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31, 2015

“심는 그대로 거두리라” (갈 6:6-10)


“심는 그대로 거두리라” (갈 6:6-10)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것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永生)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
불교(佛敎)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반드시 인(因: 원인)과 연(緣: 조건)과 과(果: 결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된다고 합니다. 먼저 원인(原因)이 있는데, 이는 어떤 조건(條件: 緣) 아래서 응분의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하여, 선한 원인(善因)으로부터 선한 과실(善果)이, 악한 원인(惡因)으로부터는 악한 과실(惡果)이 맺게 됩니다.

또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제가 저지른 일의 과보를 제가 받는다’는 뜻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도 이와 비슷한 뜻입니다.
제나라에 관연(管燕)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임금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자 가까이 있는 부하들에게 묻습니다. “그대들 중에 누가 나와 함께 다른 나라로 갈 사람은 없는가?” 그러나 아무도 그리하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관연은 눈물을 흘리며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선비란 손에 넣기는 쉬워도 좀체로 소용이 닿지 않는 것이로구나!”라고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전수(田需)라는 사람이 나서서 대답합니다. “선비들은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기도 힘든데, 댁에서 기르는 거위는 질리도록 먹고도 남는 것이 있습니다. 안채의 부인과 첩들은 엷은 비단, 흰 비단을 차려 입고, 무늬 비단과 속이 비치는 비단을 끌고 다니는데, 선비들은 그런 것으로 옷의 선조차 두를 수 없습니다. 재물은 주인 된 사람이 가볍게 알아야 할 물건이요, 죽음은 선비 된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바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가볍게 알아야 할 것을 선비들에게 주지도 않으며, 다만 선비들이 소중히 알고 있는 것으로 당신을 섬겨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선비가 얻기만 쉽고 소용이 닿지 않는 것이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전국책(戰國策)」 제(齊)·선왕(宣王))

노(魯)나라 사람 양호(陽虎)가 제(齊)나라에서 조(趙)나라로 망명했을 때 조나라의 간주(簡主)란 사람이 그에게 묻습니다. “내가 듣자 하니, 그대가 사람을 등용시키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소?”
양호(陽虎)가 대답합니다. “제가 노나라에 있을 때 세 사람을 뽑아 써서 모두 대신(大臣)이 되었으나, 제가 노나라에서 죄를 입게 되자 모두 나를 찾아내어 잡으려고 했습니다. 제 나라에 있을 때에도 세 사람을 추천하여 그중 한 사람은 왕의 근신(近臣)이 되었고, 한 사람은 현령(縣令), 한 사람은 후리(侯吏: 외국 사신을 맞아들이고 보내는 벼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죄를 얻게 되자 왕의 근신이 된 사람은 저를 만나 주려고 하지 않았고, 현령이 된 사람은 저를 잡아 가두고자 했으며, 후리(侯吏)가 된 사람은 저를 국경까지 뒤쫓아 왔으나 잡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사람을 뽑아 쓰는 일에 서투른 것 같습니다.”
간주(簡主)는 고개를 숙여 웃으며 혼자 말합니다. “유자나 귤을 심으면 단 열매를 먹고 좋은 향기를 맡을 수 있지만, 탱자나무나 가시나무를 심으면 자라서 사람을 찌르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무엇을 심을 것인가를 신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비자(韓非子)」외저설편(外儲說篇) 좌하(左下))

채근담(菜根譚)에 있는 말입니다.
   선행을 하지만 그 이익을 보지 못함은 (爲善不見其益)
   마치 수풀 속의 동아(동과: 박과에 속하는 일 년생 덩굴식물)와도 같다. (如草裡東瓜)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기 때문이다. (自應暗長)
   
   악한 짓을 하는 데도 당장 손실을 보지 않음은 (爲惡不見其損)
   뜰 앞의 봄눈과도 같다. (如庭前春雪)
   반드시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當必潛消)

선행을 쌓아도 그 성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장합니다.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얻은 것을 잃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소멸됩니다.

믿음의 결실을 함에도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둘 것인데 믿음의 생활의 열매가 당장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나무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나며 더딘 것 같으나 반드시 열매를 맺고 결실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신령한 것과 썩을 것의 결실과 보응(報應)이 당장 눈에 보이게 나타난다면 좋을 것 같은데,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불순종의 사람이 세상에서 더욱 번창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도 그에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이상하게 여겨지나 바울은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가 심고 가꾼 대로 거둘 때가 반드시 올 것인데 곧 우리 인생의 끝에 우리에게 임할 주님의 심판입니다.

2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성령의 과실을 거두고, 육신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육체의 과실을 거두게 됩니다. 육체의 과실은 썩어지는 것이요 성령의 과실은 신령하고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학생으로서 어떤 과목의 선생님이 마음에 들면 그 과목이 전에는 별로 흥미가 없던 것이라도 흥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이 나를 인정하면 그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합니다.
교회의 성도와 목회자와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목사도 사람인데 목사를 보고 교회생활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하지만, 일단은 목사님에게 좋은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 불만이 있는 교인은 은혜와 평안이 넘치는 교회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불만이 있는데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귀에 들어올 리 없으며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 목사님의 결정적인 인격적인 결함으로 인하여서 그 목사님을 결코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존경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경청할 수 있는 목사님을 찾아서 그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그의 신앙성장을 위해서는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교회를 정하고 그 교회에 죽으나 사나 출석하기로 결심하였다면,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은 그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결정적인 필수요건입니다.

