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7, 2015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갈 5:16-18)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갈 5:16-18)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
사람들에게는 육체의 소욕(the desires of the flesh)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뿐에게만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 안에서도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마귀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다가와 “나에게 속하기만 하면, 부귀와 명성, 그리고 지위를 포함하여 이 세상을 살면서 네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들을 들어줄께‘라고 속살거리면 아마도 80-90%이상이 미혹될 것입니다.
그리 함으로 마귀는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교회 생활의 목적이 현세에 머물고 있는 까닭에 이를 미루어 짐작함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중에 바라본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사는 까닭에 이 욕망에서 자유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어느 임금님의 전용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발사가 임금님의 머리를 깎고 궁궐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어디에서인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 금단지 일곱 개를 갖지 않을래?” 이발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또 소리가 들려 옵니다. “너, 금단지 일곱 개를 갖고 싶니 않니?”
“누구시오? 누군데 내게 금단지를 주겠다는 거요?” “금단지 일곱을 받을래? 받지 않을래?” “바, 받겠습니다. 대가(代價)는 뭐요?” “대가(代價)는 아무 것도 없다. 집에 가보아라.”
이발사가 집에 와보니 과연 금단지 일곱 개가 그의 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발사는 이제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곱 금단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섯 개의 단지는 금은보화로 가득 차 있는데 나머지 한 개는 반밖에 차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것마저 가득 채우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해서, 돈을 버는 대로 금은보화로 바꾸어 일곱 번째 금단지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일곱 번째 금단지의 보화는 좀처럼 차지 않고 언제나 반만 차 있습니다.
이발사는 더욱더 오기가 나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줄여가며 금단지를 채우려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발사의 얼굴은 근심에 가득 차게 되고 그의 몸은 여위어 갔습니다.
이를 본 임금님이 어느 날 이발사에게 묻습니다. “네 봉급도 많이 올라가고 별 걱정이 없는 줄로 아는데 요즘 행색이 왜 그 모양인가? 혹시 일곱 단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냐?” “아니, 임금님이 그것을 어떻게...?”
“예전에 악마가 내게도 그런 제안을 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그 금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지. 모으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그러자 악마는 금단지와 함께 사라져버리더군. 너도 그 단지들을 버려라. 평생 너의 마음을 금단지에 묶어놓을 수는 없지 않느냐?”

어떤 7세 된 어린아이가 동생을 서랍에 보관되어 있던 총으로 싸서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오발이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습니다.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아이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였습니다.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사람이 성장하면서 모양과 방법의 변화는 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육체의 소욕을 이루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연약한 모습들입니다.

2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ψυκικοί)입니다(고전 2:14). 이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를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으로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마태 13:3-23)에서 길가에 뿌리운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고, 혹 듣더라도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것으로 여겨서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σαρκικοί)입니다(고전 3:3). 이 사람은 부지부식간에 성령의 인도로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또한 여기에 속한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교회 안에서 열심이 있습니다. 믿음의 고백으로 그의 속사람은 성령의 지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의 겉사람은 여전히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종종 시기와 분쟁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뿌리운 자입니다. 돌밭에 뿌리운 자는 때로 말씀을 듣고 기쁨이 있지만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닥치면 넘어집니다. 가시 떨기에 뿌리운 자는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합니다.
셋째는 ‘영에 속한 사람’(πνευματικοί)입니다(고전 2:15). 이 사람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매 그의 속사람 뿐 아니라 겉사람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성령이 그를 인도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며 말씀으로 그의 삶이 변화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고전 2:16).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뿌리운 자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뿐 아니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불신자)과 육신에 속한 사람은 주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기를 사모합니다. 성령의 소욕을 이루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에게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πνεύματι περιπατείτε, Walk by the Spirit)고 권고합니다.  믿는 사람이 성령을 좇아 행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바로 깨달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과 구원의 보장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남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어린아이는 하나님 안에서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하면,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칭의는 ‘고백하는 믿음’으로 얻어지지만, 성화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 또한 5:13-14; 야고보는 이를 행하는 믿음이라고 함)으로 가능합니다.
‘고백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역사하는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모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듯이, ‘역사하는 믿음’ 역시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지 않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고백하는 믿음’이 인간 행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역사하는 믿음’ 또한 행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주장하시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을 원함도 연약한 인간의 바람이기는 마찬가진데,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시작하실 때 성령은 우리의 원함을 하나님의 원하심과 일치되게 하시며 육체의 원함으로부터는 멀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기” 위하여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에게 성령이 이미 들어와 계시다고 바울은 누누이 강조합니다(갈 3:2, 5). 그분의 존재를 어떻게 믿음의 고백을 한 내가 확인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역사하심은 내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길로 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느낌은 기도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성령의 감동을 주시고 내가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심으로써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도우심을 알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를 느낌은 성경을 통하여 주시는 약속을 붙잡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과 씨름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 것”은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을 하지만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사람이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으며 결코 화합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앞(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믿음의 고백으로 성령으로 거듭남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좇지 않으면서도, 의지와 노력으로 성경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힘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요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이러한 삶은 참으로 부담으로 여겨지며, 어떤 핍박이나 재난이 닥쳐올 때 이를 포기하거나 부인하고 돌아섭니다.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the desires of the flesh)이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흔히 즐겨 하기를 원하는 것들입니다. 자연인으로서 (타락한) 인간은 사단이 그 마음에 심어놓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자 합니다. 성령의 소욕(the desires of the Spirit)은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허락하신 그의 영을 통하여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5-8절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이 육체를 거스림”이 너무도 당연한 것은 “육체의 소욕”은 사단의 미혹과 주장에 따른 것이요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의 뜻과 주관하심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할 때 우리의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음”을 바울은 로마서 7장 18-19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사람에게도 육체의 소욕에서 온전히 자유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는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의 주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지만, 우리의 겉사람은 사단에게 끊임없이 미혹 당하고 연약함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씀한 대로 ‘매일 죽는 삶’이 필요합니다. ‘매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갈 5:24)이 필요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매일 죽이는 삶도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얼마간 이를 가능케 하지만, 영속성이 없습니다. 사단이 우리의 의지대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삶도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도우시는 사람에게도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는 일이 어렵다고 했습니다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이외에 어떤 능력으로도 제압되지 않기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려 간구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 등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에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 명하심을 제대로 전달받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무엇이며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구약시대에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 율법을 아무리 많이 지킨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없으며, 믿음이 있는 사람이 다소 율법에 못 미치는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칭의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더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믿음의 고백으로 각 사람에게 들어오신 이후에는 성령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하여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각 사람에게 알게 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으며, 율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여도 좋으며, 율법 아래 그 자신을 놓을 까닭이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들도 믿음으로 자유자였기에 율법 아래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그들을 인도하시며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하는 길을 제시하는 말씀으로 족하였습니다(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용도를 잘 몰랐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의 요구인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시요,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 지시하심을 따라 살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4절에서 “(하나님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하나님의 선하신 뜻)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3
육체의 소욕에 젖어 있는 사람이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는 의지와 노력으로 율법을 실천하는 삶보다 더 어려운 것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임하실 때 육신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던 그 일을 가능케 하십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며 자신을 죽이는 삶이 미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성령의 생각은 이것이 진정한 평안이요 생명이라고 알게 합니다.

‘고백하는 믿음으로’ 우리는 칭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칭의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칭의와 구원을 얻은 사람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데, 이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행하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역사하는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은 육신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는 삶이요, “성령을 좇아 (믿음으로) 행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성화의 삶을 사시되 성령을 좇아 믿음으로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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