 권위의 칭호인 “랍비(rabbi)”란 칭함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8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라” 말씀하십니다. 선생도 하나이요, 권위를 상징하는 또 율법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도 한 분이라고 하시는데 바로 하늘 아버지란 말씀입니다.
지도자도 한 분인데, “선생님,” “주님”에 해당하는 지도자, 카세네테-스(καθηγητής)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그 분의 뜻과 권위 하에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잘 경영하여, 봉사하고 충성하는 섬기는 자,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들입니다. 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일군은 집사라 번역되기도 하는데, 해서 ‘집사’란 호칭은 매우 축복적인 칭호입니다.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이는 세상의 기준과 예수님의 기준이 다른 까닭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이지 ‘섬기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설적(paradoxical)인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자의 삶을 사는 사람을 주님께서 높이시겠다”고 하십니다.
3
우리의 믿음이 말뿐인 것입니까? 우리에게 믿음의 외적 표현--곧 열매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매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처럼의 선행에 나팔을 불고 다닐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며 우리의 은밀한 것도 밝히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 같이, 우리 자신을 낮추고 비어 섬기는 자,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일군의 삶을 살아가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외식(外飾)하는 모양으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겸허한 모습으로 믿음의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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