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6, 2015

“종과 자유자” (갈 4:21-27)

“종과 자유자” (갈 4:21-27)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1
아내가 남편이 원하는 것을 하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편이 구박하거나 싫어하고 화를 내기에 억지로 마지못하여 하면, 그 아내는 남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멍에일 것입니다. 아내가 가정 일을 돌봄이 종은 아니더라도 자유자도 아일 것입니다.
어떤 아내가 자기의 남편을 마음속으로부터 진정 사랑할 때,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무서워하는 아내가 하루에  그 남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억지로 하는 일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힘들어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하거나 보람 있어 할 수 도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그 일이 적어도 부담이요 멍에이지만, 하기를 원하는 일은 그 일이 많아도 기쁨이요 찬송이 됩니다.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에게 맡겨진 업무를 감당함이 부담스럽거나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하게 되면, 이 사람은 회사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함이 신바람이 나고 즐거울 때 이 사람은 자기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에 순복함이 기쁨이 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충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2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바울은 율법의 속박 아래 놓이기를 원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말을 이어갑니다.
‘율법’이라 할 때 가장 좁은 의미로는 십계명을 말하고 보통은 모세오경,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모세오경에는 규례와 명령들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강조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하니, 그가 말하는 믿음이 다른 곳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라 바로 율법 책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말씀함은 “율법 책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느냐?“라는 반문입니다. 모세의 오경 중에 첫 번째 책인 50개의 장으로 구성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일생이 1/4을 차지합니다(창 11:27-25:18). 그만큼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일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유대인들과 갈라디아인들과 우리에게 보내주신 까닭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며 이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얻게 하고 따라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22-23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본토 친척 아비집 갈대아-우르를 떠나서 유브라데 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하란이라고 하는 곳에 그의 아비 데라가 죽기까지 머물다가 그곳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이었습니다(창 12:4).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와 하란을 떠날 때, 또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종종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민족과 복의 세 가지 약속을 거듭 말씀하셨는데, 하란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어느 것 한 가지 온전히 주신 것이 없습니다. 그중에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어진 재물이 복이라고 한다면 이는 웬만큼 받았다고 할지라도 후손(민족)과 땅은 아직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란을 떠난 지 십 년쯤 지났을 때(창 15장)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마음에 불평과 원망이 생기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임하십니다(창 15:1). 그리고 그의 몸에서 후사가 생길 것인데 그를 통하여서 자손이 밤하늘의 뭇별만큼이나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주십니다(창 15:4-5). 때로는 불평하고 때로는 원망의 마음도 생기는 아브라함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매 ‘여호와(의 말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15:6).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되 구체적으로 그 약속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십 년 이상을 약속을 바라보고 있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들의 ‘무작정 기다림’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행동으로 옮기는데 보다 적극적이었던 사람이 사라였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제안합니다. “여보,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신 것 같으니 나의 몸종 하갈을 취하시지요. 그리하면, 우리가 혹 자녀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창 16:2 참고). 아브라함도 사라의 말이 그럴 듯 하여 애굽 여인 하갈을 첩으로 취하고 동침하니 그의 몸에서 육의 자녀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사라도 이를 기뻐하였건만 그 기쁨은 잠깐 뿐이요 하갈과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요즘도 ‘씨받이 여인들’을 두는지 모르겠지만, 아기를 낳아주고 주인집과의 모든 관계가 정리되는 경우는 드물고 아기에 대한 애정과 그 아기를 통한 욕심이 함께 작용하여 주인집 여자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게 됩니다. 하갈의 ‘씨받이’ 일을 제안한 사람이 사라인데, 이 일로 인하여서 사라와 하갈이 갈등하게 되고 또한 두 여인 사이에 끼어있는 아브라함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이스마엘로부터 십사 년이 지났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 백 세, 사라의 구십 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민족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하갈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 태어난 육체의 자녀라고 한다면, 사라의 몸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으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입니다.
바울은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으로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 율법 지키는 일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약속은 접어두고 육체의 자녀 이스마엘을 얻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믿음 중에) 기다림은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임을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합니다.
또한 바울은 육체의 자녀 이스마엘을 나은 하갈이 종인 것에 착안하여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함은 곧 종에게 속하는 것이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바라봄은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교회 일을 계획하고 추진함에도 이와 같은 경우를 종종 봅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헤아리고 이대로 따르기보다는 사람의 생각과 주장이 앞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행할 때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온전한 약속과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임함은 종종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더딥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포기하게 되고 자포자기하거나 세상의 방법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는 믿음이 적은 자의 모습입니다.

