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과의 만찬” (누가 2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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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The Da Vinci Code」와 동일 제목으로 제작한 영화가 미국 뿐 아니라 한국과 다른 나라들의 기독교계를 강타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책 속에서 그가 새로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란 학계에서는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시온 수도회(Priory of Sion)의 수장이었던 다빈치가 그의 그림들을 통하여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있던 비밀을 후대에 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 중에 예수님 오른 편에 위치한 사람은 이제까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요한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로서 예수님과는 비밀의 혼인관계에 있던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에 있었고, 그는 프랑스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딸을 낳았고 이제까지 예수님의 후손들이 생존하는데, 카톨릭의 비밀 결사단체인 오푸스 데이(Opus Dei)에 속한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후손들을 살해하고 또한 예수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시온 수도회의 사람들도 죽이고자 했다고 주장합니다.
댄 브라운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혼인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1945년에 이집트의 나그 하마디(Nag Hammadi) 동굴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학서들 중에 도마복음(The Gospel of Thomas)과 마리아복음(The Gospel of Maria)의 내용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도마복음과 마리아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도마복음이나 마리아복음이 주장하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남자 제자들보다 막달라 마리아를 더 사랑하셔서 그들에게는 가르쳐 주시지 않은 영지라고도 하는 비밀스런 가르침을 마리아에게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댄 브라운은 두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하셨다는 대목을 혼인관계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사실인 것처럼 소설화한 것입니다.
2-3세기의 정통교회에서는 여자는 구원의 대상이 아닌 까닭에 여자는 세례도 받을 수 없고 성찬에도 참여할 수 없고 교회의 직분은 더욱이 가질 수 없다고 한 반면, 영지주의자들의 교회는 남녀가 평등하게 세례와 성찬을 받고 또한 여자도 교회의 감독직분을 맡을 정도로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댄 브라운은 또 주장하기를 4세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가 기독교를 국교화하기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2-3세기의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그저 ‘인간 예수’요 ‘위대한 선생’에 불과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하나님’으로 칭하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얼마나 초대교회사에 문외한(門外漢)인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돌팔이 지식인으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정경화 작업(현재와 같이 신약성경이 27권으로 정착된 것)이 완성된 것은 4세기이지만, 사도시대 이후 속사도 시대인 일세기 말부터 복음서들과 바울의 서신들이 끊임없이 속사도들과 교부들에 의하여 인용되고 그들의 인용에서 이미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1세기말의 로마의 감독인 클레멘트(Clement)의 글에서, 2세기 초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나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Polycarp)의 고백, 2세기 말의 리옹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 2세기 말 3세기 초의 교부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의 증언들에서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인간적인 사랑을 하였다던가, 결혼을 하였다는 주장들은 20-21세기에만 주장되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반크리스천, 자유신학자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제기된 것으로 그 기원은 1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몰몬교도들이 일부다처를 실시하던 근거도 기실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과 사실적 혼인관계에 있었다고 믿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초대 교회 당시 또다른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사실은 그가 아주 죽은 것이 아니고 못박힌 손과 창에 찔린 허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이지만, 제자들과 여인들이 로마병정들에게 뇌물을 주고 예수님을 사해 근처 쿰란(Qumran)의 한 동굴로 그를 옮기고 치료 후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노후까지 자녀들을 낳으며 살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후 현재까지 모든 그릇된 주장들은 어느 곳에도 그 근거가 없는 허황된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정경이든지 위경이든지 어느 단초가 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희안한 주장들을 내놓을 뿐입니다.
2
7-8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일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레위기 23장 4절 이하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절기 규례를 보면, 유대인 달력으로 정월(아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다음날인 십오일부터 이십일일까지 일주일 동안은 무교절로 지켰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은 무교절의 시작을 알리는 첫날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여주심에 감사하고 무교절일 동안에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음으로 그들 가운데 죄를 몰아내고 흠 없는 살기로 결단함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새끼를 끌어오게 하신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을 예비하심에도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어 유월절을 예비하게 하십니다.
9-13절: 여짜오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주인에게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내로 들어가서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볼 때, 예수님의 지시는 매우 구체적이십니다.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미리 보시는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가 예수님이 그러시는데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인데 거기서 유월절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하니 모든 것이 그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14-16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유월절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비감함이 있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실 시각이 다가옴을 잘 아시기에 이것이 제자들과 나누는 마지막 만찬이 될 것에 만감이 교차하십니다.
제자들과는 마지막으로 나눌 유월절 저녁식사가 될 줄 아시기에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7-18절: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누가복음의 기록은 마태복음(26:17-29)과 마가복음(14:12-25)의 기록과는 달리 잔을 나눠주심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정식 유월절 식사시에는 잔을 나눔이 네 번 반복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잔을 나누시고 마지막 네 번째 잔을 나누실 때 그의 새 언약을 선포하십니다.
17절의 잔을 나눔은 첫 번째 잔을 나눔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잔 나눔은 기록에서 생략되었고 네 번째 잔 나눔이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식은 첫 번째부터 세 번째는 생략하고 네 번째 잔 나눔--곧 예수님께서 자신의 새 언약을 선포하심만 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16절에서 하신 말씀을 약간 바꾸어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19절: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떡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의 몸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몸은 그가 말씀하신 대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먹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 만나의 상징입니다.
요한복음 6장 32-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절).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추모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고인(故人)에 대한 생각--그가 생전에 베픈 사랑과 덕담을 나누는 정도의 일을 말씀함입니까? ‘그래,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 선한 일들을 하셨지.’ ‘3년여 짧은 공생애기간동안 그가 이룬 일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어.’ ‘하기에, 그는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의 4대 성현(聖賢) 중에 한 분이 되셨지.’ 이렇게 ‘예수님의 지상 행적을 단편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예수님을 기념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심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기억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자의 삶입니다.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잔(포도주 혹은 포도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관계(New Covenantal Relationship)에 들어가는데, “새 언약”은 그리스도 피의 효력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입니다.
즉,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와 허물을 사함 받기 위하여 매번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었는데,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과거 죄와 현재 죄 뿐만 아니라 미래 죄까지 다 사함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21-23절: 그러나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유월절의 만찬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됩니다.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응하는지 보기 원하여서 예수님을 파는 일을 자청하였을 수도 있고, 예수님이 한계상황에서 정치적 메시아로 임하실 것을 기대하여서 예수님을 팔고자 했을 수도 있고, 요한이 증언하는 대로 저는 도적이라 돈이 탐나서 예수님을 팔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팔므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무효화시켰습니다 (혹은 그가 제자로 불리움을 받았지만 구속의 은혜에서 처음부터 제외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가룟 유다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예수님의 신임을 얻어 돈궤를 맡았었고, 메시아의 임함을 누구보다도 기다리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성찬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참예하였지만, 예수님을 팔므로 그의 모든 수고와 행함이 헛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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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 흘려주심은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구원하여 주시기 위한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보혈의 은혜를 얻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그의 사역을 부인하거나, 십자가의 효력을 부인하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놓인 자의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예하시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신 십자가를 온전히 바라봅니까?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실 때마다 더욱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Sunday, March 31, 2013
Thursday, March 28, 2013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고전 15:50-58)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고전 15:50-58)
1
믿음은 세 개의 V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합니다(최효섭목사, 「세 개의 V자」).
첫째로, 믿음은 Vision--꿈을 갖게 함으로써 현실에 집착하는 ‘벌레 인생관’을 이기게 합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요셉은 꿈 Vision을 따라 살았기에 형들의 버림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믿음은 Venture--모험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의심을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봅니다. 창세기 12장 1-2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붙잡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판단으로는 분명히 불확실한 지시요 약속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명령이십니까? 여러분은 먼곳으로 이주하실 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길을 떠나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실 곳이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아니면 중국인지 네팔인지도 모르고 다만 하나님의 명령이 그에게 임하였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일생 여정 중에 그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의심이 때때로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의 역시 불확실한 명령이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하는 말씀까지 온전히 순종하였을 때 그의 모험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비검함과 두려움과 의심을 이기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믿음은 Victory--이 세상과 사망을 이기게 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 나라에 입성케 하는 능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시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깃발, 출애굽기 17:15) 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내셨습니다. 아말렉 군대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싸울 때 산에 오른 모세의 양팔을 아론과 훌이 높이 치켜들 때 승리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위시하여서 가나안 땅의 여러 거민들을 정복하는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2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血)과 육(肉)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육신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썩을 것(φθορά)--우리의 변화되지 않은 모습--은 썩지 않을 것(ἀφθαρία)--영원히 불변하는 세계--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몸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도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소망이 썩어지는 이 세상 가운데 마냥 머물러 있지 않고 하늘나라의 것을 생각하고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51-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忽然)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나타날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윤리적 행위에 의해서가 믿음의 있고 없음에 따라서 어떤 영혼은 낙원(Paradise)으로 또 어떤 영혼은 음부(Hades)로 옮겨집니다.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육신의 무너짐과 함께 이미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현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기준에 따르면) 낙원에 영혼으로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때에 함께 강림할 것인데 이때 영혼과 변화된 몸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썩어진 육신이 썩지 않을 몸으로 홀연히 변화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7절에 바울은 그리스도 강림과 함께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들의 순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의 영혼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몸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홀연히 변화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인데,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강림하는 잠자는 자들의 영혼과 몸의 결합이요, 둘째는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자들의 몸의 신령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다가 죽은 자들은 백보좌 심판을 받기 위하여 살아나는 둘째 부활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썩어지는 육체가 부활할 때는 그 육체의 원소(元素)대로 새로운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크리스천들 가운데 혹 우리 육체의 원소(元素)가 흙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온전한 부활의 몸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화장(火葬)하여서 그 재를 강물이나 바다에 뿌리면 부활할 때에 몸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는 분이 있는데 이는 쓸데 없는 염려입니다.
초대교회 크리스천들 중에서 상당수가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형(火刑)에 처해졌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영혼이 장차 임할 하늘나라에서 살기 위한 무너져내리지 않는 처소르 덧입는 것이므로 땅에 속한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화장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동안 입었던 옷을 태우는 것일 뿐입니다.
53절에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불가불”이라고 함은 ‘반드시’란 뜻입니다. 썩을 육체가 그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몸을 입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낙원(Paradise)을 천국(Heaven)--‘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라고도 하지만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청원할 때 그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낙원’은 영혼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낙원에 머무는 영혼은 ‘하나님 나라’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된 곳에 썩지 않을 영광의 몸으로 들어갈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니,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고백을 한 우리 모두가 다 신령한 몸과 영혼으로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이 세상을 살기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밝히 볼 수 없을 뿐입니다.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25장 8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사망의 권세는 더 이상 피조물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망 가운데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뿐 아니라 우리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승리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이길 때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다른 피조물들도 비로소 썩어짐의 종노릇 함에서 해방됩니다.
로마서 8장 19-21절에 “19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55-56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호세아서 1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말씀케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이기는 것이, 사망의 쏘는 것이 ‘죄(罪)’로 말미암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사망의 쏘임을 당하고 그 권세 가운데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죄를 알지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도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우리에게도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우리가 구원함에 이르지 못하고 죄 가운데 놓여있는 자가 분명합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 율법의 말씀하는 바에 따르면 분명히 죄이며 따라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이나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과 율법이 정한 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하여 주셨습니다.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요한일서 5장 4-5절에서 사도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길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마귀의 최고 절대적인 권세인 사망을 이기게 합니다.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권고합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미래의 삶을 바라보는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오늘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살게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장차 영광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이기에 오늘은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아요’가 아닙니다. 오늘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현실’로 임합니다.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합니다.
감당케 할뿐만 아니라 자원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힘쓰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고 하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다만 관념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구원하는 믿음도 역사하는 믿음도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함은 바로 이와같은 관념적인 믿음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요, 능력이 많으신 줄 믿고(=알고) 두려워 떨지만’ 이것이 귀신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우리 삶 가운데 우리의 능력이 되는 믿음은 우리로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힘쓰게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현재의 삶 가운데 승리하게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이 즐겁고 감사합니다.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 여전히 어려움이 많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고난이 임할 수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주위 사람들에게 수치(羞恥)와 조롱(嘲弄)을 당합니다.
해서, 믿음의 삶을 포기하거나 남들이 하는 대로 대충 대충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할 때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했습니다.
‘대충성의 믿음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우리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희미하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지만, 수고를 다한 사람에게 주어질 상급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바울의 유언적인 말씀을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의 삶이 어떠합니까?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습니까?
우리 일생의 믿음의 경주는 마라톤과도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선두그룹을 형성하며 달립니다.
얼마큼 달리다 보면 선두그룹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선두그룹에서 처지는 선수는 ‘내가 조금 천천히 달리다가 원기를 회복하면 다시 선두그룹을 따라 잡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한 번 처지기는 쉽지만, 한 번 처진 사람이 다시 선두그룹을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라톤도 그렇지만 단거리와 중장거리의 경주에서 처음에 스타트를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여 선두그룹을 형성하여야지만 상위권 입상이 가능합니다.
‘내가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다가 다른 선수들이 기력을 잃으면 그때 다 따라잡아야지’ 하는 사람은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천천히 달린다고 기운이 소모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덜 소모될 것이지만 나중에 앞서가는 선수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 위에 매일 매일 연습하는 선수들을 제치고 연습도 않고 경기 당일에 출전하는 선수가 승리하기란 불가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승리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모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승리하여야 할 것인데, 이는 우리의 상대가 죄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음은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서 그를 의지하는 자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오늘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하여 믿음의 경주를 감당하심으로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믿음은 세 개의 V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합니다(최효섭목사, 「세 개의 V자」).
첫째로, 믿음은 Vision--꿈을 갖게 함으로써 현실에 집착하는 ‘벌레 인생관’을 이기게 합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요셉은 꿈 Vision을 따라 살았기에 형들의 버림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믿음은 Venture--모험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의심을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봅니다. 창세기 12장 1-2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붙잡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판단으로는 분명히 불확실한 지시요 약속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명령이십니까? 여러분은 먼곳으로 이주하실 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길을 떠나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실 곳이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아니면 중국인지 네팔인지도 모르고 다만 하나님의 명령이 그에게 임하였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일생 여정 중에 그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의심이 때때로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의 역시 불확실한 명령이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하는 말씀까지 온전히 순종하였을 때 그의 모험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비검함과 두려움과 의심을 이기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믿음은 Victory--이 세상과 사망을 이기게 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 나라에 입성케 하는 능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시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깃발, 출애굽기 17:15) 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내셨습니다. 아말렉 군대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싸울 때 산에 오른 모세의 양팔을 아론과 훌이 높이 치켜들 때 승리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위시하여서 가나안 땅의 여러 거민들을 정복하는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2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血)과 육(肉)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육신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썩을 것(φθορά)--우리의 변화되지 않은 모습--은 썩지 않을 것(ἀφθαρία)--영원히 불변하는 세계--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몸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도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소망이 썩어지는 이 세상 가운데 마냥 머물러 있지 않고 하늘나라의 것을 생각하고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51-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忽然)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나타날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윤리적 행위에 의해서가 믿음의 있고 없음에 따라서 어떤 영혼은 낙원(Paradise)으로 또 어떤 영혼은 음부(Hades)로 옮겨집니다.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육신의 무너짐과 함께 이미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현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기준에 따르면) 낙원에 영혼으로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때에 함께 강림할 것인데 이때 영혼과 변화된 몸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썩어진 육신이 썩지 않을 몸으로 홀연히 변화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7절에 바울은 그리스도 강림과 함께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들의 순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의 영혼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몸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홀연히 변화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인데,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강림하는 잠자는 자들의 영혼과 몸의 결합이요, 둘째는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자들의 몸의 신령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다가 죽은 자들은 백보좌 심판을 받기 위하여 살아나는 둘째 부활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썩어지는 육체가 부활할 때는 그 육체의 원소(元素)대로 새로운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크리스천들 가운데 혹 우리 육체의 원소(元素)가 흙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온전한 부활의 몸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화장(火葬)하여서 그 재를 강물이나 바다에 뿌리면 부활할 때에 몸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는 분이 있는데 이는 쓸데 없는 염려입니다.
초대교회 크리스천들 중에서 상당수가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형(火刑)에 처해졌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영혼이 장차 임할 하늘나라에서 살기 위한 무너져내리지 않는 처소르 덧입는 것이므로 땅에 속한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화장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동안 입었던 옷을 태우는 것일 뿐입니다.
53절에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불가불”이라고 함은 ‘반드시’란 뜻입니다. 썩을 육체가 그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몸을 입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낙원(Paradise)을 천국(Heaven)--‘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라고도 하지만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청원할 때 그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낙원’은 영혼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낙원에 머무는 영혼은 ‘하나님 나라’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된 곳에 썩지 않을 영광의 몸으로 들어갈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니,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고백을 한 우리 모두가 다 신령한 몸과 영혼으로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이 세상을 살기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밝히 볼 수 없을 뿐입니다.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25장 8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사망의 권세는 더 이상 피조물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망 가운데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뿐 아니라 우리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승리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이길 때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다른 피조물들도 비로소 썩어짐의 종노릇 함에서 해방됩니다.
로마서 8장 19-21절에 “19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55-56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호세아서 1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말씀케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이기는 것이, 사망의 쏘는 것이 ‘죄(罪)’로 말미암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사망의 쏘임을 당하고 그 권세 가운데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죄를 알지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도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우리에게도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우리가 구원함에 이르지 못하고 죄 가운데 놓여있는 자가 분명합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 율법의 말씀하는 바에 따르면 분명히 죄이며 따라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이나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과 율법이 정한 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하여 주셨습니다.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요한일서 5장 4-5절에서 사도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길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마귀의 최고 절대적인 권세인 사망을 이기게 합니다.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권고합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미래의 삶을 바라보는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오늘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살게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장차 영광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이기에 오늘은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아요’가 아닙니다. 오늘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현실’로 임합니다.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합니다.
