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0, 2015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이사야 7:10-16)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이사야 7:10-16)
        
  7: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1
많은 경우에 우리의 믿음은 현실적(現實的)이고 계산적(計算的)입니다. 내 머리로 판단할 때 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음직한 일들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만 믿고 그 이상의 것은 믿음의 고백은 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믿지 않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어느 날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교수가 들어와서 어떤 여성 신학자(Barbara Thiering)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주장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이를 들은 많은 학생들이 그 여성 신학자와 또 그 얘기를 들려준 그 조직신학 교수에게 강한 항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인즉슨,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것이 아니라 로마병정에 의하여 겁탈을 당해 태어난 사생아(私生兒)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의 강한 반발로 인하여 수업이 중단될 정도의 험악한 분위기를 맞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성신학자의 주장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 반대자들의 주장을 반복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하시다--의 메시야를 고대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그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때, 그 반대자들은 이를 부인하기 위해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이 예수는 ’숫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아니라’ ‘처녀가 낳은 아들이긴 한데, 성령 대신에 판테라(Panthera)라고 하는 로마병정의 겁탈(rape)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생아’라고 퍼뜨렸습니다. 이로써 이것이 2세기말 기독교를 공격한 불신자 켈수스(Celsus)의 「참교리(True Doctrine)」란 책을 통하여 공공연한 사실인 것처럼 퍼지고, 반기독교적인 랍비문서와 탈무드(Talmud)에도 ”Jesus ben Panthera(판테라의 아들 예수)“란 이름이 등장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천지창조, 먼 옛날의 천사의 나타남은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復活), 승천(昇天)과 재림(再臨)은 마음으로부터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주님의 나라에서 영혼 뿐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과 생명강가에서 대화하는 삶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건 있으면 나쁠 것이 없지만, 교회를 찾는 많은 이유가 그저 현재를 살 때 하나님이 보호하고 축복하고 예비하여주시고 함께 하사 별 어려운 일 없이 평안하고 범사에 잘 되는 삶을 살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반을 통하여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삶은 현재에서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다가 죽는, 그리고 죽은 후의 세계는 어찌됐든 상관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시기 위하여 처녀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탄생하시고 인간 가운데 사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승천하시고, 또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시며 그때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이 분부하신 일을 하며 살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끝이 이 세상에서의 평안한 삶과 그 이후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떠한 현재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떠한 현재 삶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서의 우리의 영원한 삶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과 영적인 능력은 성경을 지식적으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평신도로 오랜 세월을 보내고, 신학교 생활을 하고, 20여년의 목회자의 삶을 살면서 얻은 확실한 결론은 우리 믿음과 영성의 많고 적음은 성경의 지식도 아니요, 목사, 장로, 집사다 하는 직분도 아니요,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주님과 기도와 간구로 교통하는가에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공부는 이렇게 기도하고 낮아진 심령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고 현재의 삶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데 유익을 줍니다. 성경공부는 지식의 쌓여감을 본인이 알 수 있지만, 기도의 능력과 깊이는 짧은 시간안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느는 것같지 않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시간과 열정의 투자를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중히 여기는 사람과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대하고 이해함과 전도함과 삶 전반에 있어서 오래지 않아 확실한 차이를 드러내게 됩니다. 내년 한해에는 더욱 기도를 강조하는 교회가 되어 저와 여러분의 삶과 교회의 비젼이 더욱 광대하여지고 구체화되기를 바랍니다.

                                                                        2
이사야서 7장에 남방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735-720 B.C.)때 아람 왕 르신과 북방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며 유다를 치려고 서로 동맹하였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왕과 백성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불안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유다를 향하신 뜻을 알게 하십니다.
아람과 북방왕국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남방왕국 유다를 공격하여 멸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기에 다윗 집에 결단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선포케 하십니다.
7절에 보니까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과 이스라엘의) 이 도모(圖謀)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하시고, 9절에 유다를 멸망시키려는 이스라엘--에브라임이 오히려 “65년 내에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고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10-11절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신 뜻과 일을 이루시고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곧 믿는 백성들에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종 다윗으로 말미암아 그의 패역한 후손 아하스 왕과 백성을 주변국가의 공격--특히 르신과 베가의 공격으로부터 건져내실 것을 약속하시되 아하스와 그 백성이 이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조그만 믿음의 표시로서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믿음을 갖기 위하여 징조를 구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드온을 사용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기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 할 때, 기드온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알기 위하여 표징을 구하되 세 번이나 반복하여 구하고 또 구합니다: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사사기 6:17);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두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6:36-37);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 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6:39). 그러나, 이러한 기드온에 대해서 하나님은 역정을 내시지 않으시고 그에게 그대로 보여주십니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악함과는 달리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39세 때 종기로 병들었을 때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에게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열왕기하 20:1)고 말씀하실 때, 그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전심전력 기도합니다. 이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시겠다고 하실 때, 히스기야는 열왕기하 20장 8절(이사야 38:22)에 보니 “징조”를 구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화를 내시지 않으시고 “해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리시는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 20:25)고 말합니다. 팔일이 지나서 도마와 다른 제자들이 한 집에 모여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 20:27)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시는데, 이는 도마를 나무라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며, 긍극적으로는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도마는 그가 구하는 징조를 본고로 그 주님을 위하여 기쁨으로 죽을 수 있었습니다. 한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살껍질을 벗기는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심 전력을 다하여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몇 번 대충 구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조를 얻을 때까지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매어달렸듯이 그렇게 전심으로 구하라는 뜻입니다.

