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지는 짐과 각각 지는 짐” (갈 6:1-5)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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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된 일의 공은 온통 자기의 것으로 간주하고 잘못된 일은 자기의 무능이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있는 것으로 돌리고자 합니다.
채근담(菜根譚)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명성이나 공로는 온통 혼자서 차지하려고 하지 마라. 욕된 일이나 오명은 모두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지 마라.
(完名美節 不宜獨任 辱行汚名 不宜全推)
세상 풍속(風俗)은 어떤 성공이나 칭찬거리가 있을 때 남이 한 일이라도 자기가 그 공을 가로채고자 하고, 어떤 실패나 욕된 일이 있을 때는 그것이 자기에게 원인(原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전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모습은 명성이나 공적이 있을 때는 혼자 차지할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얼마쯤 나누어주어 선망이나 시샘으로 인하여 해를 입지 않도록 할 것이며, 반면에 실패나 욕된 행동이 있을 때에는 그 책임을 전부 남에게 전가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탓으로 돌리거나 자기도 얼마쯤의 책임을 짐으로써 공동체에 속한 사람의 연대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명성이나 공로가 있을 때, 그것이 설령 전적으로 나로 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며, 실패나 오욕이 있을 때, 그것이 전적으로 타인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너”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역시 채근담(菜根譚)에 있는 말입니다.
남을 꾸짖을 때는, 잘못이 있는 가운데 잘못이 없음을 헤아린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평안해질 것이다.
(責人者 原無過於有過之中則情平)
자기 자신을 꾸짖을 때는, 잘못이 없는 가운데 잘못이 있음을 찾아낸다면 덕이 자랄 것이다.
(責己者 求有過於無過之中則情德)
어떤 사람이 잘못한 것을 책망할 때 그 사람의 허물 가운데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서 인정해주면, 아무리 심하게 야단을 맞아도 불평을 품지 않게 됩니다. 야단을 치는 입장에서,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야단을 맞는 사람의 잘못이 결국에는 그에게도 원인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과실의 책임을 나누어지고자 한다면 야단을 맞는 사람에게 분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자녀가 어떤 일에 또는 어떤 분야에 부족한 것 같아서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를 심히 야단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자녀는 나의 머리와 자질과 성정을 물려받은 까닭에 그의 부족은 곧 나의 부족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녀의 부족을 나무랄 때에도 그 원인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인정하고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노력하여 개선할 수 있음을 권면해 줄 수만 있다면 이것이 지혜롭고 온유한 부모가 되는 비결입니다. 야단을 맞는 입장이나 자신의 과실을 스스로 책망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탓으로 돌리고자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리할 때,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허물을 그 사람에게만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고백함이 짐을 함께 지고자 하는 마음이요, 자신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만의 책임으로 여김이 각각 자기 짐을 혼자 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책망할 때 그 허물의 짐에 대해서 “너”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나, 나의 허물을 반성할 때 그 허물의 짐에 대해서는 “우리”라는 말 대신에 철저하게 “나”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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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1-5절은 다분히 규범적이요 윤리적인 권면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신앙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는 개체로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져야 할 짐이 무엇이며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하여서 ‘내’가 혼자 져야 할 짐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갈 5:16, 25)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며 ‘나’의 견딜만한 가벼운 짐을 혼자 지는 삶의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한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그 사람의 잘못은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나는 그런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을 사람처럼 그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신에 속한 사람뿐만 아니라 성령에 속한 신령한 크리스천들도 잘못을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교회에 속한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있을 때 바로잡음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어려운 것은 어떻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서 돌이켜 바른 모양을 되찾게 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때 신령한 사람이 잘못을 범한 사람과 동류의 입장에서 사랑과 온유로 그를 책망하고 그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그는 혹 회개하여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책망하는 사람도 그 사람의 범죄가 나하고는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그러한 시험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함이 필요합니다.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함은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있을 때’의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있을 때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몰아붙이고 비난함은 그 사람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신앙공동체에 속한 형제와 자매로서 성도들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몸의 한 지체인 그 사람의 허물을 곧 나의 허물처럼 여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의 잘못으로 함께 괴로워하고, 그 사람을 책망할 때에도 그 사람의 잘못이 자신의 탓이기도 한 것으로 여겨서 자신을 돌아봄이 짐을 서로 지는 모습입니다.
“짐을 서로 지는” 본을 먼저 보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과 예수님의 가벼운 짐을 함께 서로 나누어질 때 우리의 삶은 한결 수월해집니다. 우리가 나누어질 예수님의 짐은 십자가인데, 이 십자가의 짐은 (이전에 우리가 지고 왔던) 우리의 죄와 허물의 짐에 비해서는 매우 가볍고 견딜만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시기를 원하셨듯이, 우리 또한 형제의 허물의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은 ‘함께 하는 마음이요 행위’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자매와 이웃의 즐거움과 기쁨, 고통과 슬픔 가운데 같이하는 마음과 삶이 크리스천의 사랑이요 유일한 법입니다.