감당케 할뿐만 아니라 자원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힘쓰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고 하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다만 관념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구원하는 믿음도 역사하는 믿음도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함은 바로 이와같은 관념적인 믿음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요, 능력이 많으신 줄 믿고(=알고) 두려워 떨지만’ 이것이 귀신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우리 삶 가운데 우리의 능력이 되는 믿음은 우리로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힘쓰게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현재의 삶 가운데 승리하게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이 즐겁고 감사합니다.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 여전히 어려움이 많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고난이 임할 수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주위 사람들에게 수치(羞恥)와 조롱(嘲弄)을 당합니다.
해서, 믿음의 삶을 포기하거나 남들이 하는 대로 대충 대충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할 때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했습니다.
‘대충성의 믿음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우리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희미하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지만, 수고를 다한 사람에게 주어질 상급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바울의 유언적인 말씀을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의 삶이 어떠합니까?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습니까?
우리 일생의 믿음의 경주는 마라톤과도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선두그룹을 형성하며 달립니다.
얼마큼 달리다 보면 선두그룹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선두그룹에서 처지는 선수는 ‘내가 조금 천천히 달리다가 원기를 회복하면 다시 선두그룹을 따라 잡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한 번 처지기는 쉽지만, 한 번 처진 사람이 다시 선두그룹을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라톤도 그렇지만 단거리와 중장거리의 경주에서 처음에 스타트를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여 선두그룹을 형성하여야지만 상위권 입상이 가능합니다.
‘내가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다가 다른 선수들이 기력을 잃으면 그때 다 따라잡아야지’ 하는 사람은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천천히 달린다고 기운이 소모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덜 소모될 것이지만 나중에 앞서가는 선수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 위에 매일 매일 연습하는 선수들을 제치고 연습도 않고 경기 당일에 출전하는 선수가 승리하기란 불가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승리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모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승리하여야 할 것인데, 이는 우리의 상대가 죄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음은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서 그를 의지하는 자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오늘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하여 믿음의 경주를 감당하심으로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몸” (고전 15:35-49)
“부활의 몸” (고전 15: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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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란 단어는 때로는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고 또 때로는 긍정적인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의 꿈은 허무하거나 헛된, 이룰 수 없는 혹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물거품같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꿈은 한 사람의 이상(理想)이요 소망(所望)입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할 때 이 꿈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꿈에 대한 고사성어(古事成語)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남가지몽(南柯之夢), 무산지몽(巫山之夢), 역부지몽(役夫之夢), 한단지몽(邯鄲之夢), 화서지몽(華胥之夢), 호접지몽(胡蝶之夢) 등이 잘 알려진 꿈 이야기들인데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장자(莊子)의 꿈 이야기입니다(《장자》「제물론」편).
장주(莊周: 장자의 이름)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훨훨 날아 다니는 나비가 되어 기분내키는 대로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문득 꿈에서 깨어보니 변함없는 장주였습니다. 도대체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아리송합니다. 인생을 다람쥐 채바퀴 돌 듯 살아가다가 돌이켜 보면 내가 현실을 산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어왔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현세상에서 무엇인가 추구하면서 살아갔지만 그것이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꿈 이야기 가운데 중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조신(調信)의 꿈”이 있습니다 (제 3권 탑상(塔像) 제 4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조신(調信)」). 신라시대 조신(調信)은 경기도 개풍의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흥교사)에 소속된 중으로서 명주(溟州) 날리군(捺理郡 혹은 날생군[捺生郡])에 위치한 장원(莊園)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곳에 내려왔을 때 그는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보자마자 반해 버립니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洛山寺)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살게 해달라고 남몰래 자기의 소원을 아룁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녀에게는 배필이 생깁니다. 이에 조신은 또 불당으로 나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그 자리에서 잠이 듭니다. 문득 김흔공의 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기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합니다: “저도 일찍이 스님을 잠깐 뵙고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하며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명령에 못이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하여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녀와 40여 년간 함께 살면서 다섯 자녀를 둡니다. 그러나 마침내 거친 음식(粗食)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사방으로 구걸의 길을 다닙니다.
10년 동안을 사방으로 헤메고 다니니 옷이 갈갈이 찢어져서 몸뚱이도 제대로 가릴 수 없게 되고, 15세 된 큰 아들을 굶주림으로 명주 해현령(蟹縣嶺)의 흙에 묻는 슬픔을 겪습니다. 그들은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우현)에 이르러 모옥(茅屋)을 짓고 삽니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허기로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10세된 딸 아이가 밥을 빌어먹으러 다니다가 개에게 물리니 부모로서의 아픔이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은 두 아이씩을 나누어 맡아 헤어지기로 합니다. 이렇게 작별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조신(調信)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그가 울며 잠들기 전에 타던 등잔불은 여전히 꺼질 듯 깜빡거리고 있는데 어느덧 희쁘옇게 날이 밝기 시작합니다. “아 다행히도 꿈이었구나”하며 조신은 꿈 속에서 모진 고생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긴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관음보살 앞에 속죄의 기도를 드리고, 세수를 하려고 시냇물에 몸을 숙이는데 물에 비췬 그의 얼굴을 보니 수염과 머리칼이 온통 하얗게 세어 있었습니다. 꿈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한 평생을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아온 듯이 그렇게 수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꿈에 큰 아들을 묻은 해현령(蟹縣嶺)에 가서 그 장소를 파보니 그곳에서 돌부처(石彌勒)가 나왔습니다. 이후로 그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착한 일만 하면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가 언제 어느 곳에서 세상을 떴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를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우리의 탐욕이나 정욕을 좇는 삶은 한낱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좇을 때 우리는 허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의 결국은 하늘에 속하는 자가 아니라 흙으로 돌아갈 자가 됩니다.
2
35절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고 부활의 몸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 질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 마음에서 어떠한 몸을 입을 것인가 궁금하여서 한 질문이 아니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생이 결국은 한 알의 씨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과 믿음에 따른 삶이 ‘그 씨의 내용물이 어떠할 것’을 결정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일생도 똑같은 씨를 얻는 삶같이 보이나 천지차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생을 통하여 얻어진 씨는 씨 자체로 남아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씨의 내용물이 어떠한가 보기 위하여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씨가 죽어서 맺어지는 열매의 어떠함이 우리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했습니다.
무한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꿈 곧 소망이지만 현재의 육체와 같이 계속 늙어지고 쇠하여지는 모습으로 천년 만년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육체는 죄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점점 낡아지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이 낡아지는 몸이 죽을 때 낡아지지 않는 몸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은 자기 생명을 버리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풍성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산 믿음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기에 그가 얻은 씨의 내용물이 알찬 것이지만, 이 씨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지만 다음에는 영원히 사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애벌레가 그 껍질을 벗어버리고 아름답고 섬세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듯이, 우리 인간은 죄와 허물의 껍질을 훌훌 벗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썩지않는 부활의 몸으로 하늘나라를 향하여 날아오르기 위하여 한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신령한 몸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죄와 사망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들어왔기에 죄와 허물을 함께 묻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되어야 합니다.
37-38절에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린 나무를 묘목하는 경우에는 그 어린나무가 큰 나무의 형체를 갖고 있기에 그것이 자라면 어떠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경우에는 그것이 무거운 흙을 헤치고 올라와서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피고 열매를 내는 과정을 겪으면서 그 식물(植物)의 형체를 나타냅니다.
씨가 장래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콩의 씨가 팥을 낼 수 없고 팥의 씨가 콩을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무와 열매를 예로 든다면 가시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낼 수 없고 찔레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결실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살 때에 악한 생각을 품고 살던 사람이 거둔 씨가 좋은 생각의 나무와 열매로 다시 태어나고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살 때에는 세상의 정욕과 자랑에 따라 살던 사람의 나무에서 다음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찬송하고 영광돌리는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43-45절에서 예수님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부활의 열매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으면 뜻이 더욱 분명하여집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했는데, 결국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형체--몸(σώμα)--를 주시는데, 그 일생이 믿음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헌심된 삶이었다면 장차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형체--곧 부활의 몸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39절에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생물을 지으시되,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 등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각각 다른 육체를 주셨습니다. 같은 육체(flesh)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다 같은 육체(flesh)가 아닙니다. 같은 육체(flesh)로 지음받았지만 사람이 누리는 영광과 물고기가 누리는 영광이 다릅니다.
부활의 씨로서 우리 각 사람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씨가 부활로 다시 나타나게 될 때 그 형체는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생명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것이요 어떤 사람은 영벌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사람의 영광도 각각 다를 것인데, 그들의 믿음과 믿음에 따른 각기 다른 삶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질 상급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은 얻되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것이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칭찬이 있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40-41절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말씀합니다.
땅에 속한 생물체가 여러 가지 형체--몸(σώμα)--를 갖고 살아가듯이 하늘에서도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한 땅에서 영광을 얻듯이 또 어떤 사람은 하늘에서 영광을 얻게 됩니다.
땅에서 영광을 얻은 사람이 반드시 하늘에서 영광을 얻을 사람은 아닙니다.
땅에서는 땅의 기준에 따라 영광이 주어지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영광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땅에서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는 영광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까닭입니다.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했습니다.
죽은 것같이 보이는 씨가 땅에 떨어지면 다시 살아나듯이 우리 육체가 죽는 것같으나 땅에 묻히면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육체는 썩을 것이나 부활의 첫 열매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될 우리의 몸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에 육체(σάρξ)와 몸(형체, σώμα)이 다릅니다.
육체는 몸이라고도 표현하지만 썩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부활될 몸은 성경에서는 육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50절의 표현을 보면, “혈(blood)과 육(flesh)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했습니다.
육 곧 썩을 육체는 사망의 권세 가운데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습니다.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합니다.
이 세상의 우리 육체가 욕된 까닭은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지배 하에 있기에 우리로 원치 않는 죄와 허물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세상의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내면적으로 뿐만아니라 외적으로도 후패하여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권세 가운데 놓이지 아니하며 죄와 사망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영광슬운 몸을 입게 됩니다.
현재는 나의 마음과 육체가 모두 약하여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부활할 때 나는 강하여 우리의 원함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육의 몸(a physical body)이란 동물적인 본성(animal desires or instincts)에 의해서 지배되는 몸입니다. 곧, 식욕, 성욕, 종족번식욕, 출세욕, 명예욕, 탐욕 등 하나님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신령한 몸(a spiritual body)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몸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거룩하고 신령한 것만이 있는 세상은 육체적인 욕망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재미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재미는 순간뿐이지만 신령한 재미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45-46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에 속한 것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를 하늘에 속한 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범죄함으로 산 영의 특권이 그에게서 박탈되었습니다. 그로써 아담과 그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불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원래의 축복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살려주는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신령한 자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이에 신령한 자가 아닌 우리들을 신령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하여 신령한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47절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원래 땅에 속한 자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주심으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삼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땅에 속한 자의 결국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얻을 것인데 아담은 사단에게 미혹되어 이 하늘나라에 속함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맛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삼십여년의 삶을 사셨지만 하늘나라에 속한 권세를 상실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땅에 속한 자들로 하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48-49절에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유전자(gene)를 이어받아 육적인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은 흙에 속한 자들로 영원히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하늘에 속한 자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늘에 속하는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엡 1:9).
그 하늘나라에 속하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 명확한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5절).”
흙에 속한 사람들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은 일단 흙으로 돌아가되 하늘에 속한 자로 부활됩니다. 헬라어 아노센(ἄνωθεν)은 “거듭(again)”이란 뜻과 함께 “하늘로부터, 위로부터(from above)"란 뜻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여전히 흙에 속하여 있지만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성령께서 이 사람을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드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되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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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부활의 소망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활의 몸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것인가 바라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삶이 얼마나 축복되고 즐거운 삶인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약삭빠라서 적은 것으로 심고 많은 것을 거두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이러한 것을 그렇게 크게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믿음의 씨앗을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씨앗을 심어놓고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거두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른 자세요 바른 믿음입니다. 불신의 씨를 심어놓은 곳에서는 믿음의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믿음의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생각하는 씨를 심어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하늘에 속한 것을 거둘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믿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마음을 갖고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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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란 단어는 때로는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고 또 때로는 긍정적인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의 꿈은 허무하거나 헛된, 이룰 수 없는 혹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물거품같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꿈은 한 사람의 이상(理想)이요 소망(所望)입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할 때 이 꿈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꿈에 대한 고사성어(古事成語)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남가지몽(南柯之夢), 무산지몽(巫山之夢), 역부지몽(役夫之夢), 한단지몽(邯鄲之夢), 화서지몽(華胥之夢), 호접지몽(胡蝶之夢) 등이 잘 알려진 꿈 이야기들인데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장자(莊子)의 꿈 이야기입니다(《장자》「제물론」편).
장주(莊周: 장자의 이름)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훨훨 날아 다니는 나비가 되어 기분내키는 대로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문득 꿈에서 깨어보니 변함없는 장주였습니다. 도대체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아리송합니다. 인생을 다람쥐 채바퀴 돌 듯 살아가다가 돌이켜 보면 내가 현실을 산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어왔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현세상에서 무엇인가 추구하면서 살아갔지만 그것이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꿈 이야기 가운데 중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조신(調信)의 꿈”이 있습니다 (제 3권 탑상(塔像) 제 4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조신(調信)」). 신라시대 조신(調信)은 경기도 개풍의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흥교사)에 소속된 중으로서 명주(溟州) 날리군(捺理郡 혹은 날생군[捺生郡])에 위치한 장원(莊園)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곳에 내려왔을 때 그는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보자마자 반해 버립니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洛山寺)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살게 해달라고 남몰래 자기의 소원을 아룁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녀에게는 배필이 생깁니다. 이에 조신은 또 불당으로 나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그 자리에서 잠이 듭니다. 문득 김흔공의 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기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합니다: “저도 일찍이 스님을 잠깐 뵙고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하며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명령에 못이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하여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녀와 40여 년간 함께 살면서 다섯 자녀를 둡니다. 그러나 마침내 거친 음식(粗食)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사방으로 구걸의 길을 다닙니다.
10년 동안을 사방으로 헤메고 다니니 옷이 갈갈이 찢어져서 몸뚱이도 제대로 가릴 수 없게 되고, 15세 된 큰 아들을 굶주림으로 명주 해현령(蟹縣嶺)의 흙에 묻는 슬픔을 겪습니다. 그들은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우현)에 이르러 모옥(茅屋)을 짓고 삽니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허기로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10세된 딸 아이가 밥을 빌어먹으러 다니다가 개에게 물리니 부모로서의 아픔이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은 두 아이씩을 나누어 맡아 헤어지기로 합니다. 이렇게 작별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조신(調信)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그가 울며 잠들기 전에 타던 등잔불은 여전히 꺼질 듯 깜빡거리고 있는데 어느덧 희쁘옇게 날이 밝기 시작합니다. “아 다행히도 꿈이었구나”하며 조신은 꿈 속에서 모진 고생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긴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관음보살 앞에 속죄의 기도를 드리고, 세수를 하려고 시냇물에 몸을 숙이는데 물에 비췬 그의 얼굴을 보니 수염과 머리칼이 온통 하얗게 세어 있었습니다. 꿈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한 평생을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아온 듯이 그렇게 수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꿈에 큰 아들을 묻은 해현령(蟹縣嶺)에 가서 그 장소를 파보니 그곳에서 돌부처(石彌勒)가 나왔습니다. 이후로 그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착한 일만 하면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가 언제 어느 곳에서 세상을 떴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를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우리의 탐욕이나 정욕을 좇는 삶은 한낱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좇을 때 우리는 허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의 결국은 하늘에 속하는 자가 아니라 흙으로 돌아갈 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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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절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고 부활의 몸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 질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 마음에서 어떠한 몸을 입을 것인가 궁금하여서 한 질문이 아니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생이 결국은 한 알의 씨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과 믿음에 따른 삶이 ‘그 씨의 내용물이 어떠할 것’을 결정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일생도 똑같은 씨를 얻는 삶같이 보이나 천지차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생을 통하여 얻어진 씨는 씨 자체로 남아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씨의 내용물이 어떠한가 보기 위하여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씨가 죽어서 맺어지는 열매의 어떠함이 우리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했습니다.
무한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꿈 곧 소망이지만 현재의 육체와 같이 계속 늙어지고 쇠하여지는 모습으로 천년 만년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육체는 죄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점점 낡아지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이 낡아지는 몸이 죽을 때 낡아지지 않는 몸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은 자기 생명을 버리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풍성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산 믿음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기에 그가 얻은 씨의 내용물이 알찬 것이지만, 이 씨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지만 다음에는 영원히 사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애벌레가 그 껍질을 벗어버리고 아름답고 섬세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듯이, 우리 인간은 죄와 허물의 껍질을 훌훌 벗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썩지않는 부활의 몸으로 하늘나라를 향하여 날아오르기 위하여 한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신령한 몸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죄와 사망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들어왔기에 죄와 허물을 함께 묻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되어야 합니다.
37-38절에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린 나무를 묘목하는 경우에는 그 어린나무가 큰 나무의 형체를 갖고 있기에 그것이 자라면 어떠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경우에는 그것이 무거운 흙을 헤치고 올라와서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피고 열매를 내는 과정을 겪으면서 그 식물(植物)의 형체를 나타냅니다.
