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6, 2015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 (갈 5:2-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 (갈 5:2-6)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
어떤 분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내게 나타나셔서 기적을 보여주신다면 나의 믿음이 확실해질텐데...“라고 아쉬움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의 수 없는 기사와 이적을 체험했건만 믿음이 변변치 못하였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크리스천 작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도 그의 책 「Disappointment with God」(「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최병채 옮김, 좋은씨앗 발간)에서 '누구나 꿈꾸고 있는 기적이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기적을 볼 수 있고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바라는가? 애굽에 임했던 10가지 재앙이나 만나 같은 기적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생각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기적이 많다고 믿음의 성장이 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기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기보다는 기적 그 자체에 우리 자신을 중독시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현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이 없습니까?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바울의 질문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전 19:2)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을 때에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3:2, 5). 신약백성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성령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한 가장 큰 기사와 이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던 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던 자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내적인 증거가 확실한 사람에게 외적 증거는 덤으로 주어집니다. 외적 증거에 몰두하다가 내적 증거를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5세기의 교부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가 한창 저술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바닷가를 산책하는데, 한 아이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모래에 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궁금하여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아이는 대답합니다. “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내어 바다를 마르게 하려고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이없어 하면서 아이의 어리석음을 꾸짖자 아이는 오히려 그를 조소하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이 조그만 지식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무궁한 신비를 캐내려 하니 그 어리석음이 나의 행위보다 더합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헤아려 알고자 하거나, 자신의 경험법칙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측량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이라는 말을 교회에 나올 때마다 듣고 있지만 결코 ‘믿음의 사람’(man of faith)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에 합당합니까?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 자신의 의지와 행위와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음을 자복(自服)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허락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사람’-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2세기 중엽의 영지주의자 프톨레마에우스(Ptolemy, Valentinus의 제자)는 「플로라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Flora)에서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영지(靈知, gnosis)를 받아서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그들의 깨달음으로 (영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데,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엘리트 크리스천으로서 드물게 존재합니다. 두 번째는 영지를 받지 못하였기에 좀 어리석게 무조건적으로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인데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불완전하고 깨달음이 없는) 믿음으로 구원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영지도 받지 못하고 믿음도 없는 사람들로서 이들은 구원함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깨달음-영지가 필요 없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믿음뿐입니다. “구원에 관한 도(道)”가 복음-good news-인 것은 그 진리가 단순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에서는 멀리 있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진리는 단순하고 쉬워서 누구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 우리가 특별히 윤리적이든지 성인군자(聖人君子)일 필요도 없는 것이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구약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때로는 친히 나타나시고, 때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또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사항인 율법을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사람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오심은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따라서 함께 사는 구원의 삶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그 믿음으로 칭의와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 그 어떠한 것도 칭의와 구원을 위하여 보탤 것이 없습니다.

   2절: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함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인지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고 구원함에 이를 수 있음을 여러 가지 대조와 예를 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이 할례를 받는 행위가 그리스도 구원의 온전성을 일부 또는 전부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고자 함’이 그 자신을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결단의 의미가 아니라, 칭의와 구원의 한 방편으로 그리함인 것을 바울이 알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죽으심은 그 자체로 온전한 대속(代贖)이요,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향하신 구원계획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요한 19:3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어떠한 것도 구원을 위하여 더하여질 것이 없습니다.

요즘은 할례(circumcision)를 주로 의학상의 이유로 행하지만, 만일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의 요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헌신하기 위한 결단의 표시로서 할례를 행하고자 했다면 바울은 이를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의 한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결단의 표시로서 할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할례 받은 사람이 이를 무할례자와 구분하여 자기 의를 드러내거나 자기 헌신의 자랑꺼리로 사용하고자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러한 할례도 바울은 금할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표면적 육신의 할례는 행하였는데, 내면에서는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그의 할례는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 될 뿐입니다.