그 위에 책망 받는 자의 책망거리와 책임에도 함께 함이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자녀가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무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 부모는 그 자녀를 망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자녀를 나무라되 그의 잘못이 곧 나의 잘못이요, 그 잘못의 책임이 자녀의 부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이기도 함을 인정하여 잘못을 범하여 책망을 하는 그 자녀와 함께 마음 아파하고 다시는 동일한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함이 사랑입니다.
동일한 신앙공동체에 속한 성도들간에 이와 같이 책망과 책망의 아픔도 나누며 함께 지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교회 안에는 쉽게 쉽게 하는 비난과 중상이 없어질 것입니다. 사랑과 온유의 책망은 있으나 그 책망으로 교회가 분요(紛擾)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더욱 더 성도의 사랑이 돈독하여질 것입니다.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형제나 자매의 범죄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결코 그러한 잘못을 저지를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하기에 그는 형제의 잘못을 쉽게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이렇게 흠이 없고 시험에 노출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결코 책망 받을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라고 확신한다면 이는 이미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연약하기에 어느 누구도 미혹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에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고 또한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신령한 사람이라도 범죄할 수 있습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의지적인 행위의 죄는 없앨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지와는 상관없는 죄들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성경은 행위의 허물만이 죄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더럽고 악한 생각들이 더욱 더 큰 죄인 것을 지적합니다(마태 15:16-20, 23:26 참고).
4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 자기성찰(自己省察)이 필요합니다. 그의 믿음의 삶에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자랑은 오직 자신 안에 두어야 할 것이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비난과 중상과 소요의 원인이 개인적인 자랑과 비교에서 되어지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자랑을 받아줄 만한 여유와 아량이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밖에서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자랑뿐 아니라 믿음의 자랑도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일 때에는 이를 듣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게 되며 따라서 수군수군함과 비난과 중상의 마음을 타인에게 심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므로 타인을 칭찬하여 주는 일에는 관대하되 자신을 칭찬하는 일에는 인색함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함으로써 사람의 육체는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하나 그리스도를 자랑함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임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그리스도의 자랑인 간증은 필요한 일인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간증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남을 책망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간증을 하는 사람이 온전히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증집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의 예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믿음의 자랑이라도 그리스도 대신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더 많다면 이러한 자랑은 자신 안에만 가두어두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입니다.
5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관대하며 그를 비난하는 대신에 그 허물의 짐을 함께 지고자 할 것이지만, 내가 범하는 잘못에 대하여는 다른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요 나의 허물의 짐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탓으로 여길 것이며 그 허물의 짐을 자신만이 지고자 할 것입니다.
서로 질 ‘짐’과 자기가 질 ‘짐’의 헬라어 단어가 다릅니다.
2절의 서로 질 ‘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이”(τὰ βάρη)는 복수형으로서(단수: βάρος) ‘혼자 지기에는 감당하기가 벅찬 무거운 짐들‘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자기가 5절에 자기가 질 ’짐‘의 헬라어 “포르티온”(τὸ φορτίον)은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견딜만한 짐‘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짐을 도맡아 지고자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큰 사람입니다.
4천년 전에 중국인들의 조상이 한자(漢字)의 원형인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 때의 이야기입니다. ‘크다’는 뜻의 글자를 만들고자 하는데 어떻게 표현할 줄 몰라서 고민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의논을 거듭한 끝에 사람을 사용하여 크다는 뜻을 나타내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 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큰 사람인가? 권력이 강하면 큰 사람인가? 아들이 많으면 큰 사람인가? ....‘ 의논에 의논을 거듭하던 끝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크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사람의 등에 가로로 짐(一)을 올려놓고 이를 ‘크다(大)’는 뜻이라고 칭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짐을 스스로 온전히 지고자 하는 이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시니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의 짐도 결국에는 가벼운 것이 됩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찬송가 363장 1, 3절)
내가 현재 스스로 지고 있는 것이 죄와 허물의 짐이거나 근심의 짐이거나, 무겁거나 가볍거나,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 자복(自服)하고 맡길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을 범하는 그러나 ‘신령한 사람’(1절)의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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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남의 잘못에 관용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짐을 무겁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입술에 불평과 비난이 끊이지 않고, 그 마음에 원망과 괴로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의 사랑이 없는 판단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인 사람에게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역사하십니다. 이 사람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성령의 소욕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짐을 함께 지고자 하며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스스로 지고자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굳이 옛 성현(聖賢)의 윤리와 도덕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온유와 사랑으로 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억지로 율법대로 살고자 하지 않더라도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고,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규범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약함을 고백하는)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강하심, 온유와 사랑으로 말미암습니다.
‘못되는 것은 내 탓, 잘되는 것은 남의 탓’이란 생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나의 책임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의 짐을 나누어지고자 할 때, 이러한 사람들이 속한 교회와 사회는 아름다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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