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과 부활 신앙” (마태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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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전반을 산 교부 신학자 가운데 터툴리안(Tertullian)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육신(The Flesh of Christ)이라고 하는 책에서 수사학적으로 말하기를,
The Son of God was crucified. I am not ashamed, because it is shameful.
The Son of God died. It is credible, because it is absurd.
He was buried and rose again. It is certain, because it is impossible.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나는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이기에 믿을만합니다.
그가 장사지낸 바 되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수치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 장사지낸 바 된 자가 부활함은 불가능한 일인데도 이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는 사건을 증거하는 제자들의 죽음도 불사하는 무모한 담대함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후에 사단이 인간의 마음 가운데 죄의 씨를 심어놓았는데,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서 우리의 본래 하나님을 닮아 지어진 마음들을 시험하고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마음(faithfulness)을 닮아 우리에게 원래 믿음(faith)의 마음이 있었는데 사단이 의심 혹은 의혹의 씨를 뿌려놓은 까닭에 우리는 내가 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은 것을 믿지 않습니다. 설마?! 내가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믿어. 심지어는 내가 보고 경험한 일인데도, 세월이 지나면서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가면서 그 당시 내가 본 것이 사실이었던가 의심하게도 됩니다.
여러분 중 한때에는 뜨거운 믿음, 체험적인 믿음을 소유하였었는데, 이민생활이 고달파 아니면 이민생활이 너무 편안하여 그냥 그렇게 지내시다가 전에 처음 예수님 믿고 체험하였던 아름답고 귀한 경험들을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아예 불신앙의 마음으로 습관적으로 교회생활을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교회에 다닌 지가 꽤 되는데도 그리스도를 체험하기는커녕 하나님께 기도 한번 변변히 드려보지 못하고 기도는 드려봤지만 한번도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시고 답답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의심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지상생애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가 과연 오늘까지 존재하였을까요?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들은 다만 다른 성인들의 말씀과 같이 교훈적인 것으로 학교의 윤리시간에 참고문헌 정도는 되었을지언정 그의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들의 목숨까지도 바쳐서 전하고자 하는 사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망한 마음으로 뿔뿔히 흩어져서 공친 3년여 세월을 한탄하며 좌절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갔을 것입니다.
2
1절에,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되어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은 새벽 6시가 되어가는 시간입니다. 유대인의 하루의 시작은 새벽 6시를 0시라 하여 이 때부터 시작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예수님의 육적 동생 야고보의 어머니 곧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안식일에는 특별히 일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는 터라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새벽 6시가 되려는 무렵에 급히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이들이 무덤으로 급히 달려간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함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실망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였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이른 대로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2절에 보니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큰 지진이 나고 주의 천사가 내려옴은 하나님의 현현(顯現: epiphany)이십니다. 아들 그리스도를 일으키시고 천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려 주시고 그들이 무엇을 해야할지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입니다.
형상이 번개같고 눈같이 흰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나매 무덤을 지키는 자들이 무서워 떨며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파수꾼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워 떨고있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5-7절에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합니다.
첫째로, “무서워 말라” 말합니다. ‘무서워함’은 불신앙의 마음이므로 이를 먼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이 사태에 여자들도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만일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 하신 말씀을 조금이라도 귀담아 마음에 새겨들었었다면 이것이 전혀 예상치 않은 사태가 아니었을 터이지만, 그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도 못했고 또 질문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말씀하셨고, 요나의 표적을 보이시리라 하셨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제자들과 지내신 며칠동안도 자신의 죽음과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세상적인 기대와 소망에 들떠있던 제자들에게는 전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요나의 표적을 보이심은 요나가 물고기에 삼킨 바 되고, 음부와도 같은 물고기 뱃속에 사흘을 머문 것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음부에 사흘동안 머무시고 요나가 사흘이 지나서 마른 땅에 토해내진 것과 같이 예수님도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둘째로, 천사가 여자들에게 명할 때, “와서 보라” 합니다. 천사가 하는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신 대로 살아나셨으므로 죽은 자가 있어야 할 곳에 계시지 않음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빨리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셔서 죽은 자들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음을 확인한 사람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전할 소식은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 주님이 부활하셨다”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고난 당하시기 전 마태복음 26장 2절에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중 아무도 이 말씀을 귀담아 들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그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8절에 여자들은 빈 무덤을 뒤로하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여전히 무섭고 한편으로는 천사의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에 기쁨이 있어 달려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다시 기쁨과 소망이 생긴 여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사말을 건네십니다: “평안하뇨?”
