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6, 2015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 5:13-15)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 5:13-15)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많은 순간들에 있어서 (장로교 교인이건 감리교 교인이건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우리 자신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감옥에 있거나 또는 몸이 묶여 있거나 협박 아래 놓여 있어서 자유가 현저히 적은 사람은 선택의 폭이 적을 것이지만, 비교적 자유스러운 환경에 있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때로는 우리를 사망(멸망)에 이르게도 하고 또 때로는 생명(영생)에 이르게도 합니다.

2001년 9월 11일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테러를 당한 날로 기억됩니다. 그 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19명의 테러범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한계 안에서 비행기를 납치할 것을 선택하였고 또한 그 비행기를 사용하여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와 국방성 건물(Pentagon)을 폭파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슬람계 소식통의 발표에 따르면, 그들은 이슬람교를 위한 성전(聖戰)을 충실히 수행한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이 믿는 신-알라(Allah)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요, 따라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구약의 하나님이시요, 또 그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 사랑의 하나님이심이 틀림없을 진데 이런 끔찍하고 참담한 일을 명하셨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알라가 시키신 대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알라의 미명 아래 이슬람 종교 사람의 의를 행한 것입니다.

이 테러로 생명을 잃은 비행기 탑승객들,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와 Pentagon)의 참사자(慘死者)들과 그 가족들에게 이들 테러범들과 이 테러를 뒤에서 조종한 주모자는 천하에 몹쓸 살인범이요 그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 비행기에 갇혀 있던 탑승객들에게는 별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 하였습니다. 그들의 목숨은 비행기 납치범들의 손에 저당 잡혀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바라기는, 이제까지의 예들에서도 그랬듯이, 비행기 납치범들과 정부 당국이 원만히 협상을 벌여서 조속히 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World Trade Center의 쌍둥 빌딩에 부딪혀 폭파된 두 비행기에 타고 있던 150여명의 탑승객들 중에 그들의 비행기가 이렇게 끔찍하게 건물을 들이받고 공중분해 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행기 납치범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이런 끔찍한 선택을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의 43층부터 66층까지 총 24개 층을 임대하여 사용하는 몰건-스탠리 회사(Morgan Stanley Dean Witter)의 경비-보안 총책임자(security chief)로 있는 62세의 릭 레스콜라(Rick Rescorla)씨의 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그는 영국 태생으로 1960년대에 미국에 이민 오고, 이민을 와서는 곧 군대에 지원하여 월남전에 중위로 한 소대를 지휘한 사람입니다. 예비역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사람인데 몰건-스탠리사에서 18년을 근무하였습니다. 1993년에 World Trade Center가 테러범들에 의하여 폭탄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직원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8년이 경과한 지난 9월 11일 그 날 아침에도 그는 몰건-스탠리사의 가장 높은 층인 66층뿐 아니라 다른 입주사들의 직원들까지 돕기 위하여 72층에서 10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몰건-스탠리사의 3,700명 직원들과 다른 사람들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비상계단을 내려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다가 정작 그는 몰건-스탠리사의 소수(15명)의 행방불명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한 시간을 다른 사람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는데 그의 자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는 그의 이웃을 자기 몸같이-아니,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하는 삶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서와 같이, 바울의 설교에는 역설적인 표현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오늘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것도 그가 앞에서 권면한 것과는 상반된 것처럼 보입니다.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했는데, 13절에서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고하니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부르심은 분명히 자유를 주시기 위한 부르심입니다. 그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던 자들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그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신 것은 죄와 사망--사단의 권세에서만 자유케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에서도 자유케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부담을 느끼면서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무절제와 방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무절제와 방종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요, 믿음의 고백과 함께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인도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은 성령이 그의 삶을 주장하시기에 그가 무절제와 방종의 삶을 살 때 죄책감을 느끼게 합니다. 무절제와 방종의 삶은 육체의 소욕을 따른 삶으로 사단이 우리 육체의 약함을 기회 삼아 다시 그 아래로 놓이게 하고자 함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법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하되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 믿음의 법이 우리를 인도하는 삶은 율법 아래 놓인 삶이 아니라 복음 아래 놓인 삶입니다.
사단의 불의의 종이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되는 삶입니다.
사단의 종이 된 자에게는 무서운 상전을 섬기는 두려움과 부담감만이 있을 뿐인데, 우리를 자녀 삼으신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충성과 순종으로 대하기로 작정한 우리에게는 자원함과 기쁨이 있습니다.

