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거치는 것” (갈 5:7-12)
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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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을 얻기 위하여 땅을 파는 사람은 꾸준하고 열심히 한 곳을 파들어 가라는 권고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식으로 파면 물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기왕에 파기 시작하였으니 죽기 살기로 파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사전조사(事前調査)에 의하여 물이 나올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판명된 곳이라면 중간쯤 파들어 가다가 물이 안 나온다고 포기하고 딴 곳을 팔 것이 아니라 물을 얻을 때까지 열심히 파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알기 위하여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시간과 방법을 정하였으면, 조금하다가 말고 또 다른 시간과 방법을 구하든지 아니면 성과가 없는 것 같아서 집어칠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일을 꾸준하게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문제는 너무 성급하여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적인 진리와 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빨리 변화하는 ‘컴퓨터 문명’의 영향인 탓도 있습니다. 속전속결로 어떤 결과를 얻지 못하면 집어치기가 일수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 백년의 세월(500여세에서 600세까지, 창 6:13-7:12)을 산중턱에서 방주를 만드는 일을 꾸준히 감당하였건만, 현대인에게는 십 년은커녕 오 년도 감당하기 어려운 긴 기간입니다. 주위사람들이 노아를 조롱하고 비난하였지만, 그는 오랜 기간을 묵묵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만일 나에게도 노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라고 명하시면 그대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성경을 통하여서 끊임없이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노아처럼 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끈기와 한결같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회하는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의 성과가 없는 것 같아 초조합니다. 목회의 방법을 변화하고 설교 스타일을 바꿉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성경 속에서 그 방법을 찾아내면 목회의 방법이나 설교의 변경이 반드시 경망스러운 것은 아닙니다만, 대부분 목회 스타일을 바꾸는 목사님들을 보면 유행을 따라가거나 유명하다는 목사님을 모방하기에 바쁩니다. 가끔 참석하는 목회자 세미나는 자극을 주는 것이기에 목회에 도움을 줄 것이지만, 한 달이 멀다하고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에 (그것도 비행기까지 타고 가는 먼 거리를) 찾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조급한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보존학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영어성경 ‘King James Version'만이 성경의 절대 권위인 것으로 간주하여 다른 성경들을 정죄합니다.
이 King James Version은 17세기의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통치(1603-1625) 초기에 존 레이놀즈(John Reynolds)를 중심으로 왕실작가 54명이 8년 동안 안티옥(Antioch) 사본(신약) 등에 기초하여 원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말씀보존학회’에 속한 사람들(혹은 그 일부)은, 예를 들어, 요즈음 가장 보편화된 영어성경 중의 하나인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신교에 속한 목사들이 카톨릭과 손을 잡고 번역한 성경으로 ‘마귀의 성경’이라고까지 폄하합니다. 그들은 ‘New King James Version'까지 포함하여 ‘New'자가 앞에 붙은 모든 성경은 마귀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사용하여오던 ’개역한글판‘ 성경도 King James Version을 따른 것이 아니기에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저들 나름대로 King James Version을 직역한 한글성경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저 개인적으로는 New International Version보다는 King James Version을 선호합니다).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단의 미혹을 받은) 번역자의 잘못으로 변개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약간의 변개가 엄청난 해석상의 오류를 가져오고 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에 잘못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를 통한 바울의 메시지를 바로 이해한다면, (성경학자가 아닌 신앙인으로서) 단어 한 자 한 자에 매어달림이 우리로 오히려 문자의 멍에 아래 놓이게 하고 문자의 종이 되게 하고, 문자가 믿음을 대체하여 구원에 이르는 요건인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말씀보존학회’에 속한 사람들은 영어성경과 한글성경(카톨릭용 공동번역성서, NIV를 번역한 현대인의 성경은 물론, 개역성경까지)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많은 예배의 형식과 내용도 비판합니다. 그 첫 번째가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그들이 배척하는 것은 이것이 카톨릭에서 행하여져온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상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하면 ‘동정녀 마리아’ 고백이 잘못이라고 대답합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무엇이 잘못되었나 물으면, 이는 기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음녀 바벨론’을 가장한 것으로 ‘음녀 바벨론(로마 카톨릭)’을 고백케 하는 마귀의 술수라고 대답합니다. (카톨릭 신자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어느 개신교 목사나 성도가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을 고백하며 그 마음에 ‘음녀 바벨론’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염두에 두겠습니까?
