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자녀” (갈 4:28-31)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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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지키기 위하여 하는데, 사람사이의 약속은 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봅니다.
몇 년을 죽자살자 연애하며 영원한 사랑을 다짐했는데, 남자가 군대를 간다거나 아니면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영원한 사랑에 대한 약속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조건과 현실을 따라 결혼하는 사람들의 예를 적잖이 봅니다.
검은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서로 사랑하고 위해줄 것을 약속하는 혼인서약을 했지만 이를 깨고 이혼의 길을 택하든지,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혼인서약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생의 삶의 모습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사람들이 무수한 선거 공약(公約)을 내걸지만, 막상 당선이 되면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출마자의 유권자와의 약속은 공약(公約: 공적인 약속)이기 보다는 공약(空約: 헛된 약속)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약속들을 바라보는 삶을 잘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믿음이 없는 까닭이지만,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약속을 한결같이 지키지 못하고 파기하는데 익숙해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대한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매우 더딘 것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위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체적인 약속들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 하신 약속을 잊어버리시거나 소홀히 여기셔서 깨뜨리는 경우가 전혀 없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약속을 지키십니다.
어느 교회의 주일 아침 성경공부반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에 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토론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잃어버린 경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말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라보고 믿는 사람을 잘살게 해주신다는 약속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 매부는 하나님을 어느 사람 못지 않게 열심히 믿었지만 재산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그의 매부 되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가 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부자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든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저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훌륭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딸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모든 약속들을 지키셨고, 나도 하나님께 대한 약속들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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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에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때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강권적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태어나기 30-40년 전부터 아브라함으로 민족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에게도 주신 약속인데 그들은 한 때 이 약속을 잘못 이해하고 기다림에 지쳐서 사라의 여종 하갈로부터 약속의 자녀가 아닌 종의 자녀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30-40년 전에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타나셔서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아들 이삭을 낳으리라”(창 17:21)고 말씀하시고 또 얼마 후에 다시 나타나셔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약속이 경수가 이미 끊겨 생산능력이 없어진 사라에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약속이 믿어지지 않기는 사실 아브라함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전매특허인 순종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인간의 생각과 주장에 따라 되어진--육체를 따라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되어진--약속을 따라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갈라디아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허락하신 이삭과 같이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으로) ‘믿음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기 위하여 오랫동안 참고 기다림의 세월을 보낸 것처럼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기까지는 믿음의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였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기까지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인내함이 필요합니다.
29절: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갈라디아 사람들이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미혹으로 순전한 믿음을 떠나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좇고자 함을 약속을 따라 난 이삭과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과의 관계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사라가 보니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글성경은 “희롱하다”(tease, mock)고 번역하고 있는데, 아이가 귀엽다고 장난 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 아브라함의 더 큰 사랑이 이삭에게 있음을 시기하여 괴롭히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사라의 눈에는 그와 적대관계에 있는 몸종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이 그의 사랑스런 아이 이삭을 희롱하고 핍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삭이 사라에게 매우 사랑스럽고 중요한 자녀인 것같이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매우 사랑스럽고 중요한 믿음의 자녀입니다(갈 4:19).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스마엘과 같이 육체를 따라 난 자 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성령을 따라 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전한 믿음으로 크리스천이 되지 않고 믿음이외에 다른 것을 첨가하는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은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이스마엘과 같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진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물론 그들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라고 권면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그들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할례와 율법을 강요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동으로 말미암아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못될 위기에 처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30절: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랑하고 보호하기를 원하는 바울은 이삭을 지극히 사랑하고 보호하기를 원하는 사라의 입장에서 이삭-이스마엘의 사건을 보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계집 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 이삭을 희롱하고 있다고 판단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강청합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바울은 자기의 자녀 이삭을 보호하려는 사라의 말을 매우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약속의 자녀--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에게만 주어질 것인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약속의 자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그의 신앙에 더하여서는 안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31절: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된 크리스천은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입니다. 이는 계집 종의 자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얻지 못하며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이삭만이 그 유업을 얻을 자인 것같이, 믿음과 약속이 없는 계집종의 자녀로서는 하나님의 유업을 얻지 못하고 오직 믿음과 약속이 있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유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삭을 따라, ‘약속의 자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얻을 자가 된 것같이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약속의 성령을 따라 자유하는 자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유업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시내산(율법)이 아니라 갈보리산(복음)에 거한 자요, 현재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장차 우리에게 임할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자요, 육체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난 자요, 율법의 자녀가 아니라 믿음의 자녀요, 저주 아래 놓인 자가 아니요 축복아래 놓인 자요, 계집 종 하갈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하는 여자 사라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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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설교를 들으시면서, 혹 아직도 오해하시는 성도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우(奇遇)에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좇는 삶을 살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삶을 살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문자적으로 율법을 좇는 것’은 부득이함과 억지로 하나님을 위하고자 하는 종의 삶을 사는 것인데, 이는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기실은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율법을 좇고자 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난 사람은 기쁨과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부담이요 고통이 아니라, 이러한 삶을 사는 그 자체가 그에게 기쁨이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4절에서 이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8장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 안에서 활동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께서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게 하시되 부득이함이 아니라 평안과 기쁨으로 살게 하시며, 이러한 삶이 율법의 의문에 종노릇하지 아니하되 율법의 선하신 요구들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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