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저한 육체의 일” (갈 5:19-21)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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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도 무갈 왕조의 위대한 황제 아크바르(Akbar, 1542-1605)는 아홉 명의 현인(賢人)들을 궁중에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매우 화가 나서 현인들을 부르고는 소리칩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너희들이 가장 현명하다고 하는데, 나는 너희들에게서 전혀 배운 것이 없다. 너희들 아홉이 여기 있는데도 나는 그대로 마찬가지니, 너희들은 여기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마침 한 아이가 궁중을 구경하고 싶어서 어느 현인을 따라 들어왔다가 황제의 꾸짖는 말을 듣고는 소리내어 웃습니다.
아크바르 황제는 화가 나서 아이를 나무랍니다. “왜 웃느냐? 궁중에서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너는 네 아버지에게서 예절도 배우지 못하였느냐?”
아이가 말합니다. “제가 웃었던 이유는 이 아홉 명의 현인들이 침묵을 지키는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폐하께서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이유도 알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그 아이를 보면서 말합니다. “그러면 네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이냐?”
“예!”
“그렇다면 가르쳐 보아라!”
“먼저 폐하는 제 말을 따르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앉아 있는 이 자리로 내려오셔야 하고 왕좌에는 제가 앉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폐하께서는 황제가 아니라 제자로서 질문을 하십시오.”
황제가 아이의 자리에 내려와 앉았고 아이가 상좌에 올라앉아 입을 엽니다. “이제는 황제가 아니라 제자답게 질문을 하거라.”
그러나 황제는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아이의 발을 붙잡고 말합니다.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의 발치에 겸손한 자세로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황제는 그제서야 당대의 아홉 현인들을 곁에 두고도 그가 왜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아홉 명의 현인들은 완전히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르칠 능력이 있었으나 왕이 준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고, 가르침을 받아들일 마음도 없었고, 겸허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유대인 학자에게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온 식구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경건한 가정이었습니다. 어느 저녁 날 기도시간이 끝났을 때 한 아들이 아버지께 말합니다. “아버지 다른 형제들은 다 잠만 자는데도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버지는 의기양양해 있는 이 아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얘야, 그래서는 안 된다. 네 형제의 흉을 말하는 것보다 네 형제와 같이 자는 편이 낫겠구나.”
이 아들의 문제는 다른 형제보다 더 경건한 기도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교만의 마음으로 형제들을 흉잡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교만이 때로는 겉모양의 겸손으로 포장되어 있는 듯 하지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단의 미혹의 대상이 되게 합니다. 이 교만의 마음을 사단은 적절히 자극하며 그로 인하여 성령의 소욕보다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게 만듭니다. 하와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늘에 닿아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높이 쌓은 것이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를 듣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다 교만의 소치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각 사람 속에 있으나 하나님을 인정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원하심을 거스리는 사람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말씀을 믿고 따른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말씀을 교묘히 피해 가고자 합니다.
이 교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때로는 성적인 문란(紊亂)을 초래하며,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것들을 만들게 하며, 때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중상하게 하며, 또 때로는 자기의 이기심과 탐심을 따라 하나님이 없는 자와 같은 방종한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각 사람에게 있기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그가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 인간을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자로 만드는 교만의 소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1-23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愚蠢)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교만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 두사”(1:24)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시며,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사”(1:26) 순리대신에 역리를 택하며,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1:28) 합당치 못한 육체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육체의 일로서 15가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를 네 부류로 구분해보면, 첫 번째는 감각적(성적, 도덕적)인 것들이요, 두 번째는 미신적(종교적)인 것들이요, 세 번째는 관계적(사회적)인 것들이요, 네 번째는 개인적 방종의 소산물입니다.
19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1음행과 2더러운 것과 3호색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φανερὰ δέ ἐστιν τὰ ἔργα τής σαρκός; the works of the flesh are evident)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육체의 소욕을 따른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9절에 열거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은 감각적(육체적, 성적, 도덕적)인 것들입니다.
