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0, 2015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으니” (이사야 9:1-7)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으니” (이사야 9:1-7)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애와 그 어깨의 채찌과 그 앞제자의 막대기를 꺽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1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발트(Karl Barth)가 신학자들이 모이는 세미나에 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성서에 관한 많은 연구를 하셨는데 성서의 진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칼 발트는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합니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보았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발트의 이 대답과도 같이 간단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증거합니다.

성탄의 계절에 쉽게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건 다니지 않는 사람이건 ‘하루를 쉴 수 있다’는 것과 ‘누군가와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것이고, 좀더 생각하면, ‘말구유에 누워 잠자고 있는 아기 예수님의 평온한 모습’입니다. 잠자는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지만, 이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잠자는 모습이 귀엽고 평온해 보여서가 아니라 이 아기가 장차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야-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황금, 유향, 몰약을 들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한 것은 그가 장차 인간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해주시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2
이사야는 이사야서 1-12장에서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7-12장 책망의 후반부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 한 아기에 대한 소망의 비전을 전하고 있습니다.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했고; 8장 14절에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될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했고; 또 11장 1-4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선지서들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전하는 선지자의 입이 책망으로만 일관(一貫)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책망과 징계를 예언하시는 하나님께서 중간 중간에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이제라도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이제라도 여호와 너희 하나님을 알라,’ 이제라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제라도 너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죄를 용서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책망과 매를 주시는 까닭은 우리로 이제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심입니다.

어둠과 빛은 서로 화합할 수 없습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과 빛이 멀리 떨어져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에게 빛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가 빛으로 나오는 것은 그의 선택입니다. 그가 빛으로 나오기로 결단할 때 그는 하나님의 그에 대한 사랑의 예정(豫定)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죄를 정의할 때,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난 우리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빛을 비추시고자 하는 계획으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주셨는데, 이를 거부하고 어둠에 계속 머물고자 함이 죄입니다.

9장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성격, 승리와 임마누엘 메시야의 정사(政事)와 다스리심에 대해서 예언하고있습니다.
1절에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더 이상) 흑암이 없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제까지 이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침묵하시고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어졌고 해서 그들은 어둠에 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2절에 그러나 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췰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임하실 때, 그를 영접하는 사람이 보고 그에게 비추일 구원의 빛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의 지상사역은 멸시가 큰 곳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실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먼저 징벌하시되 그들을 철저히 추락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이방민족 앗수르와 피섞임의 고통을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유다 백성도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였지만, 그들은 피섞임의 수모는 겪지 않았는데, 해서 예수님의 시대에는 혼혈인종이 된 북왕국 이스라엘을 개나 돼지 (라가) 취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가운데 상처가 더 크고, 해서 더 좌절하고 소망이 없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후예들에게 그의 긍휼과 자비의 시작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 해변 주변지역인 납달리와 스블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납달리 지방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시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스블론의 땅,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그의 첫 번째 이적을 베푸시고 산상수훈을 주십니다. 또 요단 저편 (단지방) 벳세다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5,000명을 오병이어로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3절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가운데 비추이고, 우리가 그 구원의 빛을 받을 때 우리는 추수하는 농부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며 탈취품을 나누는 병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4절에 그 위에 더 좋은 것은, 이제까지는 우리가 사단의 종노릇하던 자로서, 사단의 죄와 구속의 멍에를 매고, 사단의 채찍과 막대기가 우리에게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일 때,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사단의 종노릇할 것이 아닌 자유가 됩니다.
사단과의 싸움은 우리에게 힘에 겨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기드온시대에 이스라엘이 강성한 미디안과 겨루어 승리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빈항아리에 감추어진 성령의 빛, 횃불을 높이 치켜들 때 승리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빛이 높이 들려질 때 우리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5절평화의 빛으로 임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더 이상 사단과의 전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모든 싸움이 끝날 것입니다. 흑암 중에서 소망 없이, 절망 가운데 고통하던 우리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이고, 사단의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가 쇄하고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주시며, 세상의 모든 전쟁이 종결됨은 바로 우리에게 한 아기가 났기 때문입니다.

6절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확증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되 사람의 아들--아기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아기로 태어나 자라면서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체험하심은 인간의 성정을 알고, 인간을 위한 변론자(辯論者)와 구속자(救贖者)가 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그 어깨에 정사(government)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이 정사는 다스리는 자, 왕으로 오심을 말함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에도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세상의 왕은 백성과 교제가 없는데, 예수님은 그의 백성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낮은 데로 임하신 만백성의 왕이십니다.

우리에게 태어난 이 아기의 이름은,
첫째, 기묘자(Wonderful)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동정녀 탄생으로 시작하여 공생애, 죽음,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도 놀라움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둘째, 모사(Counsellor)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늘 궁정에 모사(Counsellor)로 함께 하시고, 우리 중에 거하시며 우리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해주시는 모사가 되셨습니다.

셋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제한적인 능력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능히 해결하시며 우주를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이십니다.

넷째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동일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할 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고 하시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태초부터 계시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고, 영원까지 계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엘-올람이십니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께서 백성의 고통을 치유하시고, 좌절하는 백성에게 소망을 주시고 세상의 여러 모양의 전쟁을 종결시키시기 위해서 인간 가운데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십니다.

                                                                              3
마틴 루터가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숲 속을 산책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눈 내린 전나무 숲 속이었는데, 전나무들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사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달빛(=구원의 빛)을 받을 때 우리가 이 전나무와도 같이 빛을 발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전나무 한 그루를 베어 집에 가져오고, 거기에 촛불을 달고, 우리를 비추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였는데 이것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매년 성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냥 의미 없는 "Happy Holiday!"가 되지 말고, 빛으로 태어나신 한 아기--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모시고 그의 탄생과 그의 구속의 사역을 기뻐하는 성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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