천사의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반신반의하는 여인들에게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시고,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평안하뇨?” 하심은 인사말이기도 하지만, 헬라어의 뜻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말씀한 대로, “기뻐하라”(χαίρετε)는 명령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에 아직도 의혹과 무서움이 있음을 아시기에, 믿음을 가지고 “기뻐하라”(rejoice)고 인사말을 건네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우리에게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가 낙담하고, 좌절하고, 근심하고 무서워함은 아직도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는 한 것 같은데 긴가 민가 의심함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천사가 여인들에게 이미 한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심은 무슨 의미입니까?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어떤 장소입니까?
구약의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모세를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듯이,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어부였던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들”로 부르셨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닝을 처음 만난 장소요 부르심의 장소입니다. 이제 다시 그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심은 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인간이 갖는 무서움과 두려움의 근본은 세 가지--죄, 죽음과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근본적으로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나의 죄와 허물을 사해주시기 위해서였음이 믿어질 때, 나에게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온전히 사해주시는 권세가 주님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그전에는 죽음이 두려워 항상 죽음을 피하는 삶을 살려다 보니 오히려 죽음이 더욱 생각나고 겁쟁이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에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죽음 자체도 두렵지만 죽음 다음에 어떤 세계가 우리 앞에 전개될지 우리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가 확실한 것이 될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불공평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좌절하고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다만 우리가 잠시 잠깐 머물다 지나가는 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확실성을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우리도 부활하고 예수님께서 낙원에 이르신 것 같이 우리도 낙원에 들어갈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과 몸으로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몸으로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만의 부활로서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음을 가리킨다라고 하든지 혹은 그리스도의 영이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함을 의미한다라고 그럴듯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몸으로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살아나셨고, 이를 믿는 믿음이 부활신앙이며,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권능을 받고 담대하게 나가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논리와 과학의 범주 밖에 계신 분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종종 하나님을 제한시켜놓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을진데 더 이상 무슨 증명이 필요합니까?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에게 나타나시고, 열한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사십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면서 많은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실 때에 오백여 성도가 일시에 이를 지켜 보았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더 이상의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저는 예수님 부활 후에 나타난 “제자들의 삶의 변화”가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예수님이 아직 살아계셔서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 3년여 긴 세월을 주님을 따라다닌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란 세상에서의 출세요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그들이 변화하였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실망과 좌절의 마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여인들의 말을 전해들었을 때에도 그들의 삶은 변화되지 못하였습니다.
갈릴리로 가기 전 아직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한 두차례 나타나셨지만, 반신반의하는 그들 가운데 여전히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긴 갔지만, 그들이 한 일이란 한 곳에 모여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리는 대신에, 옛 직업으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 삶의 변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머무시면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다시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실 때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단지 유령이 아니요 실제적인 사건인 것을 그들이 확실히 경험할 때, 그들의 삶은 180도 변화된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만을 생각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주님을 생각하게 되고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주님이 잡혀 죽음을 당하던 말던 나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도망치던 자들이었는데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그들도 부활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생각하던 것이 땅의 것인데 이제는 하늘의 것이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보다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게 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3절에 말씀할 때, “내가 육신으로 이 땅에 사는 것과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중 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육신으로 사는 것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육신에 거하고 있는동안 주님께서 우리로 감당할 일이 무엇임을 압니다.
부활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의심과 불확실의 무서움을 벗게하고, 주님 안에서 기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우리 주위사람들에게 전하게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만났는데,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같이 우리도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 확실한 데 그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주위에 전하며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라!” 인사 나누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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