씨가 장래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콩의 씨가 팥을 낼 수 없고 팥의 씨가 콩을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무와 열매를 예로 든다면 가시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낼 수 없고 찔레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결실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살 때에 악한 생각을 품고 살던 사람이 거둔 씨가 좋은 생각의 나무와 열매로 다시 태어나고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살 때에는 세상의 정욕과 자랑에 따라 살던 사람의 나무에서 다음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찬송하고 영광돌리는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43-45절에서 예수님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부활의 열매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으면 뜻이 더욱 분명하여집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했는데, 결국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형체--몸(σώμα)--를 주시는데, 그 일생이 믿음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헌심된 삶이었다면 장차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형체--곧 부활의 몸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39절에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생물을 지으시되,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 등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각각 다른 육체를 주셨습니다. 같은 육체(flesh)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다 같은 육체(flesh)가 아닙니다. 같은 육체(flesh)로 지음받았지만 사람이 누리는 영광과 물고기가 누리는 영광이 다릅니다.
부활의 씨로서 우리 각 사람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씨가 부활로 다시 나타나게 될 때 그 형체는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생명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것이요 어떤 사람은 영벌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의 형체를 입을 사람의 영광도 각각 다를 것인데, 그들의 믿음과 믿음에 따른 각기 다른 삶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질 상급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은 얻되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것이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칭찬이 있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40-41절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말씀합니다.
땅에 속한 생물체가 여러 가지 형체--몸(σώμα)--를 갖고 살아가듯이 하늘에서도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한 땅에서 영광을 얻듯이 또 어떤 사람은 하늘에서 영광을 얻게 됩니다.
땅에서 영광을 얻은 사람이 반드시 하늘에서 영광을 얻을 사람은 아닙니다.
땅에서는 땅의 기준에 따라 영광이 주어지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영광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땅에서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는 영광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까닭입니다.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했습니다.
죽은 것같이 보이는 씨가 땅에 떨어지면 다시 살아나듯이 우리 육체가 죽는 것같으나 땅에 묻히면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육체는 썩을 것이나 부활의 첫 열매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될 우리의 몸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에 육체(σάρξ)와 몸(형체, σώμα)이 다릅니다.
육체는 몸이라고도 표현하지만 썩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부활될 몸은 성경에서는 육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50절의 표현을 보면, “혈(blood)과 육(flesh)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했습니다.
육 곧 썩을 육체는 사망의 권세 가운데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습니다.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합니다.
이 세상의 우리 육체가 욕된 까닭은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지배 하에 있기에 우리로 원치 않는 죄와 허물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세상의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내면적으로 뿐만아니라 외적으로도 후패하여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권세 가운데 놓이지 아니하며 죄와 사망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영광슬운 몸을 입게 됩니다.
현재는 나의 마음과 육체가 모두 약하여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부활할 때 나는 강하여 우리의 원함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육의 몸(a physical body)이란 동물적인 본성(animal desires or instincts)에 의해서 지배되는 몸입니다. 곧, 식욕, 성욕, 종족번식욕, 출세욕, 명예욕, 탐욕 등 하나님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신령한 몸(a spiritual body)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몸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거룩하고 신령한 것만이 있는 세상은 육체적인 욕망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재미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재미는 순간뿐이지만 신령한 재미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45-46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에 속한 것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를 하늘에 속한 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범죄함으로 산 영의 특권이 그에게서 박탈되었습니다. 그로써 아담과 그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불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원래의 축복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살려주는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신령한 자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이에 신령한 자가 아닌 우리들을 신령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하여 신령한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47절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원래 땅에 속한 자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주심으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삼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땅에 속한 자의 결국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얻을 것인데 아담은 사단에게 미혹되어 이 하늘나라에 속함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맛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삼십여년의 삶을 사셨지만 하늘나라에 속한 권세를 상실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땅에 속한 자들로 하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48-49절에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유전자(gene)를 이어받아 육적인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은 흙에 속한 자들로 영원히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하늘에 속한 자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늘에 속하는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엡 1:9).
그 하늘나라에 속하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 명확한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5절).”
흙에 속한 사람들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은 일단 흙으로 돌아가되 하늘에 속한 자로 부활됩니다. 헬라어 아노센(ἄνωθεν)은 “거듭(again)”이란 뜻과 함께 “하늘로부터, 위로부터(from above)"란 뜻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여전히 흙에 속하여 있지만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성령께서 이 사람을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드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되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3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활의 몸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것인가 바라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삶이 얼마나 축복되고 즐거운 삶인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약삭빠라서 적은 것으로 심고 많은 것을 거두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이러한 것을 그렇게 크게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믿음의 씨앗을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씨앗을 심어놓고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거두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른 자세요 바른 믿음입니다. 불신의 씨를 심어놓은 곳에서는 믿음의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믿음의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생각하는 씨를 심어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하늘에 속한 것을 거둘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믿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마음을 갖고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 (고전 15:12-34)
“죽은 자의 부활” (고전 15:12-34)
1
사람은 태어나서 유아기와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보내고, 노년기를 지내다가 때가 되면 흙에 묻힙니다. 어떤 사람은 그 중간단계에서 운명을 달리 하기도 합니다.
80이 된 분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하면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기력이 쇠하여가고있는 80세 노인’이 그입니까? 그의 실체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도 80년 전에는 어린아이로 세상에 태어났으며, 소년과 청년과 장년의 때를 보낸 사람입니다. 만일 60년 전에 동일한 질문을 했다면 그는 ‘나는 혈기 왕성한 20세 청년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유아의 육체나, 20세 청년의 육체나, 80세 노인의 육체는 다만 ‘진정한 그’가 거하는 거처일뿐 그의 실체는아닙니다.
미국의 6대 대통령이었던 존 퀸시 아담스(J.Q. Adams, 1767-1848)의 일화입니다. 80세의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그의 친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이보게 아담스, 오늘은 좀 어떤가?”
아담스는 대답합니다. “고맙네, 아담스는 잘 지내고 있다네. 단지 살고 있는 집이 점차 살기에 점차 불편해지는 것 말고는. 그러나 나는 그 집이 아니니까 별 상관은 없지. 이제 곧 집을 이사해야 할 것 같아. 어쨌든 아담스는 잘 지내고 있다네. 고맙네!” 아담스는 그 육신을 그의 사는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체(實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체라고 하는 껍질(nutshell) 안에 거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 갖고 있는 우리의 육체를 장막집이라고 했습니다. 이 장막집은 말하자면 80-100년 동안만 살 집이라 임시로 지은 것이어서 세월이 지나면 낡습니다. 우리(=영혼)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육신이라고 하는 장막집에 거하고 있는 것같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살 집이 필요한데 우리 영혼이 거할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 혹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 것이 ‘몸의 부활’입니다.
‘육신이 죽은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견해는 이미 헬라 철학자들도 주장한 바이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믿던 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시던--‘죽은지 사흘만에 육신으로 다시 사심’을 나타내신 것은 우리 인간은 영혼뿐아니라 몸으로도 영원히 살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몸과 영혼으로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은 마치 한 알의 씨와 같습니다.
어떤 씨는 실하여서 파종(播種)하면 좋은 싹을 내고 좋은 결실을 거두는가 하면, 어떤 씨는 같은 씨인것처럼 보이지만 쭉정이라서 땅에 심어도 싹을 내지 못합니다.
알곡신자와 쭉정이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곡신자는 그 삶의 내용물이 믿음이기에 그가 다시 땅에 떨어질 때(=죽을 때) 부활의 싹을 내고 영생의 열매를 거두는 반면에, 쭉정이 신자는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 믿음이 없었기에 땅에 떨어질 때에 부활의 싹을 내지 못하고 흙속에서 그저 썩어질뿐입니다.
다른 믿지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첫 번째는 썩을 몸을 입고 태어나지만, 두 번째는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합니다. 한 번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지만, 영생하는 축복과 기쁨을 그의 몸과 영혼이 맛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2
15장 1-11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명한 바울은 오늘 본문(15:12-34)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죽은 자가 그의 믿음에 따라 몸으로 부활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까닭입니다.
12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몸의 부활은 물론이고 영혼의 불멸도 믿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었지만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바울이 지금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반문함은 ‘죽은 자의 몸의 부활’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죽은 자의 부활’은 ‘죽은 자의 몸의 부활’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기에 부활을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나는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믿지만,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부활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13절(또 16절)에서 바울은 반복하여서 강조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땅에 오시고 육신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지킨 사람의 결국이 어떠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같이 육신의 몸을 입은 우리도 부활할 것임을 말씀함입니다.
14절(또 17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궁극적(窮極的)인 소망은 부활의 몸과 영혼으로 영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결국 우리의 궁극의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사도들과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복음을 전파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근거도 없습니다.
15절에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의 복음 증거의 핵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24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고, 31-32절에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은 ‘죽은 자가 몸으로 다시 살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부활하심은 ‘우리 믿는 사람의 삶이 어떠하리라’고 함을 보여주시기 위한 모델의 삶입니다.
18-19절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씀합니다.
“또한”이라고 한 것은 앞의 말(16-17절과 13-14절의 반복)을 이어받음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터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죽은 자가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굳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죄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한 까닭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우리도 여전히 사망의 권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여전히 있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그러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은사로 우리 믿는 사람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 오늘을 살지만 소망 중에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힘을 얻고 ‘오늘’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과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첫사람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계획 중에는 ‘사망’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썩어짐과 사망이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2: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되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인간에게 내리셨던 징계를 풀어주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같이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부활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21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이하의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논리와 같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와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듯이 의롭다함과 부활과 영생도 사람으로 말미암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고사성어가 있는데, ‘매듭을 맨 자가 풀어야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이 고사성어의 논리와 비슷한 것으로서 사람이 맨 매듭을 사람으로 풀게 하겠다는 것인데, 첫 번째 아담은 죄를 범한 자로 그러한 능력이 없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신 마지막 아담으로 그 일을 이루시게 하신 것입니다.
22-24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씀합니다.
부활될 사람의 순서를 설명함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현재는 영혼으로 낙원에서 쉼을 얻고 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강림하여 그들의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여전히 지상에 살고있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썩을 몸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썩지 않을 몸으로 변형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임하는 ‘몸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의 결국을 말씀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의 순서와 같습니다.
25-26절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이후에 일어날 사건의 순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공중재림하시어 7년동안을 머무신 후에 지상에 재림하시고 천년동안 왕노릇하실 터인데 그때에는 아직 완전히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기 전입니다. 천 년 동안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셨지만 천 년이 차매 잠시 세상에 내어놓으셔서 그동안에 불어난 사람들의 믿음을 다시 한번 보십니다.
그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는데, 이로서 믿지않는 자들에게 행위에 따른 심판을 내리시고,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기록한 대로 그 이후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이 있게 됩니다.
27-28절에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게 하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재림이후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의 대상과 그 역사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만물이 그의 발 아래 복종케 될 것인데, 이때 그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의 역사는 백보좌 심판이 있은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까지로서 그 이후에는 다스리심의 권한이 성부 하나님께 이양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끝나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의 다스리심이 계속될 것입니다.
29절에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라고 질문합니다.
고린도 지방에서 잘못 행하여지고 있던 관습입니다. 곧,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가 부활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가족 중 혹은 친구 중에 누가 그를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활 때에 믿지 않고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부활될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잘못된 것이지만, 바울이 지금 이것을 말함은 부활의 소망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30절에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라고 반문합니다.
바울을 포함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죽음이 두렵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몸이 부활되고, 부활된 몸이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믿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함은 그당시 바울이 처한 죽음에 직면한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의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삶’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 때 나의 자아(自我)는 죽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 23-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救援)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고 부인하는--‘자기가 하고자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귀한 선물로 주어집니다.
32절에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천의 윤리적인 삶의 의미는 부활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되지 않을 터이면, 만일 우리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없고 죽음 가운데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면, 이 세상을 나의 배만 위하고 방탕한 삶을 산들 무엇이 대수이겠습니까?
교회를 다니면 사업이 잘되고 세상 복을 얻는 줄 알고 다니고 이 세상을 살 때 마음이 편하여서 다닌 것이라면, 그리고 죽음 이후는 없는 것이라면,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좀 나쁜 짓을 하면 어떻고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는 삶을 산들 어떻습니까? 어차피 죽음 이후는 아무 것도 없는데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후에 내 혼(魂)이 심판 받는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몸으로 부활될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주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의(義)의 첫째 부활’에 참예할 것이요, 또 어떤 사람들은 백보좌(White Chair) 앞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 받기 위해서 ‘불의(不義)의 둘째 부활’에 참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인생은 어차피 한 번뿐, 죽음이후는 아무것도 아니니 자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일 것이지만, 죽은 자는 반드시 선악간에 판단을 받기 위해서 부활합니다.
우리가 무슨 부활에 참예하여야 할 것입니까?
영생(永生)의 부활에 이르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3-34절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3장 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권면합니다.
부활을 바라보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좋은 씨뿌리는 삶이 없으면 내일의 좋은 결실을 거두는 삶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기억에 매임을 당하여 살고, 어떤 사람은 내일 마치 큰 일이 이루어질 듯이 내일을 먹고 사는데 우리는 오늘의 바른 삶이 필요합니다. 그 ‘오늘’ 중에서도 이 시간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주님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생각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영생을 누리되 영혼으로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요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한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산과 바다로 가족과 함께 놀러 다니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또 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굳이 생활의 일부를 쪼개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릴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그것으로 나와 가족의 배를 채우는 것이 더 낫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위험을 감수하고 나의 욕심과 자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내가 몸으로 부활할 것을 바라보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부활의 믿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에 대한 바른 목적과 바른 믿음을 갖고 여러분 자신을 부활의 주님께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1
사람은 태어나서 유아기와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보내고, 노년기를 지내다가 때가 되면 흙에 묻힙니다. 어떤 사람은 그 중간단계에서 운명을 달리 하기도 합니다.
80이 된 분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하면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기력이 쇠하여가고있는 80세 노인’이 그입니까? 그의 실체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도 80년 전에는 어린아이로 세상에 태어났으며, 소년과 청년과 장년의 때를 보낸 사람입니다. 만일 60년 전에 동일한 질문을 했다면 그는 ‘나는 혈기 왕성한 20세 청년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유아의 육체나, 20세 청년의 육체나, 80세 노인의 육체는 다만 ‘진정한 그’가 거하는 거처일뿐 그의 실체는아닙니다.
미국의 6대 대통령이었던 존 퀸시 아담스(J.Q. Adams, 1767-1848)의 일화입니다. 80세의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그의 친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이보게 아담스, 오늘은 좀 어떤가?”
아담스는 대답합니다. “고맙네, 아담스는 잘 지내고 있다네. 단지 살고 있는 집이 점차 살기에 점차 불편해지는 것 말고는. 그러나 나는 그 집이 아니니까 별 상관은 없지. 이제 곧 집을 이사해야 할 것 같아. 어쨌든 아담스는 잘 지내고 있다네. 고맙네!” 아담스는 그 육신을 그의 사는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체(實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체라고 하는 껍질(nutshell) 안에 거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 갖고 있는 우리의 육체를 장막집이라고 했습니다. 이 장막집은 말하자면 80-100년 동안만 살 집이라 임시로 지은 것이어서 세월이 지나면 낡습니다. 우리(=영혼)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육신이라고 하는 장막집에 거하고 있는 것같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살 집이 필요한데 우리 영혼이 거할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 혹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 것이 ‘몸의 부활’입니다.
‘육신이 죽은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견해는 이미 헬라 철학자들도 주장한 바이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믿던 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시던--‘죽은지 사흘만에 육신으로 다시 사심’을 나타내신 것은 우리 인간은 영혼뿐아니라 몸으로도 영원히 살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몸과 영혼으로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은 마치 한 알의 씨와 같습니다.
어떤 씨는 실하여서 파종(播種)하면 좋은 싹을 내고 좋은 결실을 거두는가 하면, 어떤 씨는 같은 씨인것처럼 보이지만 쭉정이라서 땅에 심어도 싹을 내지 못합니다.
알곡신자와 쭉정이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곡신자는 그 삶의 내용물이 믿음이기에 그가 다시 땅에 떨어질 때(=죽을 때) 부활의 싹을 내고 영생의 열매를 거두는 반면에, 쭉정이 신자는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 믿음이 없었기에 땅에 떨어질 때에 부활의 싹을 내지 못하고 흙속에서 그저 썩어질뿐입니다.
다른 믿지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첫 번째는 썩을 몸을 입고 태어나지만, 두 번째는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합니다. 한 번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지만, 영생하는 축복과 기쁨을 그의 몸과 영혼이 맛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2
15장 1-11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명한 바울은 오늘 본문(15:12-34)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죽은 자가 그의 믿음에 따라 몸으로 부활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까닭입니다.
12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몸의 부활은 물론이고 영혼의 불멸도 믿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었지만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바울이 지금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반문함은 ‘죽은 자의 몸의 부활’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죽은 자의 부활’은 ‘죽은 자의 몸의 부활’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기에 부활을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나는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믿지만,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부활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13절(또 16절)에서 바울은 반복하여서 강조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땅에 오시고 육신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지킨 사람의 결국이 어떠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같이 육신의 몸을 입은 우리도 부활할 것임을 말씀함입니다.
14절(또 17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궁극적(窮極的)인 소망은 부활의 몸과 영혼으로 영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결국 우리의 궁극의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사도들과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복음을 전파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근거도 없습니다.
15절에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의 복음 증거의 핵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24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고, 31-32절에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은 ‘죽은 자가 몸으로 다시 살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부활하심은 ‘우리 믿는 사람의 삶이 어떠하리라’고 함을 보여주시기 위한 모델의 삶입니다.
18-19절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씀합니다.