12절에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같으며 믿음이 있는 사람의 말처럼 보입니다.
아하스가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아니하여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다”고 한 것은 그의 믿음없음을 드러낸 말입니다.
징조를 구하는 일이 귀찮은 노력과 아까운 시간을 들이는 일이기에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면서도 입으로는 번드르하게 하는 말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많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불신앙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바쁘실 터인데 이런 일까지 구할 수 있나요. 이런 일은 제가 해결하도록 해야죠!” 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달리기 보다는 세상의 방법이나 자신이 생각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13절에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고 말씀합니다.
아람왕과 이스라엘왕의 협공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며 전심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호소하는 대신에, 병사를 모으고 전쟁양식을 비축하는 일은 백성을 괴롭게 하는 일이요 왕으로서 이런 일을 가볍게 여기고 불신앙의 방법을 사용함이 다윗의 집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한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초자연적이요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기에 이 징조를 바라보기 위하여, 얻기 위하여 믿음이 필요합니다.

출애굽하는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셨던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그랬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셨던 요단강의 갈라짐과 역류(逆流)가 그러했고 또한 여호수아가 구할 때 해를 정지시키신 징조가 그러했고, 히스기야에게 보여주셨던 해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가는 징조가 그러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이 세대에게 보여주실 유일한 표적이라 하신 “요나의 표적”--곧 죽은 자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표적이 또한 그러합니다.

이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시는 징조 역시 초자연적이며 인간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숫처녀--동정녀의 몸에서 한 아이가 탄생할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처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알마인데 이 알마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숫처녀 ‘베툴라’와는 약간 달리 결혼하지 않은 젊은 처녀 전반에 해당하는 단어라고 해서 동정녀 탄생에 이의를 제기하는 성경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어떠한 기사와 이적도 또 다른 이유를 달아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에서 마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주신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징조”의 예언, 그러나 아하스는 그의 불신앙으로 보지 못한 이 징조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제 이르매 여자 가운데 큰 축복을 얻은 마리아에게 어떻게 임하는지 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했습니다.
그와 정혼한 여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하였다는 이야기가 요셉의 귀에까지 들리자 그는 조용히 그 관계를 끊고자 하지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을 통하여 “아이가 부정하게 잉태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聖靈)으로 잉태되어진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21절에 “이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일러주는데, “예수”란 구약의 “여호수아” 혹은 “예수아”와 같은 이름으로서 “여호와는 구원”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22-23절에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일이 이루어짐이 “주께서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알립니다.
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처음 유다왕 아하스에게 주변의 적들로부터 유다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한 징조를 보여주시되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는” 아이 “임마누엘”을 통하여서 이루리라 하신 그 예언 그러나 그의 불신앙으로 얻지 못했던 것을 신약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징조를 구하되 믿음의 마음으로 구하는 사람에게 허락되어집니다.

15절에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선악을 분변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게 될 때에 그는 인간의 보통 아이들과 같은 모양으로 뻐터와 꿀 등 사란들의 음식을 먹으면서 자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되심을 말씀하고자 함입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심을 보여줍니다.

16절에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다에 그리스도가 활동하기 전에 유다를 위협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케 되리라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두 왕의 땅”은 7장 1-9절에 보는 바대로 르신왕의 땅 아람과 베가 왕의 땅 에브라임(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너희가 그들을 두려워할지라도 그들의 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한 바 되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아람과 에브라임은 앗수르왕 살만에셀 5세에 의하여 멸망을 당합니다.

                                                                       3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부정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일에 대해서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고는 부활했다고 주장한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매 주일 사도신경을 통하여서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징조를 고백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이를 믿지 않고 품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한 커다란 징조-곧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낳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이를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이 2,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으로 약속하시고 그로부터 700여 년이 지난 다음에 성취하신 그 징조를 바라보고 믿고 여러분 삶 가운데 그 의미를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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