그들은 목회자가 예배 시에 착용하는 검은 목사가운도 카톨릭의 잔재이며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기에 입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을 확대하면, 흑인은 죽음의 색을 입은 사람들이기에 하나님 안에서 ‘산 사람들’(living people)의 나라인 천국(天國) 백성이 될 소망은 일찌감치 포기해야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는 이들이 자기들의 주장과 뜻을 확대하기 위하여 목사님들에게 서신을 지속적으로 보내며, (미국의 경우) 이곳 저곳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는데 이 세미나에 참석했던 목사님들이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예배 중에 뺀다든지 그들의 주장에 따라 개역 한글성경을 버리고 King James Version을 번역한 한글성경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반드시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주장대로 요즘 성장하는 교회들은 예배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런 신앙이나 목회의 원칙도 없이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떠돌아도 좋은 크리스천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지지 말라’, ‘율법의 종노릇하지 말라’, ‘자유자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였지만, 이는 ‘원칙이 없는 삶을 살라’고 하는 권고는 아닙니다.
신앙인의 경주에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원칙’(또는 법, 딤후 2:5)입니다. 믿음의 원칙은 다소 느슨한 것 같지만 신앙인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가 기쁨으로 감당하여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지 그로 하여금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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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현대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의 색깔이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텐데 구태여 자기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손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은 분명히 이것인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어떤 이해관계를 위해서 혹은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우리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그가 당할 불이익이나 비난이 어떠한 것인 줄 내다보이는 상황에서 전도자로서 설교자로서 자기의 색깔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색깔을 드러내지 않음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이는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7절: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을 달음질(경주)에 종종 비유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절에서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2장 5절에서는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고, 4장 7절에서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천의 달음질은 믿음의 법에 따른 믿음의 달음질인데, 이는 삶의 종착지를 향한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가 계신 곳을 향한 것입니다.
믿음의 달음질을 하는 사람에게 유혹이 있습니다.
‘꼭 그 달음질을 해야 하느냐?’
‘왜 달음질하느냐?’
‘왜 그렇게 부지런히 달음질하느냐? 쉬엄쉬엄 달음질해도 되는 것 아니냐?’
‘너의 달음질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너의 달음질 코스(course)가 잘못되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달음질하는 규정(rule)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고칠 것을 종용(慫慂)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달려온 (믿음의) 규정대로 계속 달려가면, 그들은 종착지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그들에게 혼동을 준 것입니다.
아직 믿음의 경주에 초보인 그들은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하는 선생이 그들에게 첫 번째 믿음의 복음과 믿음의 달음질을 하라고 가르친 바울보다 더 명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달음질의 규정과 코스를 수정하여 달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 일을 신앙의 본질적인--결코 수정하거나 변개해서는 안될--문제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반문합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이제까지는 믿음의 법에 따라 믿음의 달음질 코스를 잘 달려오더니, 대체 누가 너희들의 길을 막고 진리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게 하더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누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오도(誤導)했는지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그들이 수정하여 달리기 시작한 그 길이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강조(强調)하여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달려온 믿음의 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열려진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20절에서 “그 (믿음의)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길을 꾸준히 달려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니께서는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태 7:14)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한동안 달려가던 사람들도 종종 “이 길만이 과연 진리의 길이요, 유일한 길인가?” 회의를 갖는 때가 있습니다.
미혹하는 영이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때로는 더욱 편해 보이는 길을, 때로는 더욱 어려워 보이는 길-하기에, 진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길--을 우리 앞에 놓습니다.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제시한 길은 ‘더욱 힘들고 어려워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때로 상당수의 소위 ‘신실해 보이는’ 크리스천들이 넘어지는 것은 (구원의 한 요건으로서) ‘더욱 힘들어 보이는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쩐지 양에 차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더욱 어렵고 그럴듯한 방법을 제시하는 집단에 속하여 진리가 아닌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8절: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믿음의 법과 코스의 달음질에서 돌이켜 더욱 힘든 믿음과 할례와 율법의 법과 코스의 달음질을 하게 한 권고는 진정으로 그들을 부르신 이--하나님에게서 나온 권고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이 제시한 방법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할 분이 있을 줄 압니다.
