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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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부모에게 효성스런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그 마음에 기쁨에서가 아니라 순종하지 아니하면 부모님이 노여워하실까 바 마지못하여 겉으로만 순종하는 것이라면, 아니면 형제들 가운데 더 많은 유산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이 아들은 순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집에 머물러 있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명을 지켜 행하였지만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 동생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자 마음이 상하여 아버지께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이 아들의 문제는 바로 아버지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그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던 것이 기쁨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었던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원하는 대로 밥상을 차리며, 옷을 다리며, 집안의 청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의 기쁨이 아내의 기쁨이 아닌 한에서는 아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멍에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의 원함을 따라서 그와 외식을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러간다고 하더라도 아내와 함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그의 남편으로서의 봉사 역시 남편으로서의 멍에일 것입니다.
어떤 신실하다고 인정받는 크리스천이 매 주일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참석하고 새벽예배까지 참석하지만, 그가 드리는 예배가, 그가 교회에서 감당하는 봉사가 그에게 기쁨을 주기는커녕 늘 부담이 되고 그를 짓누르는 일이 된다면 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신앙생활도 그에게는 멍에가 될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나 자신을 드리는 일이 기쁨이요, 감사요, 감격이 될 때,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복음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원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이 그것을 잘 지켜 행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요 부담이요 마지못함이 될 때, 그들에게 율법은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의 지시사항이 아니요 그들을 짓누르며 그들 위에 독재자처럼 군림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강제적 법 집행 수단처럼 여겨졌습니다.
해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요 그저 하나님의 노예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고자 하였지만 이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그리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은 점점 그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으로 인식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에게 멍에요 저주처럼 여겨지기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주시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원함이기도 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나 부담감으로 마지못해 하고자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를 향하여 권고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함은 율법을 지키고자 원함이 없으면서 그것이 구원을 주는 요건으로 오해하여 억지로 그것을 지켜나가는 삶을 살지 말라는 말씀이지 하나님의 지시하심과 선하신 뜻을 무시하는 방종의 삶을 살아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과 자유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종은 어떤 일을 행함에 주인의 결정에 따라 부득이함으로 하고, 자유자는 자신의 결정에 따라 기쁨과 원함으로 합니다. 자유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김이 종으로서 섬김보다 훨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자유자로서 신앙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으로서 우리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설교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구원을 주는 요건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며, 따라서 율법을 (구원을 위해) 부담을 느끼면서 지키고자 함이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하며, 율법의 종노릇하게 하며, 종의 멍에를 메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지 아니하고, 율법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종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의 요구들)을 지킴이 가능합니까?
바울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부담을 주는 율법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7장 18-20절에서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자유자로서 하나님 말씀 지킴을 가능하게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을 때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 때 말씀에 따른 삶이 가능합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을 따라서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외형적인 모습은 있을지언정 그것을 온전히 지켜 행할 수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부담감과 죄의식만 커집니다. 그러나, 나의 부족함과 죄된 모습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씀에 따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이 구원의 요건인 까닭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며 나 또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1a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8장 31-35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심은 우리가 자유자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노예 또는 종이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명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으며 또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누구의 종이었습니까?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종이었습니다. 그의 미혹에 따라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 아래 놓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사단은 참으로 교활하여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그의 종 되게 하였습니다.
때로는 거짓 하나님을 사람들 마음에 만들어놓고 그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함으로 참 하나님과 결별시켰습니다.
금송아지의 가짜 하나님을 만들게 하고 이를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저주와 부담을 세워놓고 이를 지키지 아니하면 구원을 잃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피를 헛된 것이 되게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어떠한 것도 하나님께서 신약 백성들에게 더하신 것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사단의 사슬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우리의 노력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되어서는 안되고, 다만 믿음과 함께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기도의 노력이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의 종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율법이 그들의 상전이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할 때 율법이 그들을 징계하고 저주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못하여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의 종이었더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사 율법의 종노릇함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율법의 말씀에서 좀 떨어진 삶을 살아도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잃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1b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그러므로 굳게 서라”(στήκετε οὖν, stand fast therefore)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자유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라는 권고입니다. 우리를 구속하던 죄와 사망의 사슬이 풀렸는데, 종의 굴레가 풀렸는데, 여전히 자유 없는 자의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자유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기쁨으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이 세상에서 번창하고 충만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처음 지으셨을 때 그들은 자유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꼭두각시나 로봇(robot)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선하신 바람은 그들이 그 자유를 창조자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 돌리는 일에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원하심을 저버리고 타락함에 그들의 자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회복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바라시는 것은 그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인간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1c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멍에”(ζυγός, yoke)는 보기만 하여도 부자연스럽고 무겁게 여겨집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한 남자의 아내 됨이 멍에로 여겨지는 여인은 남편을 위해서 하루에 세끼 밥을 차리는 것도 부담스럽고 마지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여인은 남편을 위해서 하루 세끼는 물론이고 그 남편이 중병에 걸렸을 때 그 간호하는 일도 오히려 가벼운 일로 여겨집니다. 이 여인은 그의 자유를 사용하여 남편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함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종의 개념’은 “죄의 종” “사단의 종”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빠져 들어가고 있는 ‘율법의 종’입니다.
모든 종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의 종’ ‘사단의 종’,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종’ ‘의의 종’으로 하나님을 충성으로 섬기고자 한다면 잘하는 것이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0-23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자로 삼으시고 죄인이었던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함에 종처럼 우직하게 봉사와 희생을 할 수 있습니다(고전 4:1-2 참고).
베드로전서 2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고 세상의 이익을 탐하는데 사용되지 않게 하는 역사 또한 성령의 하시는 일입니다.
3
미국에 노예 해방이 있기 전, 뉴올리언스의 노예 시장에서 아름다운 흑인 소녀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경매자들은 그 소녀의 가격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계속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가격을 불렀습니다. 경매는 그 사람이 1,450달러에 소녀를 살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북부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흑인소녀는 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은 흑인소녀의 주인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소녀는 슬픈 목소리로 말합니다. “난 선생님과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웬 증서를 소녀에게 건네 주며 말합니다.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오. 나는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산 것이오. 이걸 보시오. 이것이 당신의 자유를 보장하는 증서요.”
소녀는 잘 믿기지가 않아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샀다고요. 정말 자유의 몸인가요?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나요?”
“물론, 당신은 자유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소.”
그러자 소녀는 기쁨과 감격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저의 전 생애 동안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저를 데려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의 노예 시장에서 그의 피값으로 사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세상 임금인 사단과 죄에게 속하지 않은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자유를 세상에 속한 나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나를 피값을 주고 사신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그리스도의 자유한 종”입니다.
충성된 종으로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나를 하나님은 “종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녀로” 받아주시며 종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자녀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를 향하여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사단의 종의 멍에, 죄의 종의 멍에는 물론이요, 율법의 종의 멍에도 메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우리를 속박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는 자유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되 참 기쁨과 감사로 그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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