종으로 사는 것이 자유의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운명인 사람에게는 하는 모든 일이 마지못함에서 나옵니다. 이 사람에게 종된 것이 기쁘고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주인의 종 됨을 자청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종으로서의 충성과 봉사도 기쁨이요 감사일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의 일부를 미리 유산으로 받아서 탕진하고 타지에서의 고달픈 삶을 참을 길 없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아들입니다. 그가 범한 소행을 그가 잘 알기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다만 아버지께서 그의 품꾼들 중에 한 사람으로만 대우해주셔도 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죽음에서 살아온 아들로 귀하고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돌아온 다음에 그 아들의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그가 여전히 전에 거드름을 피우던 사람으로 남아있었겠습니까? 그는 아들이지만, 충성스런 종과 같이 그를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신 아버지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신명기 15장(16-17절)과 출애굽기 21장(1-6절)에 보면 동족인 히브리인으로서 종된 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지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가난하여 종 된 자가 있으면 그는 육 년 동안 주인을 섬길 것이로되, 제칠 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유자로 놓임을 받게 된 종이 그 후덕하고 인자한 주인과 주인의 집을 너무나 사랑하여 주인을 떠나지 않기를 원하거든 주인은 그 사람을 자유케 하는 대신에 송곳으로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음으로서 그를 평생 종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평생 인자한 주인의 종이 된 사람은 그 주인을 섬기되 기쁨과 충성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유하게 된 우리는 자청하여 귀를 하나님의 집 문에 대고 뚫은 사람들로서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요, 특권은 하나님 집의 유업을 받은 자이되,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종처럼 충성되고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자청하여 종노릇하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남용하여 방종하지 않고 방종의 결과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주관하시는 이가 곧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레위기 19장 18절에서 하나님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삶이 무엇임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되, 첫 번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마태 22:34-40; 마가 12:28-31)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눈에 보이는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입으로 말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 1서 4장 20-21절에서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 2장 8절에서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8-10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하신 명령도 율법서인 모세5경 중 레위기(19:18)에 나온 명령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진수가 드러난 것이기 ‘율법’이란 갈라디아에서의 부정적인 용어 대신에 ‘말씀’(cf. 갈 3:8, 성경)이란 긍정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이며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율법과 말씀 모두가 구약, 그 중에서도 모세5경(창세기-신명기)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이지만, 이를 지켜 행함이 구원의 한 요건으로 간주되고 부담스럽고 마지못한 일일 때 바울은 이를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명령이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요 내가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하는 것일 때, 이는 나에게 말씀이요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성경은 읽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느끼고 구원의 기쁨이 있는 사람에게 성경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책이기에 그 말씀을 읽고 아는 것이 나에게 귀중하고 달게 받아들여집니다.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랑은 우리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15절을 말씀함은 그가 때로는 심하게 책망하고 때로는 경계의 말을 하는 것이 유대주의 크리스천들과 싸우고자 함도 아니요 그들과 물고 뜯기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을 하기 위함도 아님을 밝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적인 문제이기에 그가 엄하게 경책하는 글을 쓰고 있지만,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을 포용할 아량을 갖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을 좇아갔던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에서 돌이켜 다시 믿음의 삶으로 돌아올 때 그들을 사랑으로 감쌀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바울의 편지를 받아본 후에 바울을 좇는 사람들과 여전히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을 좇는 사람들의 갈림이 있다고 할지라도 서로 반목하고 물고 먹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요, 이는 사랑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고자 함입니다.

3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큰 도전의 말씀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43-44절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극한적인 경우에도 원수갚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명하신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도 “원수를 갚지 말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또한 그 가운데 우리의 선택과 결정들을 살펴보건 데, 우리의 삶이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 멀리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되었던 선택들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바울 사도를 통하여서 다시 한번 들려주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요 요약인 줄 알면서도 행치 못하는 우리의 미련함을 고백할 것이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함으로써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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