그저 목사님이 무난하다고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 바울은 그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6절을 “Those who are taught the Word of God should help their teachers by paying them."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을 대수롭지 않고 값싸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대수롭지 않고 값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귀하고 좋은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와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은 좋은 땅이 될 것이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의 씨가 그 안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믿음이 없는데 믿음이 있는 체 하거나, 성령의 열매가 없는데 열매가 있는 체 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일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위사람들과 자신까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비웃음거리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응(報應)의 법칙은 틀림이 없습니다.
믿음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믿음의 열매를 거두고 불신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불신의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열매를 거둔 사람에게는 그 정도에 따라서 믿음의 상급이 주어지고, 불신의 열매를 거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2-13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예수 그리스도, 고전 3:11)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날이 우리에게 이르고 주님과 회계할 그 때에 우리는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상급이 주어지는 상급심판이 있을 것이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가 어떠했는가에 따라 행위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나무는 성장이 더딘 것 같고 믿음의 열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으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구별됨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과실들의 실하고 실하지 못함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드린 시간과 재물과 기도와 마음의 정성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할 자와 구원받을 자를 구별하실 뿐만 아니라, 칭찬과 상급이 있는 구원과 부끄러운 구원(고전 3:15)도 구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공평한 세상에서는 세상법칙을 따라서 내가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쏟은 것만큼 결실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서 내가 쏟은 시간과 노력과 정성만큼 반드시 결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믿음과 성령의 법칙대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여전히 헛된 삶과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의 수확의 법칙도 세상의 수확의 법칙이나 다른 종교의 수확의 법칙과 별로 다른 것이 없네요?!”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히며, 좋은 열매는 하나님의 곡간에 들이며 나쁜 열매는 불사름에 내줄 것이므로 세상의 수확이나 추수의 법칙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를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삶에서 골고루 밝히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수확법칙과 다른 것은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게 하는 기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나무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물론, 좋은 믿음이 있는 사람--따라서 그 안에 역사하는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사람에게 좋은 (믿음의) 행위가 나타날 것이지만)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永生)을 거두리라.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If he sows to please his own wrong desires, he will be planting seeds of evil and he will surely reap a harvest of spiritual decay and death; but if he plants the good things of the Spirit, he will reap the everlasting life which the Holy Spirit gives him." (자신의 잘못된 욕심을 위하여 씨뿌리는 자는 악의 씨를 심는 자이며 그는 반드시 영적으로 썩음과 죽음의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좋은 것들을 심는 자는 성령이 그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한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내는 것과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두렵고 떨림은 각각 다른 열매 맺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열매에 따른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나쁜 열매를 맺은 자에게는 영벌의 죽음(eternal dying)이 따르며, 좋은 열매를 맺은 자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함께 하는 영생(eternal life)이 주어집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어떤 행위가 죄인가 아닌가는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성령에 속한 것인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것이 불신의 열매인가 믿음의 열매인가에 따라 죄인지 아닌지 판정됩니다.
믿음과 성령을 좇아 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죄와 허물의 잘못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와 허물을 더 이상 죄와 허물로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그의 잘못을 덮어주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보응의 법칙 위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입니다.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사람들에게는 오래 참음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기가 쉽습니다. 어떤 믿음의 선을 행할 때 그 결과를 당장 보고 싶어합니다. 아무리 늦어도 이 세상 살 동안에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사람의 이 세상 삶이 평안치 못하며 오히려 환난과 역경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조그마한 믿음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실망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인을 물리친 엘리야에게 어려움이 임하였을 때 그는 심히 낙심하여서 차라리 죽기를 간구하고 하나님께 원망을 발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14)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위로하시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 혹 실망하고 피곤하여지는 것은 그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보상이 당장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 보상이 없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자기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 드문 것 같지만 틀림없이 있으며 하나님의 보응이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 2장 3-4절에서 “이 (심판의)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악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마음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추수의 때를 바라보는 사람은 낙심하지 아니하며 피곤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때는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이를 것이며, 하나님의 때가 믿음의 씨를 뿌리고 선을 행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 인생의 이 세상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의 과정 중에서 인생의 이 세상의 삶은 그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10절: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믿음의 사람의 삶이 선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삶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첫 번째는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령한 것을 심고 가꾸는 자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과 함께 칭찬과 상급을 거두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권속)들에게 할지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한 행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앞서서 믿음의 식구들에게 먼저 나타나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도할 때에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멀리까지 전도하는 것처럼(행전 1:8 참조), 사랑과 선행의 실천도 가정과 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 속하여 사는 사회를 거쳐서 국가와 세계로까지 확장하라는 뜻입니다(롬 12장 참조).
가정과 교회--믿음의 권속들 앞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3
기독교의 보응의 법칙 혹은 수확의 법칙도 세상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순리(順理)와 역리(逆理)가 자연 가운데, 사람들이 사는 세상 가운데 이미 일반적으로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자연계시 또는 일반계시).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에게 특별한 것은 우리의 심는 것은 믿음의 씨나 믿음의 나무요, 거두는 것은 믿음의 열매요, 하나님의 심판은 믿음에 따른 것이라는 점입니다. 믿음의 씨 또는 나무를 심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에는 없는 한 가지가 더하여지는데, 곧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보응(報應) 또는 수확(收穫)의 법칙 이외에 은총(恩寵)의 법칙이 더하여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심고 가꾸는 것으로는 감히 기대할 수 없는 영생(永生)과 은혜스럽고 풍요로운 하나님 나라의 기업(企業)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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