“또한”이라고 한 것은 앞의 말(16-17절과 13-14절의 반복)을 이어받음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터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죽은 자가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굳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죄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한 까닭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우리도 여전히 사망의 권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여전히 있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그러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은사로 우리 믿는 사람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 오늘을 살지만 소망 중에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힘을 얻고 ‘오늘’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과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첫사람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계획 중에는 ‘사망’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썩어짐과 사망이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2: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되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인간에게 내리셨던 징계를 풀어주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같이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부활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21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이하의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논리와 같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와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듯이 의롭다함과 부활과 영생도 사람으로 말미암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고사성어가 있는데, ‘매듭을 맨 자가 풀어야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이 고사성어의 논리와 비슷한 것으로서 사람이 맨 매듭을 사람으로 풀게 하겠다는 것인데, 첫 번째 아담은 죄를 범한 자로 그러한 능력이 없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신 마지막 아담으로 그 일을 이루시게 하신 것입니다.
22-24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씀합니다.
부활될 사람의 순서를 설명함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현재는 영혼으로 낙원에서 쉼을 얻고 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강림하여 그들의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여전히 지상에 살고있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썩을 몸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썩지 않을 몸으로 변형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임하는 ‘몸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의 결국을 말씀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의 순서와 같습니다.
25-26절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이후에 일어날 사건의 순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공중재림하시어 7년동안을 머무신 후에 지상에 재림하시고 천년동안 왕노릇하실 터인데 그때에는 아직 완전히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기 전입니다. 천 년 동안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셨지만 천 년이 차매 잠시 세상에 내어놓으셔서 그동안에 불어난 사람들의 믿음을 다시 한번 보십니다.
그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는데, 이로서 믿지않는 자들에게 행위에 따른 심판을 내리시고,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기록한 대로 그 이후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이 있게 됩니다.
27-28절에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게 하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재림이후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의 대상과 그 역사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만물이 그의 발 아래 복종케 될 것인데, 이때 그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의 역사는 백보좌 심판이 있은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까지로서 그 이후에는 다스리심의 권한이 성부 하나님께 이양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끝나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의 다스리심이 계속될 것입니다.
29절에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라고 질문합니다.
고린도 지방에서 잘못 행하여지고 있던 관습입니다. 곧,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가 부활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가족 중 혹은 친구 중에 누가 그를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활 때에 믿지 않고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부활될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잘못된 것이지만, 바울이 지금 이것을 말함은 부활의 소망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30절에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라고 반문합니다.
바울을 포함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죽음이 두렵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몸이 부활되고, 부활된 몸이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믿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함은 그당시 바울이 처한 죽음에 직면한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의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삶’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 때 나의 자아(自我)는 죽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 23-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救援)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고 부인하는--‘자기가 하고자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귀한 선물로 주어집니다.
32절에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천의 윤리적인 삶의 의미는 부활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되지 않을 터이면, 만일 우리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없고 죽음 가운데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면, 이 세상을 나의 배만 위하고 방탕한 삶을 산들 무엇이 대수이겠습니까?
교회를 다니면 사업이 잘되고 세상 복을 얻는 줄 알고 다니고 이 세상을 살 때 마음이 편하여서 다닌 것이라면, 그리고 죽음 이후는 없는 것이라면,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좀 나쁜 짓을 하면 어떻고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는 삶을 산들 어떻습니까? 어차피 죽음 이후는 아무 것도 없는데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후에 내 혼(魂)이 심판 받는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몸으로 부활될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주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의(義)의 첫째 부활’에 참예할 것이요, 또 어떤 사람들은 백보좌(White Chair) 앞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 받기 위해서 ‘불의(不義)의 둘째 부활’에 참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인생은 어차피 한 번뿐, 죽음이후는 아무것도 아니니 자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일 것이지만, 죽은 자는 반드시 선악간에 판단을 받기 위해서 부활합니다.
우리가 무슨 부활에 참예하여야 할 것입니까?
영생(永生)의 부활에 이르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3-34절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3장 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권면합니다.
부활을 바라보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좋은 씨뿌리는 삶이 없으면 내일의 좋은 결실을 거두는 삶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기억에 매임을 당하여 살고, 어떤 사람은 내일 마치 큰 일이 이루어질 듯이 내일을 먹고 사는데 우리는 오늘의 바른 삶이 필요합니다. 그 ‘오늘’ 중에서도 이 시간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주님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생각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영생을 누리되 영혼으로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요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한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산과 바다로 가족과 함께 놀러 다니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또 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굳이 생활의 일부를 쪼개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릴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그것으로 나와 가족의 배를 채우는 것이 더 낫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위험을 감수하고 나의 욕심과 자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내가 몸으로 부활할 것을 바라보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부활의 믿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에 대한 바른 목적과 바른 믿음을 갖고 여러분 자신을 부활의 주님께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 15:1-11)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 15:1-11)
1
불교의 언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불리는 갖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인 것은 죽는 것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외에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증오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삶 중에 안보고 안듣고 지내면 참 좋을듯한데 이런 사람이 주위에 있어 이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인간의 미움이 승(乘)할 때 그 정도가 어떠한지 짐작케 합니다. 구불득고(求不得苦)--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인데, 이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한국사람이 박사학위를 얻고자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고 세월만 계속 흘러가자 실성하게된 예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여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양가 부모님의 결혼승낙을 얻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은 재물을 크게 모으기를 소원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업에 실패할 때 이 고통이 또한 상당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인데 정작 본인은 얻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는 다,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불득고(求不得苦)가 있습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란 것이 있는데 이는 번뇌의 고통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만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번민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설에 따르면 한 생명은 여섯 세상--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과 천상(天上)--사이를 영원한 옛날부터 영원한 미래에 걸쳐 계속해서 윤회전생(輪廻轉生)합니다. 따라서, 한 생명은 이 여섯 세계를 영원히 윤회(輪廻)하고 전생(轉生: trnasmigration)하는데 이것이 고통입니다(구보 아리마사,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 참조함). 한 세상에서의 죄업(罪業)이 큰 중생은 여섯 세상 중 고통이 가장 심한 지옥(地獄)에 떨어질 수 있는데, 한번 지옥에 가면 아무리 짧아도 1조 6,200억 년 동안은 그곳의 심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섯 세상중 제일 좋은 곳이 천상(天上)인데, 이곳은 여러 가지 쾌락으로 가득차 있어 고통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중생에게는 이곳에 사는 것도 고통인데, 그 까닭은 이곳에서의 삶도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900만 년 혹은 그 이상을 산 후에는 또다시 죽음을 경험하고 윤회의 바퀴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힌두교와 원시 불교 혹은 초기 불교의 영향권에 속한 사람들의 원함은 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두 번 다시는 여섯 세상 어디에도 들어와 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남이 해탈(解脫)이요, 벗어난 상태가 열반(涅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과 현상은 계속 변하는 것으로 실체를 지니지 않은 공(空)이므로, 이것을 깨닫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욕망을 끊을 때 자신을 윤회 세계로 태어나게 하는 업(業)은 소멸된다. 그렇게 되면 윤회의 생존(生存)으로부터 해방된다.”고 가르칩니다. 초기의 열반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정적(靜寂),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열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는 ”꺼져버린 상태“를 뜻하는데, 곧 생명의 불꽃이 꺼져서 없어진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최초의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보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석가(釋迦)에게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는데, 이에 대해 석가(釋迦)는 “그에게는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 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에서는 벗어나고 싶지만 생명이 영원히 정지 혹은 사라져버리는 허무(虛無)는 원치 않습니다.
이에 그들은 열반(涅槃)의 본래의 의미에 대하여 불만족했는데, 2-3세기에 걸쳐서 불교가 중국과 한국에 전파되고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열반에 들어가면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비교종교학자들은 이것이 도마(Apostle Thomas)에 의해서 인도와 중국에 전파되어진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열반은 기독교의 천국(天國)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즉, 정토(淨土)나 불국토(佛國土)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말과 결부되어 환희와 행복과 영생의 세상에 사는 삶이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나온 사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復活)은 타종교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독특(獨特)하고 탁월(卓越)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후기 대승불교는 미래(未來) 부처인 미륵불(彌勒佛)--마이트레야가 56억 7천만년 후에 이 땅에 강림하여 이 세상사람들을 구원할 때 그동안 열반에 들어갔던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다시 오고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바로 메시아(Messiah) 사상--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우리가 증거하기를 원하는 복음(福音)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인데, 그 구원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매일 새로운 삶이 보장되는 세계(=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 때 그 믿음은 선생과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구세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지상생애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가 과연 오늘까지 존재하였을까요?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들은 다만 다른 성인들의 말씀과 같이 교훈적인 것으로 학교의 윤리시간에 참고문헌 정도는 되었을지언정 그의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들이 목숨까지도 바쳐서 전하고자 하는 사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망한 마음으로 뿔뿔히 흩어져서 공친 3년여 세월을 한탄하며 좌절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갔을 것입니다.
2
앞에서 분쟁(1-4장), 음행(5-7장), 우상숭배(8-10장)와 공중예배시(11-14장)의 문제들을 다룬 바울은 15장에서는 부활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모범적이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에 부활신앙이 없다면 그 교회는 윤리적인 집단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주님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고백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믿지 못할진데 우리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를 믿는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다 헛된 것일 뿐입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그가 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말씀합니까?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복음의 본질이 있는데--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永生)에 이르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부활하지 못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이 세상의 삶을 살다가 죽어서 몸의 부활(bodily resurrection)을 맛보지 못한 체 그저 그렇게 무덤에서 썩어버릴 것입니다.
2절에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비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고린도 교인들이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구원(救援)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번 육신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대로 부활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부활시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살면 그것으로 족하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에게 믿음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하지 않아요?’라고 반문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마음 속에서 먼저 평안과 기쁨이 샘솟는 천국 상태’를 느끼는 것이 필요함은 소망 중에 더욱 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실제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3-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우리의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는데, 시편 17편 10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호세아서 6장 2절에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말씀하고,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표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사흘간 음부에 머물러 계시다가 부활하실 것을 예표하였습니다.
5-8절에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滿朔)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은밀히 이루어지고 얘기되어온 사건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사건은, 복음서에 증언되는 대로,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은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증언하고, 1장 9절은 많은 무리들(바울의 500여 형제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심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과 26장에서 증거하는 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가다가 빛 가운데 임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매 그의 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9장 1-2절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했고, 21장 4-5절에는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라고 했고, 26장 9-11절에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可便)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석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라고 자신의 한 일들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바울이었지만,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매 그의 삶이 변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사도행전 26장 8절에서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그곁의 무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질문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였습니다. 이 일을 증거케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내준 바울의 허물은,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커다란 잘못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매 그를 죄 가운데 내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를 맛본 바울이 그의 남은 생애를 온전히 바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지만 그것이 그의 수고의 까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까지는 우리는 무익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부활(復活)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몸과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11절에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기타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것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평안한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와 함께 부활되고 기쁨과 평안함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가 전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음으로 믿기를 소망합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교회와 믿음은 죽은 교회요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커다란 가르침이나 윤리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힌두교나 (초기) 불교의 끊임없는 윤회로부터의 탈출인 열반(涅槃)이 복음(福音)--복된 소식이 되지 못함은 그 안에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의 모든 한계성을 뛰어넘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가 바라볼 것이 과연 무엇인가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봄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간구를 통하여 모든 교우님들이 생활 중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여러분을 더 이상 고통과 번민 가운데 가두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과,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함과, 삶에 대한 번뇌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지 못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우리도 부활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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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언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불리는 갖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인 것은 죽는 것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외에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증오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삶 중에 안보고 안듣고 지내면 참 좋을듯한데 이런 사람이 주위에 있어 이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인간의 미움이 승(乘)할 때 그 정도가 어떠한지 짐작케 합니다. 구불득고(求不得苦)--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인데, 이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한국사람이 박사학위를 얻고자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고 세월만 계속 흘러가자 실성하게된 예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여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양가 부모님의 결혼승낙을 얻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은 재물을 크게 모으기를 소원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업에 실패할 때 이 고통이 또한 상당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인데 정작 본인은 얻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는 다,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불득고(求不得苦)가 있습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란 것이 있는데 이는 번뇌의 고통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만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번민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설에 따르면 한 생명은 여섯 세상--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과 천상(天上)--사이를 영원한 옛날부터 영원한 미래에 걸쳐 계속해서 윤회전생(輪廻轉生)합니다. 따라서, 한 생명은 이 여섯 세계를 영원히 윤회(輪廻)하고 전생(轉生: trnasmigration)하는데 이것이 고통입니다(구보 아리마사,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 참조함). 한 세상에서의 죄업(罪業)이 큰 중생은 여섯 세상 중 고통이 가장 심한 지옥(地獄)에 떨어질 수 있는데, 한번 지옥에 가면 아무리 짧아도 1조 6,200억 년 동안은 그곳의 심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섯 세상중 제일 좋은 곳이 천상(天上)인데, 이곳은 여러 가지 쾌락으로 가득차 있어 고통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중생에게는 이곳에 사는 것도 고통인데, 그 까닭은 이곳에서의 삶도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900만 년 혹은 그 이상을 산 후에는 또다시 죽음을 경험하고 윤회의 바퀴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힌두교와 원시 불교 혹은 초기 불교의 영향권에 속한 사람들의 원함은 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두 번 다시는 여섯 세상 어디에도 들어와 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남이 해탈(解脫)이요, 벗어난 상태가 열반(涅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과 현상은 계속 변하는 것으로 실체를 지니지 않은 공(空)이므로, 이것을 깨닫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욕망을 끊을 때 자신을 윤회 세계로 태어나게 하는 업(業)은 소멸된다. 그렇게 되면 윤회의 생존(生存)으로부터 해방된다.”고 가르칩니다. 초기의 열반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정적(靜寂),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열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는 ”꺼져버린 상태“를 뜻하는데, 곧 생명의 불꽃이 꺼져서 없어진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최초의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보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석가(釋迦)에게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는데, 이에 대해 석가(釋迦)는 “그에게는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 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에서는 벗어나고 싶지만 생명이 영원히 정지 혹은 사라져버리는 허무(虛無)는 원치 않습니다.
이에 그들은 열반(涅槃)의 본래의 의미에 대하여 불만족했는데, 2-3세기에 걸쳐서 불교가 중국과 한국에 전파되고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열반에 들어가면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비교종교학자들은 이것이 도마(Apostle Thomas)에 의해서 인도와 중국에 전파되어진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열반은 기독교의 천국(天國)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즉, 정토(淨土)나 불국토(佛國土)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말과 결부되어 환희와 행복과 영생의 세상에 사는 삶이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나온 사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復活)은 타종교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독특(獨特)하고 탁월(卓越)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후기 대승불교는 미래(未來) 부처인 미륵불(彌勒佛)--마이트레야가 56억 7천만년 후에 이 땅에 강림하여 이 세상사람들을 구원할 때 그동안 열반에 들어갔던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다시 오고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바로 메시아(Messiah) 사상--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우리가 증거하기를 원하는 복음(福音)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인데, 그 구원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매일 새로운 삶이 보장되는 세계(=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 때 그 믿음은 선생과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구세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지상생애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가 과연 오늘까지 존재하였을까요?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들은 다만 다른 성인들의 말씀과 같이 교훈적인 것으로 학교의 윤리시간에 참고문헌 정도는 되었을지언정 그의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들이 목숨까지도 바쳐서 전하고자 하는 사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망한 마음으로 뿔뿔히 흩어져서 공친 3년여 세월을 한탄하며 좌절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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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분쟁(1-4장), 음행(5-7장), 우상숭배(8-10장)와 공중예배시(11-14장)의 문제들을 다룬 바울은 15장에서는 부활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모범적이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에 부활신앙이 없다면 그 교회는 윤리적인 집단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주님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고백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믿지 못할진데 우리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를 믿는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다 헛된 것일 뿐입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그가 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말씀합니까?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복음의 본질이 있는데--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永生)에 이르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부활하지 못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이 세상의 삶을 살다가 죽어서 몸의 부활(bodily resurrection)을 맛보지 못한 체 그저 그렇게 무덤에서 썩어버릴 것입니다.
2절에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비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고린도 교인들이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구원(救援)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번 육신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대로 부활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부활시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살면 그것으로 족하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에게 믿음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하지 않아요?’라고 반문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마음 속에서 먼저 평안과 기쁨이 샘솟는 천국 상태’를 느끼는 것이 필요함은 소망 중에 더욱 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실제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3-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우리의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는데, 시편 17편 10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호세아서 6장 2절에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말씀하고,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표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사흘간 음부에 머물러 계시다가 부활하실 것을 예표하였습니다.
5-8절에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滿朔)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은밀히 이루어지고 얘기되어온 사건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사건은, 복음서에 증언되는 대로,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은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증언하고, 1장 9절은 많은 무리들(바울의 500여 형제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심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과 26장에서 증거하는 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가다가 빛 가운데 임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매 그의 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9장 1-2절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했고, 21장 4-5절에는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라고 했고, 26장 9-11절에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可便)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석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라고 자신의 한 일들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바울이었지만,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매 그의 삶이 변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사도행전 26장 8절에서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그곁의 무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질문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였습니다. 이 일을 증거케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내준 바울의 허물은,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커다란 잘못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매 그를 죄 가운데 내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를 맛본 바울이 그의 남은 생애를 온전히 바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지만 그것이 그의 수고의 까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까지는 우리는 무익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부활(復活)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몸과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11절에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기타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것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평안한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와 함께 부활되고 기쁨과 평안함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가 전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음으로 믿기를 소망합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교회와 믿음은 죽은 교회요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커다란 가르침이나 윤리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힌두교나 (초기) 불교의 끊임없는 윤회로부터의 탈출인 열반(涅槃)이 복음(福音)--복된 소식이 되지 못함은 그 안에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의 모든 한계성을 뛰어넘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가 바라볼 것이 과연 무엇인가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봄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간구를 통하여 모든 교우님들이 생활 중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여러분을 더 이상 고통과 번민 가운데 가두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과,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함과, 삶에 대한 번뇌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지 못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우리도 부활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행전 2:22-36)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행전 2:22-36)
1
전에 한국에 신비주의에 몰입한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같이 자기의 육신도 부활할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기분은 확신으로 바뀌고, 해서 그는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내가 죽은지 사흘만에 반드시 다시 살아날 터이니까 내가 죽거든 나의 시신을 관에 담아 본당 앞에다 안치하고 관뚜껑을 열어놓으시오. 그리하면, 사흘만에 내가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이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을 신적 존재로 여기고 있던 터라, 목사님의 당부에 따라 목사님이 숨을 거둔 후 사흘동안 관 뚜껑을 열어놓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목사님이 부활할지도 모른다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때가 초여름인데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목사님이 소생하기는커녕 심한 냄새가 나기까지 합니다.