믿음에 할례나 율법을 더함이 뭐 그리 큰 문제입니까?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권속들에게 행하라고 하신 것이고(창 17장) 율법이란 것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칭의와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더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악(惡)은 그 전파하는 속도가 빠르고 영향력이 큽니다. 바울이 지금 원하는 것은 ‘할례와 율법’의 누룩이 갈라디아 교회 전체에 온통 번져서 손을 쓸 수 없을 때가 이르기 전에 이 누룩을 제거하고자 함입니다.
십중팔구는 사람을 죽게 하는 암(癌)도 기관(organ)에 막 퍼지기 시작하는 1기에 발견하면 완치율이 상당히 높다고 하며, 아직 2기에만 발견해도 어느 정도는 완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주고 사신 바 된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각 지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각 지체인 성도는 건강한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며, 나쁜 누룩 또는 암세포를 옆의 다른 지체에게 퍼뜨림으로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죽어가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쁜 누룩이 무엇입니까? 불신앙의 말이나 위선의 모습들입니다. 처음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는 별로 문제가 안됩니다. 저 사람은 초신자라 저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려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한 지가 오래된 직분자가 불신앙의 언행을 할 때, 이는 때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누룩을 퍼뜨린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유대주의 크리스천 교사요, 교회지도자였습니다.
원하였든 원하지 아니하였든, 교회생활을 오래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아 교회를 병들게 하는 나쁜 누룩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0절: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은 곁길로 빠져 있지만 바울은 그들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너희가 잘못된 종교행위의 길에서 돌이켜 바른 믿음의 법에 따른 믿음의 길로 돌아올 것을 확신한다고 소망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교사의 선동을 받아 잘못된 길로 빠진 성도들의 허물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잘못된 길로 오도(誤導)한 거짓 교사들의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괴악(怪惡)하고 악독(惡毒)한 누룩을 퍼뜨리는”(5:8) “악한 사람을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5:13)고 단호함을 보입니다.
야고보서 3장 1절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자기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이 죄이지만, 더욱 큰 죄는 다른 사람들까지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32절에서 바울은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옳다 여기느니라.”고 말씀합니다.
11절: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은 ‘할례 받지 아니하여도 무방하다’고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게 되고, 그 공회의 마지막에 공회장 야고보의 제안은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아니하여도 좋은데, 다만 네 가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은 멀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할례나 율법 지킴이 이방인의 (그리고 결국은 또한 유대인들의) 구원요건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교회를 비롯한 바울의 전도지역에서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은 이방 교인들을 선동할 때,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도 예루살렘 공회의 결과 지금은 할례를 받으라고 전한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옳다고 믿는 믿음과 할례(와 율법)의 (다른) 복음을 전하였으며, 이것이 이방인들에게 먹혀들어 갔습니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바울은 이것이 거짓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자신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크리스천이 된 이래 전혀 할례를 전한 적이 없음을 명백히 선언합니다.
그가 전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담대하게 전함이 바울의 유일한 전도 내용이요 전략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 말씀하고, 2장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전도를 통하여 또한 그 이후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3차 전도여행 중?) 비방과 중상을 받고 핍박을 당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기 때문이지 할례를 전하였기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바울을 비방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방인이 아니라 오히려 동족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까지 따라다니며 십자가를 증거하는 바울을 핍박한 적이 부지기수입니다. 바울이 할례를 아울러 전하였다면--곧,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더라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타협이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모습과 다릅니다. 현대를 사는 신앙인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침해를 받을 때는 ‘뭐 그럴 수 있지’ 하며 대범하게(?) 침묵하다가도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이라는 비본질적인 것이 반대에 부딪히면 이를 끝까지 물고늘어집니다.
12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스스로 베어버리기(mutilate themselves)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베어버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콥토’(ἀποκόπτω)는 ‘거세하다, 절단하다’는 뜻입니다. 할례와 연관하여 풍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세당한 사람처럼 스스로 자신의 근원을 베어버려 힘을 쓰지 못하는 자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다시 믿음의 법에 따라 믿음의 경주를 온전히 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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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제가 현재 파들어 가고있는 우물은 생명과 구원의 물이 솟을 것이 확실한 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믿음과 구원의 주체되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던 예수님께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법칙에 따라 믿음의 달음질을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달음질을 경주하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꾸준히 믿음의 달음질을 달려갈 것입니다.
믿음의 달음질을 달려가되, 우리가 믿고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들고 이를 증거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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