음행(πορνεία, illicit sexual activities), 더러운 것(ἀκαθαρσία, moral impurity)과 호색(ἀθέλγεια, licentiousness)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의 성적인 범죄들을 살펴보면, 기혼자나 미혼자가 불륜한 성관계에 빠지는 것, 자신의 성적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여 지나친 육체적 탐닉에 빠지는 것, 음란 비디오나 잡지, 인터넷 사이트를 지나치게 즐기는 것, 성의 순리에 따르지 아니하고 역리를 선택하여 동성애나 동물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들을 들 수 있습니다. 사탄의 성적인 미혹은 믿음이 크다고 하는 사람들도 쉽게 빠져드는 인간에게는 아마도 가장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 것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십 년, 이십 년, 혹은 그 이상 쌓아왔던 도(道)를 헛된 것으로 만든 도승(道僧)의 일화가 비일비재합니다.
유명했던 목회자의 타락의 뒤에도 성적인 문제가 놓여 있음을 흔히 봅니다.
한때, 전 세계의 크리스천들을 감동과 회개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텔레반젤리스트’(televangelist: 텔레비전을 매체로 한 부흥사) 지미 스웨거트(Jimmmy Swaggart) 목사의 성적 스캔들(scandal)은 참으로 애석하기까지 합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가장 즐겨 읽던 책이 성경이었습니다. 청년의 나이에 그는 이미 성경을 줄줄 암송하며 꿰어 엮을 줄 아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울려 퍼지는 그의 설교는 전 세계의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개의 눈물과 새로운 신앙의 결단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방송의 고정 시청자가 전 세계에 수백만에서 수천만에 이르렀습니다. 설교를 통하여 전달되는 그의 삶은 거룩 그 자체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를 항상 괴롭히고 결국에 (적어도 목회자로서는) 망하게 한 것이 음란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경이 그의 삶을 사로잡았는데, 이에 못지 않게 그를 사로잡은 것이 있는데 곧 음란물이었습니다. 이것이 끝내 유명한 부흥사가 된 그를 창녀의 집으로 유혹하고 사람들 눈에 띄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음란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창녀와 함께 있는 것이 목도되어 교계를 아연케 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성적(육체의 감각적)인 유혹에서 자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소돔 성을 멸망하신 일이 동성애 때문임을 교훈하며(창 19장) 여기에서 동성애를 뜻하는 ‘소도미’(sodomy)란 영어단어가 파생되어 나왔고, 또한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동성애를 행하는 것이 인간의 교만으로 하나님의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것이라고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일부 간 큰 신학자들과 교단에서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으로 성경을 임의로 변경 해석하여 현대시대에는 동성애를 하여도 그렇게 크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이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아니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도 변역함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욕망 가운데 식욕(食慾) 다음에 커다란 욕망이 성욕(性慾)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로 고상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플라톤(Plato, 427?-347? BC)도 오죽하면 그의 책, 「국가론(Republic)」에서 나이 듦의 미덕(美德)이 성욕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했겠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음행을 비롯한 성적(性的)인 죄는 몸 안에 그 죄가 머물러 있기에 그 죄성이 심각합니다. 그러하기에, 그의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에 이르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음행의 죄는 누룩과도 같이 번지는 힘이 크기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13절에서 “(음행의 죄를 범하는)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20절: 4우상 숭배와 5술수와 6원수를 맺는 것과 7분쟁과 8시기와 9분냄과 10당짓는 것과 11분리함과 12이단과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육체의 일은 종교적 또는 미신적인 것으로서 우상 숭배와 술수라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εἰδωλολατρία; idolatry)는 그 용어의 규정이 광범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그 대상이 됩니다. 숭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 이외에 자연물 태양이나 달이나 나무를 그 마음에 두는 것, 혹은 부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놓는 것 등입니다. 때로는, 재물 사랑함이, 자식 사랑함이, 또는 지위나 명예나 학문을 사랑함이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이것이 우상 숭배이요 우리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사랑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술수(φαρμακεία; sorcery, magic)는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대신에 점술가, 관상가, 심령가나 무당 등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장래의 운세를 알고자 함입니다. 또 이러한 운세를 말하는 점술가, 관상가나 무당의 일을 가리킵니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이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점술가나 무당을 찾고, 대학 입학시험을 앞둔 부모들이 점쟁이를 찾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떠드는 분들이 교회 안에서 또는 교회 밖에서 세상 점쟁이나 무당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증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의 어떤 권사님이 정말 신통하게도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족집게처럼 잘 맞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가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기를 원하는 마귀의 소행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성령의 은사는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하여 주어집니다.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육체의 일은 대인관계(對人關係) 혹은 사회적(社會的)인 것으로서 원수를 맺는 것(ἔχθραί; enmity, hostile feelings and acts)과 분쟁(ἔρις; strife)과 시기(ζήλος; jealousy)와 분냄(θυμοί; anger, outbursts of rage)과 당 짓는 것(ἐριθείαι; outbreaks of selfishness, disputes)과 분리함(διχοστασίαι; dissensions)과 이단(혹은 편당, αἱρέσεις; factions, party spirit)과 투기(φθόνοι; outbreaks of envy: 21절)가 있습니다.
