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7, 2015

“오직 성령의 열매는”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갈 5:22-23)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덕경(德經)」제 41장):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上士聞道, 勤而行之)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간수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듯하기도 하며 (中士聞道, 若存若亡)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으니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When the be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practices it assiduously;
 When the average student hears about the way, it seems to him one moment there and gone the next;
 When the wor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laughs out. If he did not laugh, it would be unworthy
 of being the way.)

노자의 도를 듣는 세 종류의 사람의 구분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장)에서 세 종류의 밭의 사람과 바울의 세 종류의 영적 상태의 사람(고전 2:14-3:3)의 구분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노자의 ‘어리석은 사람’(下士)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가’의 사람이요, 바울의 예에 있어서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입니다. ‘길가’의 사람은 천국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주로 듣기를 거부하고, 혹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닫힌 마음으로 들으며 그 속에서 이를 비웃거나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마태 13:19)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리석은 사람이 비웃지 않는 천국 말씀’은 ‘천국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한다”(고전 2:14). 바울은 이 ‘육에 속한 사람’을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는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자의 ‘평범한 사람’(中士)은‘ 예수님의 돌밭이나 가시 떨기의 사람이요, 바울에게는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듣고 긴가 민가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마태 13:21, ’돌밭‘의 사람)이거나 혹은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마태 13:22, ’가시 떨기‘의 사람)입니다. 바울의 ‘육신의 사람’은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자라지 않는 사람이요, 시기와 분쟁 등 육신의 소욕을 따라 행하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전 3:1-3). 갈라디아서의 예로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갈 3:3)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시나무가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되고 찔레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말림을 당하고 열매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는 베임을 당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자의 ‘뛰어난 사람’(上士)은 ‘도를 듣고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좋은 땅의 사람이요, 바울의 신령한 사람성령에 속한 사람(고전 2:15)입니다. 좋은 땅의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의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자요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에 관한 구분은 비단 도(道)를 수학(修學)하는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사업을 하는 사람, 가정을 돌보는 사람 등 모든 분야, 모든 사물과 사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上士)이 반드시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사업이나 학문 등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교회생활을 하나 ‘십자가의 도’를 깨달음에는 둔하고 따라서 성령의 열매맺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목회자로서, 저는 여러분이 ‘십자가의 도(道)’(고전 1:18)를 깨닫고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뛰어난 신령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는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사안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들을 귀, 볼 눈,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들을 귀, 볼 눈,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듣고자 함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듣고자 함이 필요하고, 발견하지 못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볼 것이 아니라 발견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보고자 할 것입니다.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인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위에 자신의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음을 솔직하게 시인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기 과신(過信)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이 임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영, 성령)가 그의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맺지 못함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출석함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그를 이끌기에(요한 6:44 참고) 그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성령의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되, 머리로뿐 아니라 가슴과 마음으로 영접함이 필요합니다.

2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 육체의 현저한 일 15가지를 나열한 바울은 이어서 22-23절에서 성령의 현저한 열매 9가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나열한 이 9가지 성령의 열매는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서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사람의 노력으로서 얻어지는 유사한 모양의 것들은 성령의 열매가 아닐뿐더러, 또한 지속력이 약합니다.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1사랑과 2희락과 3화평과 4오래 참음과 5자비와 6양선과 7충성과 8온유와 9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4-9절에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러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세상의 썩어질 것”(벧후 1:4)은 바울의 “육체의 현저한 일”(갈 5:19)이요, “신의 성품”(벧후 1:4)은 “성령의 열매”(갈 5:22)를 가리킵니다.

‘사랑’(ἀγάπη; love)은 성령의 은사이기도 하며 열매입니다. 사랑은 모든 계명의 완성이요 요약입니다(갈 5:14; 롬 13:9-10). 성령으로 말미암는 사랑은 사람들을 향하여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사랑이 조건적이고 소유하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소유의 사랑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동화에서 나무가 아이에게(그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는 전 과정을 통하여) 주는 사랑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사랑은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거나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을 때 증오로 바뀌기도 하고, 그 사랑이 식을 때 무관심으로 바뀌지만,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증오로 바뀌지 아니하고 여전히 사랑이며 식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희락’(χαρὰ; joy)은 “항상 기뻐하는”(살전 5:16) 마음이요 상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속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살전 5:18). 바울은 그가 갇힌 자로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8),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반복적으로 기뻐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옥에 갇힘이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가 갇힘의 고통 가운데도 기뻐할 수 있음은 그의 안에 성령께서 그를 위로하시고 희락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현재의 상태를 바라보는 대신에 소망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아무리 기뻐하고 싶어도 그 자신의 의지로는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 슬픔과 고통을 잊을 수는 있겠지만,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희락을 성령은 주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61장 3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임하실 때)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증거합니다.
희락을 그 마음에 갖는 사람은 슬픔과 괴로움 가운데 그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를 바라볼 수 있으며, 멀리 보이는 소망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이 만사가 형통하여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형편 가운데도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그것을 믿고 느끼기에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화평(εἰρήνη; peace)은 지속적이고 동요가 없는 잔잔한 평온의 상태입니다. 염려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염려와 고통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의 화평이 믿는 사람에게 주어질 때 그는 염려와 고통 가운데서도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염려와 고통은 잠깐이요 화평은 지속적입니다. 화평은 한글성경에서 ’평화‘ 또는 ’평안‘이라고도 번역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 patience)이 있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중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쾌락에도 빠져보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음이 이러한 유혹을 견디게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서 바울은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1-2절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또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5장 7-8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이 짧은 것 같지만 그렇게 짧은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풍랑이 일고 때로는 비바람이 치는 험한 인생 길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을 온전히 지키기 위하여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자비’(χρηστότης; kindness)는 친절한 행동을 의미하며 실천적인 선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be kind to one another)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양선’(ἀγαθωσύνη; goodness)은 ‘의, 번영, 친절’ 등의 뜻으로 자비보다도 더욱 능동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5장 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양선, goodness)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에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goodness)과 의로움(=righteousness)과 진실함(=truth)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충성(πίστις; faithfulness)은 “믿음이 많다”는 뜻으로 "믿음“이라고도 번역됩니다. 하나님께는 경건함으로 대하는 것이요 사람들에게는 신실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온전히 믿음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πιστός, 믿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에서는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으며, 또한 디도서 2장 10절에서는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고 권면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πραῢτης; gentleness, humility, meekness)는 외적인 부드러움이라기 보다는 주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적으로 있어야 할 겸손하고 부드러운 자세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도 하는데, 빌립보서 2장 5-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온유할 자가 기업으로 얻을 땅은 곧 천국입니다.

절제(ἐγκράτεια; self-control)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적절히 사용하게 하여 지나친 방종과 무질서의 삶을 멀리 하게 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절제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는 육체의 현저한 일에서 자신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25절에서 바울은 유대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against such there is no law)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맺는 삶은 율법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그 안에 가짐으로써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면서도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4절에서 바울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강조했습니다.

3
기왕에 교회생활을 하며 기왕에 믿기로 작정한 바에야, 교회생활을 하는 둥 마는 둥, 믿는 둥 마는 둥 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켜도 좋고 변화시키지 않아도 좋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에 부차적이고 장신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우리의 생명이요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듣고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은 들을 귀를 갖고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고백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고 바르게 깨달아 알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육체의 현저한 일들을 하는 모습이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믿음에 ‘뛰어난 사람’(上士)이 되어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생활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육신에 속한 교인의 삶을 사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를 사모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