창세기 17장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그 가정(household)의 할례 받음은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십여 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아브라함과 그의 가정의 할례는 구원의 요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표시였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10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신명기 30정 6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렘 4:4).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씀합니다.
겉모양만 있는 헌신이 아니라 마음 속 중심으로부터의 헌신이 하나님께 귀하게 여겨집니다. 칭의와 구원을 떠나 할례(이러한 의미에서 세례)는 그 나름대로 중요성을 갖는데 할례는 하나님께 헌신함이 삶 가운데 나타나짐으로 그 유익성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와 구원에 이르게 된 크리스천이 그의 믿음의 고백 이후에 교회의 회중 앞에서 물세례를 받습니다. 물세례를 받는 것은 물세례가 구원의 한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요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으로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겠다는 공적인 선언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함으로 드러내놓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고자 함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더욱 중요한 세례는 성령세례인데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인 것을 자복하고 회개하며, 그러므로 죄사함의 확신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3절: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칭의와 구원의 요건으로 할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무효화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기에 이 사람은 자신의 공로로 구원에 이르러야 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 전체를 한 가지도 빠짐없이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그 중에 한 가지라도 부족함이 있으면 그 부족함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고 구원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 12)라고 말씀합니다.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칭의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이외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윤리적인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근간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재를 사는 상당한 수의 교인들도 이런 미혹에 넘어갑니다.
어떤 전도자가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간에 재림하시면 구원받을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변변한 삶을 살지 못하였는데 구원받을 수 있을까? 나는 아마 들림 받지 못할꺼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와 율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기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나의 부족을 시인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은 나의 공로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함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비로소 은혜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바라봄이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온전하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또 다른 종류의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요 이미 ‘(구원받을만한) 믿음’에서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믿음이 적지만 그래도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요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같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재림하시면 구원받을 것을 확신합니까?”
“나의 믿음이 온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기에 '예 나는 구원받을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신앙고백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공로(功勞)에 의존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게 된 후에 아무리 이 생각을 떨쳐버리고자 하더라도 우리의 힘으로는 이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나와 친한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구분됩니까?
내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적어도 무엇 한 가지 이상은 나에게 잘해준 사람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든지 내가 필요할 때 무엇을 도와준 사람입니다.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은 나에게 별로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도움을 준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근에 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든지 나에게 반대나 해를 끼친 적이 있으면 과거에 그의 공로는 모두 무너져 내립니다. 이러한 ‘공로주의 경험법칙’이 하나님을 헤아림에도 선입견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이것이 나의 믿음 성장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법칙은 인간의 공로법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성향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법칙을 (머리 속으로는 이해하는 것으로 여기더라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법칙은 세상 살아가는 법에 익숙한 나에게는 너무나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우리가 성령의 사역에 순복하고자 할 때 성령께서 나를 도우사 하나님의 은혜법칙을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은혜법칙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며, 그에게 허락되어지는 구원이 그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며,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나의 마음을 깨끗케 하심도 하나님의 은혜요, 소망 중에 의로와짐의 결과인 구원을 기다림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의의 소망”(the hope of righteousness)이라고 한 것이 특이한데, 의의 완성을 소망 중에 기다림입니다. 의의 완성은 곧 ‘믿음의 의’로 구원함에 이름을 말합니다.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는 것은 할례를 받은 것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그의 구원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잘 지키거나 지키지 못함도 우리의 칭의와 구원에 효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보다 윤리적이거나 덜 윤리적이거나도 (이상스럽게 들릴 것이지만) 칭의와 구원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참으로 귀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이 은혜의 선물을 귀하고 감사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까지 속하여 살아온 공로법칙을 포기하고 그의 삶 가운데 은혜법칙을 따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참으로 크기에 그도 그에게 아무런 유익을 준 적이 없는 주위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 공로법칙이 아니라 은혜법칙으로 대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은혜법칙으로 대하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요 도움입니다. 다른 사람을 은혜법칙으로 대하는 사람은 이제 할례와 율법 그리고 행위에 종노릇함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과 함께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믿음은 온전하고 진실한 표현인 사랑을 은혜법칙에 따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3
공로법칙에 따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외형적인 삶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할례가 중요하며, 율법이 중요하며, 봉사가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그의 칭의와 구원을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법칙에 따른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칭의와 구원을 얻게 된 것은 나에게 외적 할례의 표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율법을 자 지키는 삶을 살기 때문도 아니요, 나의 행위가 선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내게 임한 까닭이요, 내가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가진 까닭입니다. 은혜법칙 하에 사는 믿음의 사람은 그의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하심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중국인으로서 세계적인 교회지도자요 선교전략가인 토마스 왕(Thomas Wang)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 그의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설득한 결과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기로 승락하긴 하였지만 그 마음에는 별로 내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북경에 있는 어느 선교사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선교사 부부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분들이 믿는 예수님이라면 한 번 믿어봐야 되겠다’고 다짐하고 비로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위사람들을 의식하여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부담스러운데 그러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리는 것은 은혜법칙 하에 있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이러한 삶을 사모하게 하며 성령이 우리를 도우실 때 이러한 삶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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