인간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분쟁(다툼)과 시기와 분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悅納)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아니하셨을 때, 가인은 ‘왜 하나님이 내가 드리는 제사를 기뻐 받지 아니하셨을까?’에 대해서 생각하고 반성하는 대신에 시기하는 마음으로 분냄의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그 시기와 분냄의 감정이 종국에는 동생을 살인하는 일까지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신심(信心, religiosity)이 특심하여서 몇 사람만 모이면 교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같은 마음으로 세운 교회인데, 사람이 조금 늘어나 교회다운 형태를 갖추게 되면, 편가르기를 하고, 분당과 편당의 일을 서슴없이 합니다. 목사파와 장로파, 원로목사파와 현재 담임목사파, 김집사파와 이집사파로 나뉘어집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뒤에서 수군거리며 반대자들을 비난하기에 열을 올립니다. 이것이 비단 한인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고, 바울 시대 고린도 교회가 또한 분쟁과 편당의 전형이며 기타 여러 교회들 안에 이 분당과 편당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러한 교회 내에서의 성도간의 대인관계 문제들 역시 교인들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동하였기에 생기는 일입니다.
21절: 13투기와 14술 취함과 15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네 번째 부류에 속하는 육체의 일은 개인의 방종(self-indulgence, license)에 관한 것으로서 술 취함(μέθαι; drunkenness)과 방탕함(κώμοι; carousing, excessive banquets)인데, 이 네 번째 부류에 속한 것과 첫 번째 부류--즉, 성적인 것과 합쳐서 감각적인 것 또는 도덕적인 것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술 취함‘의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편의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자기를 자제할 수 있는 것은 술 취한 것이 아니고 자제할 수 없는 상태가 술 취한 것이니 자제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마시는 것은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나 술 취함이 한잔 마심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잔 한잔이 쌓여서 술 취함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니 할 수만 있다면(약의 용도로 사용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딤후 5:23 참고) 온전히 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잠언기자는 23장 31절에서 “너는 그것(=포도주)을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술 취함이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만들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감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훼방하기에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방탕함(κώμοι; carousing, excessive banquets)이란 술잔치를 벌이며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삶의 모습으로서 성령의 소욕과는 거리가 먼 현저한 육체의 일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육체의 일들을 열거하는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의 관심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일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애석하게도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때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들보다도 더욱 육체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11-12절에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 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일을 멀리 해야 할 것은 “이러한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 5절에서도 바울은 “너희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질문할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얻고 구원함을 받는다고 했으니, 믿는 사람의 삶 가운데 현저한 육체의 일이 나타나더라도 칭의(稱義)와 구원(救援)과는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까? 만일 현저한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국 행위로 인한 구원 또는 율법으로 인한 구원이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의 바울의 논조를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3장 7절에서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했고, 3장 9절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복은 궁극적으로 믿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그 기업을 받을 복인데, 3장 29절에서 “너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와 함께 바울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3:2, 5). 믿는 사람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육체의 소욕을 대항하여 역사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에 통회하고 자복함을 주십니다. 육체의 현저한 일을 계속적으로 하면서도 통회하고 자복함이 없는 사람은 구원에 합당한 ‘고백하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또한 ‘고백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당연히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또는 ‘행하는 믿음’을 갖는데, 이 믿음이 육체의 현저한 일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게 합니다.
3
성도의 교회생활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축복된 삶의 연습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여전히 육체의 현저한 일들 가운데 놓여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함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는 그를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쁨과 평안을 맛보는 우리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이, 감사와 찬양이 어떠한 줄 아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생활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이미 온전한 삶을 사는 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부족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거룩하지 못한 모습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족한 가운데,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거룩하지 못한 가운데 교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과 분쟁하는 대신에, 다투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는 대신에,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당한 삶이요, 장차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의 삶을 연습하는 의미에서 교회생활을 하며, 우리 안에 아직 육체의 현저한 일이 있을 때,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원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전히 그러한 것들을 버리고자 힘쓰는 각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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