죽었다가 잠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혹 듣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회생입니다. 이는 그가 다시 살아났지만, 반드시 육신으로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생은 부활의 모형(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느 모슬렘 교도가 한 그리스도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갖지 못한 것 한 가지를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것이 뭐냐고 묻자, 그 모슬렘 교도는 의기양양하게 “메디나(Medina)에 가면 마호메트(Mahomet=Muhammad: 이슬람교 창시자, 570-632)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 밖에는 볼 수 없죠?!” “그 그리스도인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대답합니다. ”잘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는 없는 것이랍니다.“
기독교(그리스도인이 속한 것은 삶 그 자체이지만, 굳이 종교로 분류한다면)는 ‘빈 무덤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제외한다면, 이는 마치 찐빵에서 그 속알맹이인 ‘앙꼬(=단팥)’를 제하여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곧, 앙꼬 없는 찐빵이 됩니다. 아무 맛도 없을 뿐 아니라 입맛을 버리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반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는 성도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믿다가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15:14-18). 우리의 바라보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인생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15:19).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되지 않고, 우리가 불쌍한 자들이 아니라 축복된 자들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고,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는 모든 인생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에 동참하게 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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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권능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요즘은 전도를 할 때,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리하면, 세상에서 복 받습니다. 하는 일들이 잘 됩니다. 자녀가 축복을 받습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전도의 내용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목격자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가 오늘 외치는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2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순절의 절기를 맞이하여서 각 나라 각 지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에 성령의 강한 역사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하셨는데, 그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하던 소리가 하도 크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이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일어나서 부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경륜의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예수님의 무고하신 죽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삼 년여의 공생애 삶을 살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법 없는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아주 머물러 두지 아니하시고 그를 사망의 고통과 어둠에서 풀어내어 살리셨습니다.
25-28절에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라고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였습니다.
다윗의 시(시편 16:8-11)에 음부(=무덤, grave)에 머물러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장차 (영적) 이스라엘에 임하실 그리스도인줄 모르고, 예언적 고백을 시로 옮겼지만 이는 부활하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임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들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고,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을 예언합니다.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시가 일인칭으로 쓰여졌지만 그것이 다윗 본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예표적 시인 것은, 다윗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체는 무덤에 묻히고, 썩었으며, 그 묘가 여전히 이스라엘 가운데 있음으로 분명하다고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30-31절에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지자로 사용하시고, 그 가정을 축복하사 다윗의 혈통에서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나오게 하시고 그를 다윗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구속자로서)으로 삼으실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인하여 미리 보게 하시사(다윗 그 자신이 실제로 메시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미리 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가 이를 미리 예언 기록한 것을 가리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관하여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시지만, 음부(=무덤, grave)에 그 육신이 버린 바 되지도 아니하며 썩지도 아니하여 부활될 것임을 미리 기록케 하셨습니다.
32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의 시편에서 이미 예언해 놓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을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그밖에 제자들,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느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손을 드셔서 예수를 높이시고 그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0-22절에서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시매 그가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증거를 통하여 그 성령의 역사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도(요한 14:16, 26, 16:7, 13),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행전 1:4-5)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은 오순절이 이미 이르매 그의 약속하신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시고 그들로 성령 충만한 상태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은, 그들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삶을 살도록 하게 하심입니다.
34-35절에 “다윗은 하늘에 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라고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다윗의 예언을 빌어 또 증거합니다. 다윗의 시 110편 1절에 나오는 “내 주”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고 모든 원수, 사단의 권세를 주님의 발 아래 복종시키실 계획을 실현하실 때까지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그의 우편에 앉히신 것을 반복하여 강조합니까?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결탁하여 죽인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사실을 밝히 천명(喘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요 다윗의 시(16:8-11, 110:1)에 이미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예수님을 저주 받은 자 처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로 만주의 주님(Lord) 되게 하시고 그뿐아니라 그리스도--메시아(Savior)되게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Lord)과 메시아(Savior)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실뿐 아니라 우리가 이 일에 증인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시어 만주의 주와 구세주 되신 예수님에 관한 베드로의 증거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전 2:37)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전 2:38)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에게 담대하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매, 이날에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된 사람의 숫자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전 2:41).
3
전승(=외경 베드로행전 35장, Acts of Peter 35)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네로의 박해가 하도 심하여 이를 피하여 로마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가 로마를 빠져나오는 길에 로마로 향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이에 베드로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히게 됩니다.
그가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될 때, 베드로는 집행관에게 부탁합니다. “나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는데, 내가 그분과 똑같은 죽음을 당할 수 없다. 나는 거꾸로 매어달려 죽게 해달라.”
바로 매어 달려 죽는 것도 고통의 극인데, 거꾸로 매어달려 죽는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베드로는 그가 육신으로 죽어도 부활될 것을 믿었기에 그러한 죽음을 자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시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속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입을 열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항상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1
전에 한국에 신비주의에 몰입한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같이 자기의 육신도 부활할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기분은 확신으로 바뀌고, 해서 그는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내가 죽은지 사흘만에 반드시 다시 살아날 터이니까 내가 죽거든 나의 시신을 관에 담아 본당 앞에다 안치하고 관뚜껑을 열어놓으시오. 그리하면, 사흘만에 내가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이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을 신적 존재로 여기고 있던 터라, 목사님의 당부에 따라 목사님이 숨을 거둔 후 사흘동안 관 뚜껑을 열어놓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목사님이 부활할지도 모른다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때가 초여름인데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목사님이 소생하기는커녕 심한 냄새가 나기까지 합니다.
죽었다가 잠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혹 듣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회생입니다. 이는 그가 다시 살아났지만, 반드시 육신으로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생은 부활의 모형(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느 모슬렘 교도가 한 그리스도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갖지 못한 것 한 가지를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것이 뭐냐고 묻자, 그 모슬렘 교도는 의기양양하게 “메디나(Medina)에 가면 마호메트(Mahomet=Muhammad: 이슬람교 창시자, 570-632)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 밖에는 볼 수 없죠?!” “그 그리스도인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대답합니다. ”잘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는 없는 것이랍니다.“
기독교(그리스도인이 속한 것은 삶 그 자체이지만, 굳이 종교로 분류한다면)는 ‘빈 무덤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제외한다면, 이는 마치 찐빵에서 그 속알맹이인 ‘앙꼬(=단팥)’를 제하여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곧, 앙꼬 없는 찐빵이 됩니다. 아무 맛도 없을 뿐 아니라 입맛을 버리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반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는 성도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믿다가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15:14-18). 우리의 바라보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인생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15:19).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되지 않고, 우리가 불쌍한 자들이 아니라 축복된 자들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고,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는 모든 인생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에 동참하게 된 까닭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권능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요즘은 전도를 할 때,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리하면, 세상에서 복 받습니다. 하는 일들이 잘 됩니다. 자녀가 축복을 받습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전도의 내용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목격자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가 오늘 외치는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2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순절의 절기를 맞이하여서 각 나라 각 지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에 성령의 강한 역사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하셨는데, 그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하던 소리가 하도 크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이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일어나서 부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경륜의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예수님의 무고하신 죽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삼 년여의 공생애 삶을 살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법 없는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아주 머물러 두지 아니하시고 그를 사망의 고통과 어둠에서 풀어내어 살리셨습니다.
25-28절에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라고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였습니다.
다윗의 시(시편 16:8-11)에 음부(=무덤, grave)에 머물러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장차 (영적) 이스라엘에 임하실 그리스도인줄 모르고, 예언적 고백을 시로 옮겼지만 이는 부활하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임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들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고,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을 예언합니다.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시가 일인칭으로 쓰여졌지만 그것이 다윗 본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예표적 시인 것은, 다윗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체는 무덤에 묻히고, 썩었으며, 그 묘가 여전히 이스라엘 가운데 있음으로 분명하다고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30-31절에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지자로 사용하시고, 그 가정을 축복하사 다윗의 혈통에서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나오게 하시고 그를 다윗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구속자로서)으로 삼으실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인하여 미리 보게 하시사(다윗 그 자신이 실제로 메시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미리 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가 이를 미리 예언 기록한 것을 가리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관하여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시지만, 음부(=무덤, grave)에 그 육신이 버린 바 되지도 아니하며 썩지도 아니하여 부활될 것임을 미리 기록케 하셨습니다.
32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의 시편에서 이미 예언해 놓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을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그밖에 제자들,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느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손을 드셔서 예수를 높이시고 그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0-22절에서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시매 그가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증거를 통하여 그 성령의 역사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도(요한 14:16, 26, 16:7, 13),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행전 1:4-5)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은 오순절이 이미 이르매 그의 약속하신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시고 그들로 성령 충만한 상태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은, 그들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삶을 살도록 하게 하심입니다.
34-35절에 “다윗은 하늘에 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라고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다윗의 예언을 빌어 또 증거합니다. 다윗의 시 110편 1절에 나오는 “내 주”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고 모든 원수, 사단의 권세를 주님의 발 아래 복종시키실 계획을 실현하실 때까지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그의 우편에 앉히신 것을 반복하여 강조합니까?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결탁하여 죽인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사실을 밝히 천명(喘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요 다윗의 시(16:8-11, 110:1)에 이미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예수님을 저주 받은 자 처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로 만주의 주님(Lord) 되게 하시고 그뿐아니라 그리스도--메시아(Savior)되게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Lord)과 메시아(Savior)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실뿐 아니라 우리가 이 일에 증인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시어 만주의 주와 구세주 되신 예수님에 관한 베드로의 증거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전 2:37)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전 2:38)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에게 담대하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매, 이날에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된 사람의 숫자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전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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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외경 베드로행전 35장, Acts of Peter 35)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네로의 박해가 하도 심하여 이를 피하여 로마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가 로마를 빠져나오는 길에 로마로 향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이에 베드로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히게 됩니다.
그가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될 때, 베드로는 집행관에게 부탁합니다. “나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는데, 내가 그분과 똑같은 죽음을 당할 수 없다. 나는 거꾸로 매어달려 죽게 해달라.”
바로 매어 달려 죽는 것도 고통의 극인데, 거꾸로 매어달려 죽는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베드로는 그가 육신으로 죽어도 부활될 것을 믿었기에 그러한 죽음을 자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시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속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입을 열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항상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2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23)
1
어떤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친해지기 위한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는 것, 여행을 같이 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목욕탕에 같이 가는 것, 또는 식사를 같이 하는 것 등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그 사람의 고상한 면뿐만 아니라 약점 혹은 나쁜 버릇이나 성격까지도 알게 됩니다. 그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알면서 그 사람을 좋아할 수만 있으면 이로써 진짜 친하게 됩니다.
이 여러 가지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들 중에서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식사를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식사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적(政敵)과 어떤 사안을 협상할 때도 식사를 같이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딱딱한 분위기를 피하고 좀더 열린 마음으로 대화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얻기도 합니다. 요즘은 정치인들이나 사업가들이 골프회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식사회동이 더 많습니다.
식사를 같이 함으로써 서로 친하여지고 원만한 협상의 결과를 얻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새로운 계약관계에서도 행하여졌고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음을 봅니다.
창세기 15장 7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체결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준비하고 그 모든 짐승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창 15:9-10). 창세기 15장 17절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차려놓은 음식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식사계약’입니다. 이어 18절에 보니까,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言約)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고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도 ‘식사계약’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짐승(=소)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절)고 말한 다음 9-11절에,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였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언약(言約)을 맺으시되, 식사 자리를 허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 자리에 같이 하심은 하나님 편에서 친근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구약(舊約)을 영어로 “Old Testament"라고 하고, 신약(新約)은 “New Testament"라고 하는데 ”Testament“는 라틴어 ”Testamentum“에서 온 것으로 바르게 번역하면, 각각 ”옛 계약(=언약)“과 ”새로운 계약(=언약)“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식사계약’을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때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제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되, 모세가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계약을 선포한 것과 같이(출 24:8), 예수님은 식후에 자신의 피의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 예수님은,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 11:25 참조). 그리고, 그날 밤에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켜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에게 임할 축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아니, 그 이전, 예수님의 삼년여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고, 함께 주무시고, 수도 없이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그들과 친해지시고 신약백성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계약의 자리를 마련하셨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들이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새로운 계약 내용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도 믿는 성도들은 주 만찬(또는 약식으로 성찬)의 식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간의 ‘식사계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씀하실 때 식사를 통한 친밀한 계약관계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요한계사록 3장 20절의 그리스도의 초청을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과 새로운 계약관계에 들어가실 터인데, “더불어 먹는” 친근한 ‘식사계약’ 관계에 들어가십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과 그 자녀간의 계약 혹은 언약은 쌍방계약입니다. 한쪽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때, 다른 쪽이 자신의 약조를 파기하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맺은 계약은 조건부, 제한적 계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아니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예비하신 축복을 거두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믿는 성도들과 맺는 계약은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이라고 칭합니다. 이 계약을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이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다소 실수를 하여 죄와 허물을 범하여 계약을 잘 이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로 자녀를 다시 받아 주시며 주님의 언약의 약속을 끝까지 온전히 이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의 예는 노아와 맺은 언약 이외에 다윗과 맺은 계약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의 임종을 맞이할 때 사무엘하 23장 5절에서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 하시랴?”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의 계약 위반으로 당신의 축복의 약조를 깨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가문에서 촛대를 옮기지 아니하시고 그 가계를 축복하시되 메시아, 그리스도를 그 가문에서 나오게 하시기까지 축복하셨습니다.
2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던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날,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 디베랴 바다(또는 호수)에 나타나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요한 21:10)고 말씀하시고, 식단을 마련하신 다음에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한 21:12)고 제자들을 다시 식사 자리에 초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조반 식사를 같이 하셨다는 것은 용서와 친근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약간은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약의 의미를 일깨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본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함께 모여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대화는 다른 모든 제자들을 위함도 되지만, 그 중에 특히 베드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모든 제자들 가운데 자신의 의협심이 제일이요 주님으로 향한 충성심이 최고라고 늘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마가 14:29)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고 35절(마가 14:31)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는 “저(=베드로)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그 밤과 새벽 사이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되, 처음에는 그냥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여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부인함으로써 그 강도를 더해갔습니다(마태 26:70, 72, 74).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세 번의 연속적인 질문의 첫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이 동일한 질문의 반복인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세 번이 각각 다르십니다.
첫 번째 질문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의 심중을 드러내시는 질문입니다.
아마 동일한 질문을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에 받았었다면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었을 것입니다. “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제가 주님을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사랑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지않습니까?” 그의 대답은 자신만만하며 당돌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죽기까지 사랑함에 실패를 경험한 현재의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ναὶ κύριε, σὺ οἶδας ὅτι φιλώ σε).
그가 주님을 부인하기 전에 했음직한 대답과 현재의 대답 사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첫째는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주님의 질문에 확신있게 “예 제가 이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무모함이 그에게 없어졌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때나 어떤 환경에도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를 물으시기 위해서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베드로는 감히 이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제가 주어진 형편과 때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할려고 노력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 한정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φιλέω)의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베드로가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감으로,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마음이었을 때에는 아직 당부하지 않으시던 사명입니다.
만일 그 이전에 이러한 사명을 맡기셨으면, 그는 이 사명 감당함을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기분으로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팽개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한 그에게는 그의 능력과 감정을 더 이상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부족을 알기에 오직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함을 허락하시고 이를 우리로 인정하게 하는 것도 감사이고 은혜인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입니다.
16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두 번째 질문하실 때에는 첫 번째 질문에서 사용하셨던 ‘비교’의 의미의 “이 사람들보다 더”를 빼고 질문하십니다.“이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베드로가 잘 압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도 예수님은 “어떤 때에나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하느냐?”의 의미의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질문하십니다. 이는 베드로의 마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럴 수 없는 제한적이고 부족한 사람인 것을 철저히 인정케 하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사랑’에 관한 세 번의 질문의 강도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부인(否認)의 강도의 역순(逆順)입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맹세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는 순으로 강도를 더해가면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질문의 강도를 감해가면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의 ‘허물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17절: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는 이제 “이 사람들보다 더”라고 하는 비교(比較)의 부담(負擔)도, “아가파오”(ἀγαπάω)라고 하는 “무조건적이요 절대적인 사랑”의 부담(負擔)도 빠져 있습니다. 현재의 베드로가 할 수 있음직한 대답의 수준에서 “필레오”(φιλέω)--곧, “너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세 번의 반복되는 질문이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의 마음을 (적어도 이 질문을 연속적으로 받는 당시에는) 불안하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근심하여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κύριε, πάντα σὺ οἶδας, σὺ γινώσκεις ὅτι φιλώ σε). ‘주님께서는 저의 모든 것--마음으로부터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도 아시고, 그러나 저의 사랑의 표현이 환경 가운데 얼마나 부족한 것인 줄도 이미 보아서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대답입니다.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인정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사명을 당부하심으로 베드로와의 계약(covenant)을 마감하십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생이 어떻게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주후 39-44년) 때에 그의 원치 않는 감옥에 투옥되고(행전 12:3-19), 또한 후에 네로 때(64-66년경)에는 체포당하여 네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처형(외경 베드로행전 35장)을 당하였다는 전승(傳乘)이 있습니다.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베드로 앞에 어려움과 죽음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지만, 그러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대장되신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ἀκολούθει μοι, Follow me)”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불가능하거나 힘든 일처럼 보이지만,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니고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나에게 사명을 맡기신 주님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인도하십니다.
