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30, 2015

“성령으로 행하라” (갈 5:24-26)


“성령으로 행하라” (갈 5:24-26)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1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에서 본받을 것이 별로 없기에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싶은데, 교회에 나가면 목사는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교인들은 믿음이 무슨 만병통치약인 듯 믿음은 내세우는데 삶은 거짓과 위선이 가득 찬 것이기에 집에서 혼자 신앙생활하기로 작정합니다. 무교회주의자로서 흔히 일본인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와 한국인으로는 김교신(1901-1945)씨와 함석헌(1901-1989)씨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듭니다. 이분들의 삶이 본받을 만한 것이 많고 매우 윤리적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교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아닌 이상, 그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심은 교회에 유익을 주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하셨는데, ‘두세 사람 혹은 그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건물이 아닌 성도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서) 교회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믿음의 공동체에 예수님께서 같이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그의 영, 곧 성령으로 같이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감람산(Mt. Olives) 위에서 그리스도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의 수가 500여명이었는데(고전 15:6 참조), 이들 가운데 380여명은 어떤 사유로 인하여-개인 일로 바빠서 혹은 믿음이 없어서-흩어지고, 오직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전 1:14-15). 이 120명이 신약시대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120명의 무리에게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불의 혀같이 갈라짐으로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는 형식적인 예배의 모양만이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구약시대 북방왕국 이스라엘에도 남방왕국 유다에도 경건의 모양이 있는 형식적인 예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드리는 헌신과 희생이 없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어 하나님께 예배는 드렸지만 돌아서는 그 순간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그들의 다른 우상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마태 9:13, 12:7)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대적인 감각에 맞추어 풀어쓰면, “나는 너희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 없이 드리는 예배를 원치 아니하며,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려고 함이 없이 드리는 형식적인 헌금을 원치 아니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고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예배를 드리며, 믿는 사람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고자 함입니다.

존 그레이(John Gray)의 베스트셀러,「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습니다. 금성에서 온 여자가 화성에서 온 남자를 사랑하나 그 사랑을 자기 방식대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화성에서 온 남자에게는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상대방의 원함은 헤아리지 않고 자기 식대로 행함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금성에서 온 여자의 화성남자 ‘사랑하기’가 그들의 혹성간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이질적이고 어렵듯이, 땅의 사람의 하늘 하나님 ‘사랑하기’가 참으로 멀리 동떨어지고 어려운 듯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올바로 표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스런 신부가 되는 비결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는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각 성도는 그리스도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원하심의 뜻을 믿는 사람에게 알리시기 위하여 성령을 그의 속에 허락하셨습니다(고전 2:10-11). 따라서, 믿음의 사람은 그의 속에 들어오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러했지만 신약시대의 교회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미 온전하고 거룩해진 성도들의 모임은 아닙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거의 전부가 불완전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불완전하고 허물이 많기에 사실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믿음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말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재 믿음이 있거나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곡식이라고 한다면, 믿음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가라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밭에 곡식들과 함께 가라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뽑아버리지 말고 그냥 놔두라고 하십니다. 이는 가라지를 잘못 뽑다가는 곡식까지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 13:24-30). 따라서, 교회는 이래저래 불완전하고 흠 투성이인 듯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고 놀라우신 일을 이루실 때, 교회밖에 있는 보다 더 온전하고 거룩한 무교회주의자들을 사용하시지 아니하시고, 허물과 흠이 많은 성도들의 집단을 사용하여 오셨고 또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아들의 피값을 지불하고 사신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시고 귀하신 축복의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이에 속한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고 부족함에 머물러 있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하심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와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의지로는 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신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가능합니다.

2
5장 24-26절은 바울이 5장 16절로부터 말씀하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의 결론 부분입니다.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흔히 “그리스도인들” 또는 “크리스천들”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곧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22-23절에서 나열한 성령의 열매맺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그리할 때 육체를 좇는 삶을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정과 욕심을 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미 앞서 16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16절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24-25절에서는 육체의 욕심을 죽일 때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삶,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가능케 함을 말씀합니다.

