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7-18)
6:17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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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사람들의 이야기들 가운데 징표 또는 정표를 나눠 갖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헤어지게 될 때 커서 만나더라도 서로를 알아보고 우정을 계속 유지하자고 다짐하면서 장신구의 반을 쪼개어 나눠 갖습니다.
왕이 충직한 신하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도 그를 내치지 않고 그를 보호하겠다는 징표로 왕이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물건을 하사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가 어린 자식과 생이별하게 될 때 또는 자식이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그 태어날 자녀와 후에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자식의 징표로서 장신구의 반쪽을 쪼개어 줍니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몸에 지니는 장신구는 우정이나 신분확인의 징표 또는 보호의 정표로서 사용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징표 또는 정표로서 사용된 장신구는 몸에 늘 지니지만 분실 또는 도난 당할 경우가 있었기에, 신분확인을 위해서 태어날 때부터 몸에 갖고있는 어떤 표시(birthmark)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른쪽 어깨에 북두칠성 점이 있다든지, 등에 특이한 붉은 반점이 있다든지 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 어릴 때 입은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이 커서도 그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는 표시가 되기도 합니다.
몸에 특별한 표시가 없을 때는 의도적으로 표시를 새겨 넣음으로서 그 사람을 후에 만나더라도 알아보는 표시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혹은, 어떤 비밀결사단체들은 독수리나 뱀, 기타 특이한 문양을 각 회원의 팔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새겨 넣음으로써 자신들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표시로 사용합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이 몸에 어떤 표시를 함으로써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고 또한 보호하는 방편으로 사용한 예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가인의 예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징벌로서 그를 유리하는 자가 되게 만드시는데, 이때 가인은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를 혹 죽일까봐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그 두려움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벌주시기는 하지만 그에게 두려움을 호소하는 가인을 내치시는 대신에 그에게 보호의 표시를 주시는데, 즉 (이마에?) 표(תוא, mark)를 주시고 만일 어떤 사람이 가인을 죽이면 그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셔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내고자 하실 때, 강퍅한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떠남을 허락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천사를 보내셔서 애굽사람 집의 장자들을 죽이십니다. 이때 이스라엘사람 집의 장자를 구분하시기 위해서 어린 양을 잡고 그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사람 집의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라 표시함으로써 죽음의 천사가 이를 보고 이스라엘 사람의 집인 것을 알아보고 넘어가게(踰越) 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보호와 구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방왕국 유다와 그 수도 예루살렘을 멸망하실 즈음에 한 천사(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에스겔서 9장 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의로운 자들의 이마에 표시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실 때 의로운 자들을 구분하여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에스겔서 9장 5-6절에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실 때,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이 방법을 흉내냅니다.
해서,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는 바대로, 후에 환난의 날이 이를 때 이 세상을 장악하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이르되 그의 우상을 만들고 그를 경배하라고 명합니다. 그의 말을 따르는 징표로서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을 무론하고 그 오른 손이나 이마에 ‘666’이라는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짐승의 표가 없는 자들은 매매를 할 수 없게 만들어 일상생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핍박과 죽음의 대상이 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때 삶이 곤란하고 핍박이 두려워서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을 저버리고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의 때가 이를 때 그가 오른 손이나 이마에 받은 짐승의 표가 징벌의 표적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9-11절에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우리 각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된 표시가 없는 사람 곧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사람은 사단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소유된 흔적들이 우리의 몸과 삶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라’라고 주장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
2
바울은 본문에서 글 쓰기의 천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셔서 성경의 오묘함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울이 “예수의 흔적"(the marks of Jesus)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할례의 흔적’(the marks of circumcision)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혹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이) 이방인이라도 (율법적인 두려움에서 형식적이요 외형적으로 행하여진) ‘할례의 흔적’은 결코 ”예수의 흔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보호와 칭의와 구원의 징표가 될 수 없음을 역설(力說)하고자 함입니다.
17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칭의와 구원의 표시로 여기는 것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몸의 일부를 베어내어 표시를 만드는 행위이긴 하지만 칭의와 구원의 요건이 전혀 될 수 없으며(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또한 ‘예수님의 흔적’(할례는 율법의 요구이지 예수님의 요구는 아니기 때문에)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할례의 흔적이 몸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흔적’도 ‘예수님의 흔적’도 아닙니다.
바울도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빌 3:5). 그러나, 이 할례의 표시는 바울이 말씀하는 “예수의 흔적”은 아닙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ίγμα, 복수는 στίγματα)로 ‘상처’, ‘표시’ 또는 ‘소유주를 표시하는 소인(燒印) 또는 도장’을 뜻합니다.
스티그마를 흔히 성흔(聖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못 박히실 때 손과 발 네 군데에 자국난 상흔(傷痕)과 창에 찔리신 허리까지 모두 다섯 군데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흔적--상처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사랑의 표시요, 보호와 구원의 표시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신실한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상처의 흔적을 몸에 갖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에 이러한 상처들의 자국이 그 몸에 나타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이고 첫 번째 인물이 성 프란시스(St. Francis, 1181-1226)인데, 그는 43세 때(1224년) 알베르나 산(Mount Alverna)에서 기도하던 중에 십자가의 환상(vision)을 보게 되는데, 이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허리에 성흔(스티그마타)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예수의 흔적”은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난 성흔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받은 고난의 상처요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예수님의 자국입니다.
바울은 그의 세 차례의 전도 여행기간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맞고 고문당하고 갇히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온몸이 그리스도를 위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자랑스러운 것은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의 흔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사랑으로 오래 참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삶 자체가 예수님의 흔적을 자신의 몸과 삶에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그의 몸과 삶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을 따라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기를 원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닮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흔적”을 우리의 몸과 삶에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게 형식적인 어떤 외적 표시를 하여서 생기는 흔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속하여 있을 때 나타나지는 삶 자체를 통한 내적 표시입니다.
흔적은 또한 ‘소유주의 소인(燒印: 불 도장)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소인을 찍으셨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은 가슴으로 (참)믿음을 고백하는 그 순간에 불 도장을 찍으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서 “저가(=하나님이)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했고, 5장 5절에서 “곧 이것(=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하늘에 속하는’ 인을 치셨기에 우리가 어디에 있으나 하나님께 발견되어지며 다시는 잃은 자(lost child)가 되지 않습니다.
18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축도(benediction)입니다. 인간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χάρις)가 그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을 때, 그들이 지금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너희 심령에”는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 영과 함께”(μετὰ τού πνεύματος ὑμών)라고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늘 생각하고 사모함으로 인하여 그의 은혜의 깊고 넓음을 맛볼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울의 축복기도입니다.
3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 안에 어머니와 서너 살 난 아이가 갇혔는데, 어머니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서도 아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온몸으로 아이를 감쌉니다. 지붕이 무너져 내림으로 그의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되고 뜨거운 불길이 그의 곱던 얼굴과 팔을 흉하게 만들지만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의 보호막을 풀지 아니하고 더욱 단단하게 합니다. 마침내 소방대원에 의하여 어머니와 아이가 구출됩니다. 어머니는 얼굴과 팔을 비롯하여 전신에 화상을 입고 부상을 당하였지만 아이는 말짱합니다. 이 어머니의 화상과 부상의 상처(傷處)는 그 자식을 사랑하여 보호하고 구원하는 ‘어머니의 흔적’입니다.
‘예수의 흔적’(the marks of Jesus)이 여러분의 몸과 삶에 나타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를 증거하고 그를 위하여 살아가는 중에 여러분이 당한 고통과 중상과 핍박의 상처가 저와 여러분이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입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온전히 고백하고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심이 있을 때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표시임을 믿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