20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풍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예수님께로부터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임을 들은 베드로가 돌아보니 함께 걷고 있는 베드로와 예수님을 따라오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다른 제자를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제자가 ‘요한 자신’(어떤 성경학자들은 제삼의 제자로 추론하기도 하지만)임을 암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제자는 요한복음 13장 23-25절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주님을 팔 자가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할 정도로 예수님과 친근감이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들은 다음에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뛰어가되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같이 빠르게 달려갈 정도로 베드로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 제자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베드로의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어떤 모양의 순교를 당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 능력이 이만한 데 내가 왜 저 사람보다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거야?’
‘내 믿음이 저 사람의 믿음보다 나은데, 하나님은 왜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축복하시는거야?’
이러한 끊임없는 비교가 하나님께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들게 합니다.
비교는 사단의 미혹의 절대적 수단입니다.
이 비교가 최초의 사람, 하와를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옛뱀의 미혹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것(=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즉, “하나님만큼 너희도 지혜로와질 것”이라는 하나님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하와가 넘어진 것입니다.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과 계획은 상대적이거나, 비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독특하고 개별적인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인생의 계획은 다른 사람보다 낫다 못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과 뜻을 내가 잘 지켜 행하고 있는가 못한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네 할 일이나 잘하라”(Mind your own business)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σύ μοι ἀκολούθει: You, follow me)고 다시 한 번 권고하실 때, “너는”(σύ)에 힘을 주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장래의 일에 지나친 호기심도 갖지 말고, ‘너는’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23절: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어떠한 생을 살도록 계획하시고 허락하시든지 신경쓰지 말고 너의 감당할 일이나 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네로의 기독교 핍박시에 체포되어 주후 65-66년경에 죽음을 당한 반면에,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된 적이 있긴 하지만,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90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100년을 전후하여 비교적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3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반을 나누심으로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시고 그의 피와 몸으로 맺으신 새로운 계약을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다른 제자들이 주님과 쌍방계약관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행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과 계약관계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허물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우리를 늘 인도하시고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그와 식사계약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일상의 삶 중에 그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까?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생활하시는 삶을 즐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감당하되 부족함을 염려할 것이 없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며, 위로하시며, 격려하시며,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어떤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친해지기 위한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는 것, 여행을 같이 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목욕탕에 같이 가는 것, 또는 식사를 같이 하는 것 등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그 사람의 고상한 면뿐만 아니라 약점 혹은 나쁜 버릇이나 성격까지도 알게 됩니다. 그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알면서 그 사람을 좋아할 수만 있으면 이로써 진짜 친하게 됩니다.
이 여러 가지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들 중에서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식사를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식사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적(政敵)과 어떤 사안을 협상할 때도 식사를 같이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딱딱한 분위기를 피하고 좀더 열린 마음으로 대화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얻기도 합니다. 요즘은 정치인들이나 사업가들이 골프회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식사회동이 더 많습니다.
식사를 같이 함으로써 서로 친하여지고 원만한 협상의 결과를 얻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새로운 계약관계에서도 행하여졌고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음을 봅니다.
창세기 15장 7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체결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준비하고 그 모든 짐승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창 15:9-10). 창세기 15장 17절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차려놓은 음식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식사계약’입니다. 이어 18절에 보니까,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言約)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고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도 ‘식사계약’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짐승(=소)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절)고 말한 다음 9-11절에,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였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언약(言約)을 맺으시되, 식사 자리를 허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 자리에 같이 하심은 하나님 편에서 친근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구약(舊約)을 영어로 “Old Testament"라고 하고, 신약(新約)은 “New Testament"라고 하는데 ”Testament“는 라틴어 ”Testamentum“에서 온 것으로 바르게 번역하면, 각각 ”옛 계약(=언약)“과 ”새로운 계약(=언약)“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식사계약’을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때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제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되, 모세가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계약을 선포한 것과 같이(출 24:8), 예수님은 식후에 자신의 피의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 예수님은,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 11:25 참조). 그리고, 그날 밤에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켜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에게 임할 축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아니, 그 이전, 예수님의 삼년여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고, 함께 주무시고, 수도 없이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그들과 친해지시고 신약백성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계약의 자리를 마련하셨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들이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새로운 계약 내용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도 믿는 성도들은 주 만찬(또는 약식으로 성찬)의 식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간의 ‘식사계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씀하실 때 식사를 통한 친밀한 계약관계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요한계사록 3장 20절의 그리스도의 초청을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과 새로운 계약관계에 들어가실 터인데, “더불어 먹는” 친근한 ‘식사계약’ 관계에 들어가십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과 그 자녀간의 계약 혹은 언약은 쌍방계약입니다. 한쪽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때, 다른 쪽이 자신의 약조를 파기하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맺은 계약은 조건부, 제한적 계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아니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예비하신 축복을 거두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믿는 성도들과 맺는 계약은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이라고 칭합니다. 이 계약을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이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다소 실수를 하여 죄와 허물을 범하여 계약을 잘 이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로 자녀를 다시 받아 주시며 주님의 언약의 약속을 끝까지 온전히 이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의 예는 노아와 맺은 언약 이외에 다윗과 맺은 계약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의 임종을 맞이할 때 사무엘하 23장 5절에서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 하시랴?”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의 계약 위반으로 당신의 축복의 약조를 깨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가문에서 촛대를 옮기지 아니하시고 그 가계를 축복하시되 메시아, 그리스도를 그 가문에서 나오게 하시기까지 축복하셨습니다.
2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던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날,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 디베랴 바다(또는 호수)에 나타나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요한 21:10)고 말씀하시고, 식단을 마련하신 다음에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한 21:12)고 제자들을 다시 식사 자리에 초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조반 식사를 같이 하셨다는 것은 용서와 친근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약간은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약의 의미를 일깨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본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함께 모여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대화는 다른 모든 제자들을 위함도 되지만, 그 중에 특히 베드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모든 제자들 가운데 자신의 의협심이 제일이요 주님으로 향한 충성심이 최고라고 늘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마가 14:29)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고 35절(마가 14:31)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는 “저(=베드로)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그 밤과 새벽 사이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되, 처음에는 그냥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여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부인함으로써 그 강도를 더해갔습니다(마태 26:70, 72, 74).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세 번의 연속적인 질문의 첫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이 동일한 질문의 반복인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세 번이 각각 다르십니다.
첫 번째 질문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의 심중을 드러내시는 질문입니다.
아마 동일한 질문을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에 받았었다면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었을 것입니다. “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제가 주님을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사랑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지않습니까?” 그의 대답은 자신만만하며 당돌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죽기까지 사랑함에 실패를 경험한 현재의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ναὶ κύριε, σὺ οἶδας ὅτι φιλώ σε).
그가 주님을 부인하기 전에 했음직한 대답과 현재의 대답 사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첫째는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주님의 질문에 확신있게 “예 제가 이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무모함이 그에게 없어졌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때나 어떤 환경에도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를 물으시기 위해서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베드로는 감히 이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제가 주어진 형편과 때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할려고 노력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 한정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φιλέω)의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베드로가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감으로,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마음이었을 때에는 아직 당부하지 않으시던 사명입니다.
만일 그 이전에 이러한 사명을 맡기셨으면, 그는 이 사명 감당함을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기분으로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팽개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한 그에게는 그의 능력과 감정을 더 이상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부족을 알기에 오직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함을 허락하시고 이를 우리로 인정하게 하는 것도 감사이고 은혜인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입니다.
16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두 번째 질문하실 때에는 첫 번째 질문에서 사용하셨던 ‘비교’의 의미의 “이 사람들보다 더”를 빼고 질문하십니다.“이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베드로가 잘 압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도 예수님은 “어떤 때에나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하느냐?”의 의미의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질문하십니다. 이는 베드로의 마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럴 수 없는 제한적이고 부족한 사람인 것을 철저히 인정케 하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사랑’에 관한 세 번의 질문의 강도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부인(否認)의 강도의 역순(逆順)입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맹세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는 순으로 강도를 더해가면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질문의 강도를 감해가면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의 ‘허물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17절: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는 이제 “이 사람들보다 더”라고 하는 비교(比較)의 부담(負擔)도, “아가파오”(ἀγαπάω)라고 하는 “무조건적이요 절대적인 사랑”의 부담(負擔)도 빠져 있습니다. 현재의 베드로가 할 수 있음직한 대답의 수준에서 “필레오”(φιλέω)--곧, “너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세 번의 반복되는 질문이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의 마음을 (적어도 이 질문을 연속적으로 받는 당시에는) 불안하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근심하여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κύριε, πάντα σὺ οἶδας, σὺ γινώσκεις ὅτι φιλώ σε). ‘주님께서는 저의 모든 것--마음으로부터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도 아시고, 그러나 저의 사랑의 표현이 환경 가운데 얼마나 부족한 것인 줄도 이미 보아서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대답입니다.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인정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사명을 당부하심으로 베드로와의 계약(covenant)을 마감하십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생이 어떻게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주후 39-44년) 때에 그의 원치 않는 감옥에 투옥되고(행전 12:3-19), 또한 후에 네로 때(64-66년경)에는 체포당하여 네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처형(외경 베드로행전 35장)을 당하였다는 전승(傳乘)이 있습니다.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베드로 앞에 어려움과 죽음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지만, 그러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대장되신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ἀκολούθει μοι, Follow me)”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불가능하거나 힘든 일처럼 보이지만,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니고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나에게 사명을 맡기신 주님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인도하십니다.
20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풍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예수님께로부터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임을 들은 베드로가 돌아보니 함께 걷고 있는 베드로와 예수님을 따라오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다른 제자를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제자가 ‘요한 자신’(어떤 성경학자들은 제삼의 제자로 추론하기도 하지만)임을 암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제자는 요한복음 13장 23-25절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주님을 팔 자가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할 정도로 예수님과 친근감이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들은 다음에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뛰어가되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같이 빠르게 달려갈 정도로 베드로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 제자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베드로의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어떤 모양의 순교를 당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 능력이 이만한 데 내가 왜 저 사람보다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거야?’
‘내 믿음이 저 사람의 믿음보다 나은데, 하나님은 왜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축복하시는거야?’
이러한 끊임없는 비교가 하나님께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들게 합니다.
비교는 사단의 미혹의 절대적 수단입니다.
이 비교가 최초의 사람, 하와를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옛뱀의 미혹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것(=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즉, “하나님만큼 너희도 지혜로와질 것”이라는 하나님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하와가 넘어진 것입니다.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과 계획은 상대적이거나, 비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독특하고 개별적인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인생의 계획은 다른 사람보다 낫다 못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과 뜻을 내가 잘 지켜 행하고 있는가 못한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네 할 일이나 잘하라”(Mind your own business)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σύ μοι ἀκολούθει: You, follow me)고 다시 한 번 권고하실 때, “너는”(σύ)에 힘을 주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장래의 일에 지나친 호기심도 갖지 말고, ‘너는’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23절: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어떠한 생을 살도록 계획하시고 허락하시든지 신경쓰지 말고 너의 감당할 일이나 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네로의 기독교 핍박시에 체포되어 주후 65-66년경에 죽음을 당한 반면에,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된 적이 있긴 하지만,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90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100년을 전후하여 비교적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3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반을 나누심으로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시고 그의 피와 몸으로 맺으신 새로운 계약을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다른 제자들이 주님과 쌍방계약관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행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과 계약관계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허물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우리를 늘 인도하시고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그와 식사계약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일상의 삶 중에 그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까?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생활하시는 삶을 즐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감당하되 부족함을 염려할 것이 없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며, 위로하시며, 격려하시며,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Wednesday, March 27, 2013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주님” (요한 21:1-14)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주님” (요한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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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을 하면서 여행객이 겪는 큰 어려움이 있다면 그 중에 식사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는 전혀 식사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국인 목사님들뿐 아니라 미국인 목사님들도 식사시간을 즐거움으로 기다렸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빵과 생선요리가 맛있다고 했습니다. 빵과 생선요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 중에 적어도 두 가지는 빵과 물고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섯 개의 빵(=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시고 열 두 바구니를 남기신 기적과 일곱 개의 빵(=떡)과 두어 마리의 물고기로 4,000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신 기적이 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간이 음식점의 주 메뉴가 생선이며 그 이름도 “베드로 생선(Peter's Fish)"이었습니다. 유대인 식당을 가든지 아랍인 식당을 가든지 속이 빈 납작한 빵의 맛이 일품이었는데 그 빵의 이름이 "피터 브레드(Pita Bread)"였습니다. 속에 샐러드(salad)를 집어넣어 먹기도 하고, 입맛을 돋구는 것에 찍어먹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장삿속으로 베드로의 이름을 너무 남용한다 하였는데, 알고 보니 이 빵의 이름은 ”Peter"가 아니라 “Pita"였습니다.
갈릴리 해는 호수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바다 같은 느낌이 들고 또 바다라고 하기에는 물이 막혀있어 좀 어색하지만, 안내를 맡은 유대인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 갈릴리를 “호수”라고 부르지 않고 “바다”(Se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접한 마을의 이름을 따라 성경에 보면, 게네사렛 호숫가(누가 5:1) 혹은 디베랴 바다(요한복음 6:1, 21:1)라고도 불립니다..
예수님께서 5병 2어의 기적을 베푸셨다는 답가(Tabgha)라고 하는 곳에서 언덕을 내려와 오후 5시경에 “예수님의 배”(The Jesus Boat)라고 명명된 배를 탔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탄 것으로 추정되는 배의 네 배 크기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호수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인데, 배를 탈 때에는 잔잔하던 물결이 배를 타고 갈릴리 해의 한 가운데쯤 오니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 파도가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배에서,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하면, 마가복음 4장(35-41절)에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물결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또, 배의 엔진을 끈 상태에서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어둑어둑해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그려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붙잡히시던 금요일은 한 밤중부터 하루종일 고난과 실망과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든 제자들이 흩어졌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같은 뜰에 있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否認)하였습니다. 몇몇 제자들이 먼 발치에서 예수님이 이제라도 무슨 초인적인 힘과 기적을 보이시겠지 막연한 기대를 갖고 바라보지만 그들의 바램은 좀처럼 이루어질 기미가 없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아침 9시에 “슬픔의 길”(Via Dolorosa)이라고 불리게 된 그 길을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시며 걸어가십니다. 로마 병정이 힘에 겨워하시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하고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달리십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단은 그 군중들의 목소리로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시며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태 27:40; 마가 15:29-30), “네가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너를 구원하라”(누가 23:35),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 27:42),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너를 구원하라”(누가 23:37).
제자들도 물론 입장은 다르지만 이들과 비슷한 외침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의 진정한 메시야시라면 지금 이 순간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조롱하는 이 무리들을 멸하소서! 그리고 우리의 왕이 되소서.”
그러나, ‘자기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섯 시간동안 십자가상에서 고통 당하시다가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시는 순간을 지켜보는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또 다른 마리아와 여인들, 그리고 멀리 서있는 제자들의 마음은 이제까지의 노고가 헛된 것임을 자각함에 따른 한없는 실망과 좌절과 또 분노로 휩싸입니다.
무덤에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을 머물러 계시던 예수님은 안식후 첫날 새벽 미명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모습을, 예수님을 그 마음 속에서부터 가장 많이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그 후에 그날 저녁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요한복음 20:2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씀하실 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님은 사명 맡기기를 원하시는데 곧,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행전에도 기록된 바와 같이 ”성령과 그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의심많은 제자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한 차례 더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팔일이 지난 날, 열 한 제자가 다 모여있고 문들이 닫혀있는데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도마는 감격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며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2
오늘 본문 사건은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을 제외하고 그가 친히 사도로 부르신 제자들에게는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3-35절과 마가복음 16장 12절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글로바와 다른 제자들에게 한번 더 나타나셨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사도로 부르신 제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에서 마태는 갈릴리의 한 산에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은 누가복음 5장 1절이하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장면과 흡사합니다.
그 날도 밤이 맞도록 고기잡이를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새벽녘에 돌아와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있는 어부들과 두 배를 보시고 그 중에 한 배에 오르시어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때 시몬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더니 잡힌 물고기가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갈릴리로 돌아가라 하신 말씀을 듣고, 또 전에 고난 당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생각나 갈릴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몰라 세월만 보내고있을 뿐입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머물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고 사명을 맡기셨는데 그들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대신에, 아니면 주님께서 그리하셨듯이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대신에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마저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함을 등한시할 때, 우리의 기억과 체험은 나의 삶에서 가물가물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과 야곱과 요한과 다른 두 제자, 이렇게 일곱명이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무료하게 날을 보내던 그들이 예전과 같이 물고기를 잡으러 가고자 합니다. 하루밤을 꼬박 새웠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날이 거의 밝아 배를 바닷가로 저어오는데,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외칩니다 5절에, “얘들아(=이 사람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로 번역된 ‘파이디아(παιδία)’는 친근한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인데, 날이 아직 채 밝지 않아 그들을 이와같이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을 잘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또 외칩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말씀에 확신이 있으며 권위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끌리는 마음으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에 요한복음에 몇 번 반복되어서 기록되고 있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한으로 추정되는 그 제자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라” 말할 때,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배가 해안 가에 닿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허둥지둥 물 속에서 빨리 뛰어가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아마도 착잡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뵈었지만 그때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했을 것이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주님은 이미 사라지셨습니다. 육지에 오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숯불과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 하시고선, 그가 굽고 계시던 떡과 생선과 함께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십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주님이 부활의 한 증거였다고 한다면, 갈릴리에 나타나신 주님은 그들이 이제 이후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러하기에, 식후에 베드로에게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시며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21:18-19).