“정과 욕심”에서 정(情, passions)은 헬라어로는 파세이마(πάθημα)로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 속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죄심(罪心)이고 욕심(慾心, desires)은 헬라어로는 에피수미아(ἐπιθυμία)로서 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죄성(罪性)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였다는 것은 그 정과 욕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못박았다(ἐσταύρωσαν; aorist, one time action)는 뜻입니다.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는 한 순간의 결단으로 없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신령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과 욕심은 결단으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여전히 끊임없이 육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괴롭히며, 이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부단한 미혹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은 그것이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 일인 줄 알아서 버리기로 작정하였다는 뜻이며, 그러나 그 버리는 일조차 인간의 의지로서는 불가능한 일인 줄 알아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함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죄의 몸으로 인하여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됩니다. 그의 안에서 일어나는 정과 욕심으로 인하여 죄를 지을지언정 이를 제하여 달라는 회개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사람”은 그의 육체에서 정과 욕심이 일어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며, 변명거리로 삼는 사람이며, 따라서 여전히 육체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여전히 죄에게 종노릇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의 역사가 없습니다. 성령은 그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하고 도우심을 간구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5절의 한글 개역 성경의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εἰ ζώμεν πνεύματι, πνεύματι καὶ στοιχώμεν)라고 한 번역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글 공동번역 성경은 25절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 절에서 “성령으로 산다”고 함은 “생활한다”는 의미보다는 성령이 없는 자의 생명이 없는 삶과 구분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명이 있는 자의 삶을 살고있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서 3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 널려 있는 골짜기로 인도하십니다. 이 마른 뼈들은 심령이 죽은 자들인데 그들은 현재 살아있는 자 같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대언하게 하시고 에스겔이 대언할 때 마른 뼈들이 서로 연락합니다.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여 제대로 된 사람의 모양을 갖추었지만 그들은 아직 산 자들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들에게 아직 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겔 37:8).
하나님의 명을 따라 에스겔이 생기를 향하여 대언할 때 바람과도 같은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고 했습니다.
이 생기(루아흐)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기운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여기서는 생명의 기운 그 자체인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첫 번째 사람 아담에게 들어가매 그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령(a living being or soul)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하여서 생명의 기운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은 바로 영원한 생명의 기운 그 자체 또는 생명의 기운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갈 3:2, 5)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이요 성령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고 사는 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따라서 생명을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갈 5:16, 25).
“성령으로 행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연인으로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갈 5:16-17).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현저한 일들이 나타나는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갈 5:19-21).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라고 했습니다(갈 5:16-17).
성령의 열매맺는 삶입니다(갈 5:22-23).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결단입니다(갈 5:24).
그 위에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함이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의 마음에 이미 들어와 계신 성령께서 그를 도우실 때,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약한 육신에 정과 욕심이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과 욕심에 끌려서 사는 자신을 안타깝게 여기며 도우심을 간구하는 그 사람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있게 됩니다.

   26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단하지 않아서, 결단하였지만 성령에 의지하지 않아서 여전히 정과 욕심에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또한 여전히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격동하며 서로 투기하는 삶을 삽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함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여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격동하며, 서로 투기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어려움이 있고 결국에는 사랑의 공동체가 깨어지는 위기로까지 몰고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μὴ γινώμεθα κενόδοξοι)고 경계합니다.
“헛된 영광”(κενόδοξοι: empty or cheap desires to boast)이란 쓸 데 없는, 무익한 영광 또는 자랑들입니다. 사람들이 무익한 자랑들을 일삼고자 할 때 자기를 주장하게 되고 따라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에서 멀어지며 교회가 시끄럽게 됩니다.

“서로 격동하는”(ἀλλήλους προκαλούμενοι) 일이 “헛된 영광을 구함”에서 비롯됩니다.
“격동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프로칼레오마이(προκαλέομαι)는 ‘화나게 하다’, ‘울화통이 터지게 하다’(irritate, make angry)의 뜻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할 때” 이것이 또한 교회 안에서 “서로 질투하는”(ἀλλήλοις φθονούτες) 일을 초래합니다. 이 질투 또는 투기(φθόνοι)는 바울이 나열한 육체의 현저한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21절).
 
3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행하는 삶을 지속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의 모양은 있으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모양은 있으나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인도네시아의 한 섬을 찾은 선교사님 일행이 밤이 되어 한기(寒氣)를 느끼자, 나뭇가지들을 모으고 불을 지핀 후에 빙 둘러앉아서 훈훈한 불을 쬐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멀찌감치 숨어서 혹은 나무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원숭이들은 이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게 여겨집니다. 다음 날, 그들도 나뭇가지를 모으고 불을 지피는 흉내를 내며 삥 둘러섭니다. 그러나, 원숭이들의 불을 쬠은 흉내일 뿐 거기에 타는 불의 따뜻함은 없습니다.
성령의 훈훈한 불 없이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다만 신앙의 흉내만 있는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리의 삶에 성령으로 행함이 있고, 그로 인하여 성령의 훈훈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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