   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바울이 하갈과 사라, 또 그들의 자녀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하여 말씀함은 비유입니다.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하갈은 구약(옛 언약)을 대표하고 사라는 신약(새 언약)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먼저 옛 언약을 대표하는 하갈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유대인들도 조선시대에 그러했듯이 신분과 혈통 상으로는 모계 쪽을 따랐습니다. 어머니가 종이면 자녀도 종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의 혈통과는 상관없이 자녀도 유대인이요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자녀도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도 되건만, 어머니 하갈을 따라서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은 장소가 시내산이 아니지만, 바울이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라고 기술함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종되게 하는 율법과 종된 자녀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을 비유로 연결시키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서, 갈 3:19)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장소가 시내산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한달쯤 되었을 때 그들이 도착한 곳이 시내산입니다. 그들이 그곳에 일년을 머물렀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계명들과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의무와 부담감으로 기쁨도 없이 율법에 얽매이고 따라서 율법의 종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억지로 율법지킴은 율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본래 선하신 뜻과는 상관없이 그들을 종되게 하였습니다.

   25절: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이 시내산을 육체를 따라난 이스마엘의 후손들인 아라비아 사람들은 하갈산("Mount Hagar" by the Arabs, Living Bible)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산은 또한 아라비아 지경의 한 산이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시내 산의 율법을 당시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칭의와 구원에 있어서 ‘율법의 효력성’을 강조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시내산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거룩한 산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한낱 부담과 종의 신분으로 매이게 하는 산밖에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긴 하지만, 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복음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구원’을 가로막는 일을 감당한다면 이는 다만 저주와 종의 땅밖에 될 수 없습니다.
시내산과 그곳에서 허락하신 율법과 지상의 예루살렘은 옛 언약과 그 중심으로 참된 것의 그림자일뿐 참된 것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들과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믿음 이외에 할례와 식사규례(dietary law)와 다른 율법들을 강요할 때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내산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율법에 종노릇하는 자들의 산과 도성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심과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로 자유케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자유함 가운데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쁨으로 찬양하며 영광 돌려 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해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본체 이외의 다른 것에 자신을 얽매기를 원합니다.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적인 생각과 수단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지라도 우리가 그 외형적인 것에 속하게 됨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외형적인 것에 얽매임이 우리에게서 자유인의 기쁨과 자원함을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형상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르며 섬기는 일을 그들의 역사 가운데 빈번하게 행하였지만 이는 하나님께 속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가짜 하나님의 형상에 얽매이는 일일 따름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우리를 자유케 하며 오직 믿음에 의지하여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고자 할 때 이를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누누히 강조합니다.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음에만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허락하시고, 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것에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사모하되 우리가 현재 머물고 있는 이 땅에서, 그림자에 불과한 예루살렘을 추구하며 그곳에 머물고자 하지 않고 영원한 예루살렘--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소망을 두고 그곳에서의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위에 것을 바라보는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며 참 어머니 사라에게 속한 자가 되게 합니다.

   27절: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이사야서 54장 1절에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서 ‘잉태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를 말씀함에 사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첩으로 취하였을 때 사라의 입장이 일시적으로 홀로 사는 자와 같았으며 사라의 몸종 하갈은 남편 있는 자와 같았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종된 여인 하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인 사라에게 있음을 강조합니다. 홀로 사는 자, 사라의 자녀들과 이들에 대한 축복이 현재는 남편이 있는 것같이 보이는 하갈과 그의 자녀들에 대한 축복보다 클 것임을 말씀합니다.

3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함이 부담이 됩니까? 아니면,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이 억지요 마지못함입니까? 아니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여주신 주님의 말씀이기에 기쁨과 감사함입니까?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들의 찬송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순복하는 삶의 모습들을 보시기를 원하시되 우리가 자유자로서 주님을 기쁨으로 찬송하며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으로, 우리 입술로, 그리고 우리 삶으로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리되 이러한 모습이 또한 우리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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