갈릴리 바닷가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주님께서 어부이던 그들을 부르실 때,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마태 4:19; 마가 1:17; 누가 5:10)고 하셨는데, 삼 년여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이 생각한 것이라곤 감투와 권력이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나 뵈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들을 그들이 주님을 처음 만났던 곳으로 부르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며, 그들이 그 사명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여주시기 위함입니다.
3
우리에게도 주님을 처음 만난 장소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바울이 공생애를 사시던 주님을 만나보지는 못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빛 가운데 임하실 때그의 생애가 180도 바뀌어진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만난,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만난,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삶이 180도 바뀌어져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실망이 있고 그늘이 있습니까?
오늘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삶이 재충전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운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이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와 동행하시나 누가복음 24장 16절에 표현한 대로 “저희의 눈이 (슬픔과 근심으로)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우리의 세상 짐으로 부활하신, 나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교우님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므로 동행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혹은 교인 혹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이나 원망의 마음으로 부활의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고 그 주님이 그로 감당하기를 원하는 사명을 잊고 생활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부활의 소망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에게는 눈물과 한숨과 이별이 있지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더 이상 이별은 없고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이 주어집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시기를 바라며, 처음 여러분이 주님을 체험한 그 순간의 감격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며, 해서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며 증거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
외국여행을 하면서 여행객이 겪는 큰 어려움이 있다면 그 중에 식사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는 전혀 식사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국인 목사님들뿐 아니라 미국인 목사님들도 식사시간을 즐거움으로 기다렸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빵과 생선요리가 맛있다고 했습니다. 빵과 생선요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 중에 적어도 두 가지는 빵과 물고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섯 개의 빵(=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시고 열 두 바구니를 남기신 기적과 일곱 개의 빵(=떡)과 두어 마리의 물고기로 4,000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신 기적이 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간이 음식점의 주 메뉴가 생선이며 그 이름도 “베드로 생선(Peter's Fish)"이었습니다. 유대인 식당을 가든지 아랍인 식당을 가든지 속이 빈 납작한 빵의 맛이 일품이었는데 그 빵의 이름이 "피터 브레드(Pita Bread)"였습니다. 속에 샐러드(salad)를 집어넣어 먹기도 하고, 입맛을 돋구는 것에 찍어먹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장삿속으로 베드로의 이름을 너무 남용한다 하였는데, 알고 보니 이 빵의 이름은 ”Peter"가 아니라 “Pita"였습니다.
갈릴리 해는 호수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바다 같은 느낌이 들고 또 바다라고 하기에는 물이 막혀있어 좀 어색하지만, 안내를 맡은 유대인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 갈릴리를 “호수”라고 부르지 않고 “바다”(Se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접한 마을의 이름을 따라 성경에 보면, 게네사렛 호숫가(누가 5:1) 혹은 디베랴 바다(요한복음 6:1, 21:1)라고도 불립니다..
예수님께서 5병 2어의 기적을 베푸셨다는 답가(Tabgha)라고 하는 곳에서 언덕을 내려와 오후 5시경에 “예수님의 배”(The Jesus Boat)라고 명명된 배를 탔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탄 것으로 추정되는 배의 네 배 크기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호수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인데, 배를 탈 때에는 잔잔하던 물결이 배를 타고 갈릴리 해의 한 가운데쯤 오니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 파도가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배에서,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하면, 마가복음 4장(35-41절)에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물결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또, 배의 엔진을 끈 상태에서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어둑어둑해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그려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붙잡히시던 금요일은 한 밤중부터 하루종일 고난과 실망과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든 제자들이 흩어졌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같은 뜰에 있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否認)하였습니다. 몇몇 제자들이 먼 발치에서 예수님이 이제라도 무슨 초인적인 힘과 기적을 보이시겠지 막연한 기대를 갖고 바라보지만 그들의 바램은 좀처럼 이루어질 기미가 없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아침 9시에 “슬픔의 길”(Via Dolorosa)이라고 불리게 된 그 길을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시며 걸어가십니다. 로마 병정이 힘에 겨워하시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하고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달리십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단은 그 군중들의 목소리로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시며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태 27:40; 마가 15:29-30), “네가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너를 구원하라”(누가 23:35),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 27:42),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너를 구원하라”(누가 23:37).
제자들도 물론 입장은 다르지만 이들과 비슷한 외침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의 진정한 메시야시라면 지금 이 순간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조롱하는 이 무리들을 멸하소서! 그리고 우리의 왕이 되소서.”
그러나, ‘자기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섯 시간동안 십자가상에서 고통 당하시다가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시는 순간을 지켜보는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또 다른 마리아와 여인들, 그리고 멀리 서있는 제자들의 마음은 이제까지의 노고가 헛된 것임을 자각함에 따른 한없는 실망과 좌절과 또 분노로 휩싸입니다.
무덤에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을 머물러 계시던 예수님은 안식후 첫날 새벽 미명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모습을, 예수님을 그 마음 속에서부터 가장 많이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그 후에 그날 저녁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요한복음 20:2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씀하실 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님은 사명 맡기기를 원하시는데 곧,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행전에도 기록된 바와 같이 ”성령과 그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의심많은 제자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한 차례 더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팔일이 지난 날, 열 한 제자가 다 모여있고 문들이 닫혀있는데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도마는 감격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며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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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사건은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을 제외하고 그가 친히 사도로 부르신 제자들에게는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3-35절과 마가복음 16장 12절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글로바와 다른 제자들에게 한번 더 나타나셨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사도로 부르신 제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에서 마태는 갈릴리의 한 산에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은 누가복음 5장 1절이하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장면과 흡사합니다.
그 날도 밤이 맞도록 고기잡이를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새벽녘에 돌아와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있는 어부들과 두 배를 보시고 그 중에 한 배에 오르시어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때 시몬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더니 잡힌 물고기가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갈릴리로 돌아가라 하신 말씀을 듣고, 또 전에 고난 당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생각나 갈릴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몰라 세월만 보내고있을 뿐입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머물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고 사명을 맡기셨는데 그들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대신에, 아니면 주님께서 그리하셨듯이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대신에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마저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함을 등한시할 때, 우리의 기억과 체험은 나의 삶에서 가물가물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과 야곱과 요한과 다른 두 제자, 이렇게 일곱명이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무료하게 날을 보내던 그들이 예전과 같이 물고기를 잡으러 가고자 합니다. 하루밤을 꼬박 새웠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날이 거의 밝아 배를 바닷가로 저어오는데,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외칩니다 5절에, “얘들아(=이 사람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로 번역된 ‘파이디아(παιδία)’는 친근한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인데, 날이 아직 채 밝지 않아 그들을 이와같이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을 잘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또 외칩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말씀에 확신이 있으며 권위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끌리는 마음으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에 요한복음에 몇 번 반복되어서 기록되고 있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한으로 추정되는 그 제자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라” 말할 때,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배가 해안 가에 닿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허둥지둥 물 속에서 빨리 뛰어가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아마도 착잡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뵈었지만 그때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했을 것이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주님은 이미 사라지셨습니다. 육지에 오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숯불과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 하시고선, 그가 굽고 계시던 떡과 생선과 함께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십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주님이 부활의 한 증거였다고 한다면, 갈릴리에 나타나신 주님은 그들이 이제 이후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러하기에, 식후에 베드로에게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시며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21:18-19).
갈릴리 바닷가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주님께서 어부이던 그들을 부르실 때,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마태 4:19; 마가 1:17; 누가 5:10)고 하셨는데, 삼 년여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이 생각한 것이라곤 감투와 권력이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나 뵈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들을 그들이 주님을 처음 만났던 곳으로 부르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며, 그들이 그 사명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여주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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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주님을 처음 만난 장소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바울이 공생애를 사시던 주님을 만나보지는 못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빛 가운데 임하실 때그의 생애가 180도 바뀌어진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만난,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만난,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삶이 180도 바뀌어져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실망이 있고 그늘이 있습니까?
오늘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삶이 재충전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운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이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와 동행하시나 누가복음 24장 16절에 표현한 대로 “저희의 눈이 (슬픔과 근심으로)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우리의 세상 짐으로 부활하신, 나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교우님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므로 동행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혹은 교인 혹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이나 원망의 마음으로 부활의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고 그 주님이 그로 감당하기를 원하는 사명을 잊고 생활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부활의 소망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에게는 눈물과 한숨과 이별이 있지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더 이상 이별은 없고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이 주어집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시기를 바라며, 처음 여러분이 주님을 체험한 그 순간의 감격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며, 해서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며 증거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한 20:24-29)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한 20:24-29)
1
자연인(自然人)으로서 우리 인생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恐怖)가 사람들에게서 소망과 기쁨을 빼앗아가고 절망하게 하고 슬퍼하게 합니다. 중국 한무제(漢武帝)는 늙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하여 승로반(昇露盤)의 찬 이슬을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진시황(秦始皇)은 늙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한다는 불로초(不老草)를 얻기 위해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인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죽음의 권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삼 년여 공생애 사역은 그가 죽으실 십자가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이는 우리에게 그렇게 큰 소망과 기쁨은 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은 여전할 것이며,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는 여느 다른 종파와 다름없이 철학적이며 윤리적일 따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그 이후에는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믿지 않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그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가고는 “주가 부활하셨다”라고 우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의문을 갖고 계신 분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변화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던 동안에 제자들은 그를 따라 다니며, 때로는 같이 죽겠다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담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 병정들이 지키는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올 수는 있었겠으며, 설령 훔쳐왔다고 하더라도 그 축 늘어진 시체가 그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외치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면서, 맹수에게 찢김을 당하면서, 또 때로는 화형에 처하여 지면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라고 증거하면서 담대한 죽음을 맞이하게 했겠습니까?
그들에게 그런 놀라운 담대함과 소망을 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짐승에게 찢겨 죽게 하고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끔찍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평안한 미소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소망 중에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죽인 네로는 절망 속에 미쳐서 죽었습니다.
“부활”(resurrection)은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일정기간을 산 다음에 다시 죽는 “회생(또는 소생: resuscitation, restoration)”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회생은 일시적으로 살아나지만 다시 죽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게됨을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시고(눅 7:13-15),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눅 8:49-56), 죽은 지 사일이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시는 사건(요한 11:43-44)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생(回生)이지 아직 부활(復活)은 아닙니다. 회생은 부활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자가 다시 일어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요한복음 20장은 안식후 첫날--곧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서 자신을 나타나신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하여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가 무덤 돌이 옮긴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제자는 급하게 달려와서 무덤 속이 빈 것을 확인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의 향방을 알지 못하여 무덤 밖에서 슬피 울고 있는데 예수님꼐서 그에게 처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가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의 파송’을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24절에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권능이 크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이 숙제를 푸느라고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도마에 관한 기사는 11장 16절에 처음 나오는데, 여기서는 체념적이지만 인상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도마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고자 하실 때, 도마는 예수님께서 그의 반대자들이 많은 예루살렘 근처로 향하심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두 번째로, 14장 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의 기사에서 우리는 충성되지만, 자신의 확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다소 상상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마의 모습은 또한 현재를 사는 많은 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삶이 순조로이 진행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인생에서 세찬 바람이나 파도를 만날 때는 견디지 못해 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인생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갖가지 증거--마리아와 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는 도마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기 위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고 하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면밀히 검토해보고 이상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도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여드레’는 유대인식의 날짜 계산 방법으로 기산일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라고 할 때 그 사흘은 죽으신 금요일부터 기산(起算)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드레를 지나서’는 일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날을 가리킴입니다.
일주일 전 주일날과 상황이 똑 같습니다. 다른 것은 다만 도마만 그 자리에 더해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문이 닫혀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집 안에 들어오셔서 서 계십니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와 같이(19, 21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 말씀을 하십니다.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νη)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히브리어 인사말 “샬롬”입니다. 이 “샬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평안)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인데, 이 평강은 환경을 이기게 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평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열한 제자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초점은 온통 도마에게 머물러 계십니다. 다른 열 제자는 지난 번 방문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따로 그들의 상태를 걱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일주일전 의심의 마음으로 인하여 일주일 내내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었을 도마에게 예수님의 관심이 쏠리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그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다 듣고 아시는 듯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도마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인데, 그의 마음 속을 훤히 드려다 보시며 그에게 가벼운 책망도 포함되어 있지만 관심을 가져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믿기 위하여 도마에게 무슨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렇게 점잖은 서술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Ὁ κύριο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 극한 감격으로 인한 부르짖음입니다.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신앙고백한 적은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제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나타내셨지만,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한 14:8)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반문하셨었습니다(요한 14:9-10).
제가 아는 성도님 가운데 어떤 분이 최근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을 볼 때, 그분의 신앙이 열심인 것을 볼 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직도 모르고 계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아침에 도마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To see is to believe"란 말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뜻인데 세상사람들의 생활법칙입니다,
그러나, 기실 보는 것은 보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했는데, 즉 믿음이란 바라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이 실현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To believe is to see"--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는 신앙법칙에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기 때문에 믿는 자“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믿을 때에 그 믿고 소망하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애석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내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었더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좋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의 증언대로(고전 15:6),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성도들의 수는 120명에 불과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본 형제들 중에 380명 정도는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만으로는 “부활의 증인” 되기에 아직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필요하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한 후에는 이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체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삶으로 부활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실제를 직접 목격하지 못하고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들을 향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운데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욱 복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지금도 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이 다른 제자들처럼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증거할 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갈 때에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중에 바울이 만난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이 우리의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인생 여정 중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절망 중에 방황할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방황을 청산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그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별개의 두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임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그리스도의 영을 영접한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전승(=도마행전)에 의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도마는 멀리 인도에까지 복음을 증거하러 갑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지만 결국에는 붙잡혀서 창으로 찔리는 죽음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 육신의 죽음을 당하여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그도 부활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재정적으로 쪼들리고, 홀로 된 외로움이 사무치고, 육신의 아픔으로 고통 당하고, 또 세상 일로 너무 쫓겨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소망을 생각할 여유도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임하셨습니까?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He is risen!)”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를 감싸는 감격의 부활주일 아침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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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自然人)으로서 우리 인생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恐怖)가 사람들에게서 소망과 기쁨을 빼앗아가고 절망하게 하고 슬퍼하게 합니다. 중국 한무제(漢武帝)는 늙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하여 승로반(昇露盤)의 찬 이슬을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진시황(秦始皇)은 늙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한다는 불로초(不老草)를 얻기 위해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인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죽음의 권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삼 년여 공생애 사역은 그가 죽으실 십자가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이는 우리에게 그렇게 큰 소망과 기쁨은 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은 여전할 것이며,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는 여느 다른 종파와 다름없이 철학적이며 윤리적일 따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그 이후에는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믿지 않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그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가고는 “주가 부활하셨다”라고 우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의문을 갖고 계신 분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변화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던 동안에 제자들은 그를 따라 다니며, 때로는 같이 죽겠다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담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 병정들이 지키는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올 수는 있었겠으며, 설령 훔쳐왔다고 하더라도 그 축 늘어진 시체가 그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외치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면서, 맹수에게 찢김을 당하면서, 또 때로는 화형에 처하여 지면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라고 증거하면서 담대한 죽음을 맞이하게 했겠습니까?
그들에게 그런 놀라운 담대함과 소망을 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짐승에게 찢겨 죽게 하고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끔찍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평안한 미소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소망 중에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죽인 네로는 절망 속에 미쳐서 죽었습니다.
“부활”(resurrection)은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일정기간을 산 다음에 다시 죽는 “회생(또는 소생: resuscitation, restoration)”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회생은 일시적으로 살아나지만 다시 죽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게됨을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시고(눅 7:13-15),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눅 8:49-56), 죽은 지 사일이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시는 사건(요한 11:43-44)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생(回生)이지 아직 부활(復活)은 아닙니다. 회생은 부활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자가 다시 일어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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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은 안식후 첫날--곧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서 자신을 나타나신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하여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가 무덤 돌이 옮긴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제자는 급하게 달려와서 무덤 속이 빈 것을 확인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의 향방을 알지 못하여 무덤 밖에서 슬피 울고 있는데 예수님꼐서 그에게 처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가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의 파송’을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24절에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권능이 크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이 숙제를 푸느라고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도마에 관한 기사는 11장 16절에 처음 나오는데, 여기서는 체념적이지만 인상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도마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고자 하실 때, 도마는 예수님께서 그의 반대자들이 많은 예루살렘 근처로 향하심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두 번째로, 14장 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의 기사에서 우리는 충성되지만, 자신의 확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다소 상상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마의 모습은 또한 현재를 사는 많은 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삶이 순조로이 진행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인생에서 세찬 바람이나 파도를 만날 때는 견디지 못해 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인생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갖가지 증거--마리아와 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는 도마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기 위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고 하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면밀히 검토해보고 이상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도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여드레’는 유대인식의 날짜 계산 방법으로 기산일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라고 할 때 그 사흘은 죽으신 금요일부터 기산(起算)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드레를 지나서’는 일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날을 가리킴입니다.
일주일 전 주일날과 상황이 똑 같습니다. 다른 것은 다만 도마만 그 자리에 더해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문이 닫혀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집 안에 들어오셔서 서 계십니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와 같이(19, 21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 말씀을 하십니다.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νη)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히브리어 인사말 “샬롬”입니다. 이 “샬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평안)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인데, 이 평강은 환경을 이기게 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평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열한 제자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초점은 온통 도마에게 머물러 계십니다. 다른 열 제자는 지난 번 방문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따로 그들의 상태를 걱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일주일전 의심의 마음으로 인하여 일주일 내내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었을 도마에게 예수님의 관심이 쏠리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그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다 듣고 아시는 듯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도마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인데, 그의 마음 속을 훤히 드려다 보시며 그에게 가벼운 책망도 포함되어 있지만 관심을 가져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믿기 위하여 도마에게 무슨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렇게 점잖은 서술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Ὁ κύριο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 극한 감격으로 인한 부르짖음입니다.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신앙고백한 적은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제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나타내셨지만,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한 14:8)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반문하셨었습니다(요한 14:9-10).
제가 아는 성도님 가운데 어떤 분이 최근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을 볼 때, 그분의 신앙이 열심인 것을 볼 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직도 모르고 계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아침에 도마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To see is to believe"란 말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뜻인데 세상사람들의 생활법칙입니다,
그러나, 기실 보는 것은 보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했는데, 즉 믿음이란 바라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이 실현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To believe is to see"--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는 신앙법칙에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기 때문에 믿는 자“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믿을 때에 그 믿고 소망하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애석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내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었더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좋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의 증언대로(고전 15:6),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성도들의 수는 120명에 불과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본 형제들 중에 380명 정도는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만으로는 “부활의 증인” 되기에 아직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필요하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한 후에는 이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체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삶으로 부활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실제를 직접 목격하지 못하고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들을 향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운데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욱 복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지금도 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이 다른 제자들처럼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증거할 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갈 때에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중에 바울이 만난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이 우리의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인생 여정 중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절망 중에 방황할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방황을 청산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그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별개의 두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임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그리스도의 영을 영접한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전승(=도마행전)에 의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도마는 멀리 인도에까지 복음을 증거하러 갑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지만 결국에는 붙잡혀서 창으로 찔리는 죽음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 육신의 죽음을 당하여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그도 부활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재정적으로 쪼들리고, 홀로 된 외로움이 사무치고, 육신의 아픔으로 고통 당하고, 또 세상 일로 너무 쫓겨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소망을 생각할 여유도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임하셨습니까?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He is risen!)”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를 감싸는 감격의 부활주일 아침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요한 20:11-18)
“내가 주를 보았다” (요한 20:11-18)
1
유레카(eureka): 나는 찾았네!
‘유레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진공청소기(vacuum cleaner)의 유명 상품명(brand name)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유명하여지게 된 것은 주전 3세기의 헬라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발명가였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212 BC)와 관련이 있습니다. 시라큐스(Syracuse) 왕이 순금의 왕관을 소유하고 싶어서 금관 제작을 의뢰하고 드디어 금관이 완성되었는데 그것이 진짜 순금으로 된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당시의 유명한 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에게 그것이 순금인지 여부를 판명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을 두고 진위를 가려낼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도 그 문제로 고민하면서 물이 넘치도록 가득한 목욕탕에 몸을 담궜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몸 부피만큼의 물이 탕 밖으로 넘쳐났습니다. 이때 그는 “유레카, 유레카”라고 연달아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유레카”는 헬라어로서 “I have found it"(나는 [그 방법을] 찾았어 또는 발견했어)라는 뜻입니다(정확히는 휴레카: εὕρηκα 이고 기본형 εὑρίσκω의 1인칭 현재완료임). 그는 물이 가득한 통에 금관의 무게만큼의 순금과 그 금관을 차례로 집어넣어 넘쳐나는 물의 양에 차이가 있음을 보고 그 금관에 금 이외에 다른 성분이 섞여있음을 밝혀냈습니다(동일한 무게이지만 순금과 불순물이 섞인 왕관과는 부피에 차이가 있음).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라는 탄성보다 더 큰 기쁨의 탄성과 찬양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우리 성도들의 입술과 심령에서 울려나오기를 축원합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한국에서 신앙생활 하던 신자들--특히 젊은 층--과 교회들에서 유행처럼 사용되던 뱃지(badge)와 스티커(sticker)의 표어가 있었는데 “나는 찾았네”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임을 찾았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음을 찾았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나의 주님임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발견도 이 “나는 찾았네” 안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저의 10대 후반기와 20대 초반기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주님 되심’을 찾고자(발견하고자) 내면적으로 외향적으로 무척이나 애썼지만 찾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대학 1학년 때 기독서클이란 서클은 다 가입하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발견하고자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대학 2학년 때 겨울방학 3개월 동안 4시에 시작되는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 되심이 믿어질까 그렇게 해봤지만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왜 나의 믿음을 향한 노력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의지함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생기는 것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나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구 없이는--하나님께서 내게 다가오셔서 나를 만나주지 아니하시면 나의 찾음에 대한 노력이 헛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들어오시며 나를 찾아주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체험하는 경험은,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찾았다’고 표현함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해서, 찬송가 405장(Amazing Grace)에서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한글찬송은 “잃었던 생명 찾았고”라고 번역함)라고 자신에 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잃어버린 양이었는데 이제 주님에 의해서 찾아진바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찾으시고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 여러분의 삶에 있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과 기쁨이 여러분 안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신약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그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그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일 뿐 믿음은 없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는 헬라어 원어성경의 마태복음 28장 1절로부터 그리스도 부활 사건을 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절에 와서 눈길이 멎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οὐκ ἔστιν ὧδε ἠγέρθη γὰρ καθὼς εἶπεν).
“그가 살아나셨다”(ἠγέρθη)란 단어에 신학자의 눈길이 고정되더니, 이 말씀이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으로 그 교수의 심령을 뒤흔들었고 큰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가 이제까지 수도 없이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강의하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역사적 실체성을 믿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그 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뒤흔들 때 그는 이로 말미암아 깨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앉았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를 뛰쳐나오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날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그의 심령도 부활한 것입니다.
2
복음서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번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첫 번째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11-12절: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무덤 속의 두 천사
막달라 마리아는 창기였으며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기피의 대상이었던 이 여인을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사람 대접받지 못하던 그를 여느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하여 주신 그리스도이시기에 그의 죽음은 마리아를 매우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지만 그가 예수님을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그의 시체에 정성스럽게 향을 발라드리는 일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안식일이 빨리 지나기를 기다려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되자마자 무덤을 찾은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이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역시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대신에 두 천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에는 막달라 마리아 이외에 다른 여인들도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만이 나옵니다. 이는 다른 여인들도 곁에 있었는데 막달라 마리아만 대표격으로 이름을 적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요한복음의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만 향품을 준비하여무덤으로 갔다고 증거하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사 복음서를 통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대표적인 여인인 것은 분명합니다(마가복음 16장은 향품을 준비하여 갈 때는 여인들의 이름들을 나열하고,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록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적고 있습니다, 막 16:9-11).
흰옷 입은 두 천사(누가복음 24:4-7; 마태복음 28: 2-7과 마가복음 16:5에는 한 천사)가 무덤 안에 머물러 있던 이유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찾아올 때에 그들에게 그들이 찾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 없고 부활하셨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13-14절: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나타나심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는 것은 그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부활하셨음을 말하여 주고자 함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물론 마리아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심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지만) 다만 그리스도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뒤에 어떤 사람이 서있는 것을 감지하여 뒤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그가 예수님이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이신 줄 알아보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죽으시기 전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는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엠마오로 향하고 있던 제자 둘)에게 나타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동일하신 모습이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참 비슷한 사람도 다 있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1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전히 예수님의 시신 찾기를 원하는 마리아
예수님께서 천사들이 했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마리아에게 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동일한 질문을 다시 하심은 그가 ‘그의 부활’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시신 찾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 생각날 리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은 다만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4절에서 마리아(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 마리아가 동일인물이라면)의 언니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내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확신 없는 믿음(?)의 고백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부활에 관한 한 마리아의 신앙도 마르다의 신앙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마리아는 거의 비슷한 말로 다시 대답합니다. 다만, 이제 예수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에 대한 추측이 막연한 어떤 사람에서 동산지기같이 보이는 앞에선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마리아의 부활신앙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믿음이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6절: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리아야’ 부르시는 예수님
15절에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마리아에게 물으실 때와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실 때에 예수님의 음성이 아마도 달랐을 것입니다. 15절의 음성은 타인인양 들리는 것이었다면, 16절의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음성은 마리아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들어왔던, 꿈에도 못잊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친근감이 넘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돌이켜 그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랍오니여”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마리아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마리아는 그를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시는 음성의 주인공이 이제까지 죽으셨다고 여겼던 예수님인 줄 알고는 벅차 오르는 기쁨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해서,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매어 달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만류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9절에는 무덤을 떠나 달음질하던 마리아를 포함한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평안하뇨?”라고 물으실 때에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이 동일한 사건에 대한 약간 다른 기록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란 친근한 표현으로 호칭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 아버지”는 곧 “너희(=제자들과 여인들의) 아버지” 되심과 “내 하나님”은 곧 “너희 하나님” 되심을 또한 알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 되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사십 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나중에 올라가시겠다는 말씀인지 불분명하지만, 그가 승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18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내가 주를 보았다!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던 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외치되(요한 4:28)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침으로 전에는 부활의 믿음이 없었던 마리아의 마음에 부활의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의 복음증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사망이 더 이상 우리의 왕 노릇하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마리아와 제자들만의 증거제목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그 안에 속하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의 증거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라고 외쳐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시인 에드워즈(D. E. Edwards)의 신앙의 고백과 성도의 결단
영국시인 에드워즈(D. E. Edwards)는 다음의 시로서 그의 부활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쓰신 가시관을 보지 못했고,
그 몸에 남은 상처를 만져 보지 못했으며,
무덤 문을 막았던 바위도 내 눈으로 못 보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부짖는 사람들을 위로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빈 무덤을 본 일은 한 번도 없지만
오늘 이날도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느니,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의 그림자를
내 마음의 창문을 통하여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까?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라고 이웃을 향해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 외침의 증거로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더 든든해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간구를 드리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은혜의 주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시며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라고 외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유레카(eureka): 나는 찾았네!
‘유레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진공청소기(vacuum cleaner)의 유명 상품명(brand name)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유명하여지게 된 것은 주전 3세기의 헬라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발명가였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212 BC)와 관련이 있습니다. 시라큐스(Syracuse) 왕이 순금의 왕관을 소유하고 싶어서 금관 제작을 의뢰하고 드디어 금관이 완성되었는데 그것이 진짜 순금으로 된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당시의 유명한 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에게 그것이 순금인지 여부를 판명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을 두고 진위를 가려낼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도 그 문제로 고민하면서 물이 넘치도록 가득한 목욕탕에 몸을 담궜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몸 부피만큼의 물이 탕 밖으로 넘쳐났습니다. 이때 그는 “유레카, 유레카”라고 연달아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유레카”는 헬라어로서 “I have found it"(나는 [그 방법을] 찾았어 또는 발견했어)라는 뜻입니다(정확히는 휴레카: εὕρηκα 이고 기본형 εὑρίσκω의 1인칭 현재완료임). 그는 물이 가득한 통에 금관의 무게만큼의 순금과 그 금관을 차례로 집어넣어 넘쳐나는 물의 양에 차이가 있음을 보고 그 금관에 금 이외에 다른 성분이 섞여있음을 밝혀냈습니다(동일한 무게이지만 순금과 불순물이 섞인 왕관과는 부피에 차이가 있음).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라는 탄성보다 더 큰 기쁨의 탄성과 찬양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우리 성도들의 입술과 심령에서 울려나오기를 축원합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한국에서 신앙생활 하던 신자들--특히 젊은 층--과 교회들에서 유행처럼 사용되던 뱃지(badge)와 스티커(sticker)의 표어가 있었는데 “나는 찾았네”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임을 찾았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음을 찾았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나의 주님임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발견도 이 “나는 찾았네” 안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저의 10대 후반기와 20대 초반기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주님 되심’을 찾고자(발견하고자) 내면적으로 외향적으로 무척이나 애썼지만 찾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대학 1학년 때 기독서클이란 서클은 다 가입하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발견하고자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대학 2학년 때 겨울방학 3개월 동안 4시에 시작되는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 되심이 믿어질까 그렇게 해봤지만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왜 나의 믿음을 향한 노력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의지함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생기는 것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나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구 없이는--하나님께서 내게 다가오셔서 나를 만나주지 아니하시면 나의 찾음에 대한 노력이 헛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들어오시며 나를 찾아주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체험하는 경험은,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찾았다’고 표현함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해서, 찬송가 405장(Amazing Grace)에서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한글찬송은 “잃었던 생명 찾았고”라고 번역함)라고 자신에 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잃어버린 양이었는데 이제 주님에 의해서 찾아진바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찾으시고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 여러분의 삶에 있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과 기쁨이 여러분 안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신약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그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그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일 뿐 믿음은 없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는 헬라어 원어성경의 마태복음 28장 1절로부터 그리스도 부활 사건을 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절에 와서 눈길이 멎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οὐκ ἔστιν ὧδε ἠγέρθη γὰρ καθὼς εἶπεν).
“그가 살아나셨다”(ἠγέρθη)란 단어에 신학자의 눈길이 고정되더니, 이 말씀이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으로 그 교수의 심령을 뒤흔들었고 큰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가 이제까지 수도 없이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강의하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역사적 실체성을 믿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그 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뒤흔들 때 그는 이로 말미암아 깨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앉았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를 뛰쳐나오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날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그의 심령도 부활한 것입니다.
2
복음서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번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첫 번째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11-12절: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무덤 속의 두 천사
막달라 마리아는 창기였으며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기피의 대상이었던 이 여인을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사람 대접받지 못하던 그를 여느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하여 주신 그리스도이시기에 그의 죽음은 마리아를 매우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지만 그가 예수님을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그의 시체에 정성스럽게 향을 발라드리는 일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안식일이 빨리 지나기를 기다려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되자마자 무덤을 찾은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이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역시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대신에 두 천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에는 막달라 마리아 이외에 다른 여인들도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만이 나옵니다. 이는 다른 여인들도 곁에 있었는데 막달라 마리아만 대표격으로 이름을 적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요한복음의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만 향품을 준비하여무덤으로 갔다고 증거하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사 복음서를 통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대표적인 여인인 것은 분명합니다(마가복음 16장은 향품을 준비하여 갈 때는 여인들의 이름들을 나열하고,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록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적고 있습니다, 막 16:9-11).
흰옷 입은 두 천사(누가복음 24:4-7; 마태복음 28: 2-7과 마가복음 16:5에는 한 천사)가 무덤 안에 머물러 있던 이유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찾아올 때에 그들에게 그들이 찾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 없고 부활하셨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13-14절: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나타나심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는 것은 그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부활하셨음을 말하여 주고자 함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물론 마리아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심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지만) 다만 그리스도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뒤에 어떤 사람이 서있는 것을 감지하여 뒤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그가 예수님이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이신 줄 알아보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죽으시기 전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는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엠마오로 향하고 있던 제자 둘)에게 나타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동일하신 모습이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참 비슷한 사람도 다 있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1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전히 예수님의 시신 찾기를 원하는 마리아
예수님께서 천사들이 했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마리아에게 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동일한 질문을 다시 하심은 그가 ‘그의 부활’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시신 찾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 생각날 리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은 다만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4절에서 마리아(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 마리아가 동일인물이라면)의 언니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내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확신 없는 믿음(?)의 고백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부활에 관한 한 마리아의 신앙도 마르다의 신앙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마리아는 거의 비슷한 말로 다시 대답합니다. 다만, 이제 예수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에 대한 추측이 막연한 어떤 사람에서 동산지기같이 보이는 앞에선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마리아의 부활신앙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믿음이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6절: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리아야’ 부르시는 예수님
15절에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마리아에게 물으실 때와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실 때에 예수님의 음성이 아마도 달랐을 것입니다. 15절의 음성은 타인인양 들리는 것이었다면, 16절의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음성은 마리아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들어왔던, 꿈에도 못잊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친근감이 넘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돌이켜 그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랍오니여”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마리아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마리아는 그를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시는 음성의 주인공이 이제까지 죽으셨다고 여겼던 예수님인 줄 알고는 벅차 오르는 기쁨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해서,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매어 달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만류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9절에는 무덤을 떠나 달음질하던 마리아를 포함한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평안하뇨?”라고 물으실 때에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이 동일한 사건에 대한 약간 다른 기록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란 친근한 표현으로 호칭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 아버지”는 곧 “너희(=제자들과 여인들의) 아버지” 되심과 “내 하나님”은 곧 “너희 하나님” 되심을 또한 알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 되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사십 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나중에 올라가시겠다는 말씀인지 불분명하지만, 그가 승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18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내가 주를 보았다!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던 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외치되(요한 4:28)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침으로 전에는 부활의 믿음이 없었던 마리아의 마음에 부활의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의 복음증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사망이 더 이상 우리의 왕 노릇하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마리아와 제자들만의 증거제목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그 안에 속하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의 증거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라고 외쳐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시인 에드워즈(D. E. Edwards)의 신앙의 고백과 성도의 결단
영국시인 에드워즈(D. E. Edwards)는 다음의 시로서 그의 부활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쓰신 가시관을 보지 못했고,
그 몸에 남은 상처를 만져 보지 못했으며,
무덤 문을 막았던 바위도 내 눈으로 못 보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부짖는 사람들을 위로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빈 무덤을 본 일은 한 번도 없지만
오늘 이날도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느니,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의 그림자를
내 마음의 창문을 통하여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까?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라고 이웃을 향해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 외침의 증거로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더 든든해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간구를 드리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은혜의 주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시며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라고 외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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