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6, 2014

“형제를 실족케 말라” (로마서 14:13-23)

                                              “형제를 실족케 말라” (로마서 1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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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외출하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자기의 매무새를 살펴봅니다. 혹시 넥타이가 삐뚤어 매어있지나 않나, 옷의 색깔이 잘 어울리나, 얼굴에 무엇이 묻어있지나 않나 살핍니다. 여자분들은 더 많은 시간을 거울 앞에 앉아서 자신의 얼굴을 가다듬습니다. 자기의 약한 부분들을 화장으로 보완(make-up)하기 위해서 혹은 화장하는 것이 취미라서 어떤 사람들은 매일 2시간 이상도 소비(消費)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의 “만들어진 모습”에 만족할 수 있을 때에야 거울 앞을 떠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수 없어 얼굴을 혹은 가슴을 뜯어고칩니다. 쌍가풀 수술을 하고, 코를 좀 더 높히고, 눈가의 주름을 없에고, 가슴을 크게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거울이라고 표현합니다. 야고보서 1장 23-24절에 “누구든지 도(道)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도리(道理)는 우리의 마음, 생각과 행동의 매무새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비추어보는 거울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말씀이신 거울을 멀리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에 비춰진 자기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의 매무새가 어떠한지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세상사람도 나름대로 자기를 비춰보는 거울이 있지만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왜곡(歪曲)되고 굴절되어있는 거울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쯤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춰볼 기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행동이 고쳐지지 아니하고 나아지지 않는 것은 야고보가 말씀한 대로, 나의 모양이 어떠한지 보고 부족한 모습을 깨달아 안 사람이라도 거울 앞을 떠나는 순간 자신의 모양이 어떠한 가를 바로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만을 탓합니다.
혹은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건 고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읽고 들음으로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두꺼운 색안경(sunglasses)을 끼고 바라봄으로 자기의 흠이 많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진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지만 별 생각없이 바라봄으로 그것이 자기의 추한 모습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거울 앞에 비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이 나의 모습이 아니라 아무개의 모습일 꺼라고 여기며 자기는 아니라고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흠을 발견도 못하고 더욱이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바른 마음의 눈으로 이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자신의 모습이 온전하고 흠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흠없고 티없는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고칠 부분이 많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바울도 자신을 표현할 때,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고, “이미 모든 것을 얻은 사람도 아니요 온전히 이룬 사람도 아니요 또한 잡은 사람도 아니라”고 하고, 다만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외모를 비추는 거울 앞에만 오래 서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비출 수 있는 말씀의 거울앞에 더 자주, 더 오래 서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과 외형만 성형수술할 것이 아니라, 화장하고 간단한 치장으로는 나아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함의 잘못도 수술하여 고쳐야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이후 로마서의 실천장들은 특별히 우리의 행함들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과연 우리의 행동들이 하나님의 거울에 흠이 없는 것들인가 바라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하여서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옳았다고 보기보다는 그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였거나 거울에 비추인 그 사람을 보면서 옆사람의 모습일꺼라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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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판단은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약함이나 나와 다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행동이 그 사람을 넘어뜨리거나 거치게 하는 걸림돌(stumbling-stone)이 됩니다. 특히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은 이러한 일을 당할 때 넘어질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형제가 근심함은 내가 그 형제에게 “세상에 신은 하나님 한 분이신데 너는 어찌하여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먹지 못하느냐?”고 비판하는 데서 오는 근심이 아닙니다. 형제가 근심함은 자신은 거리낌이 있기 때문에 채소를 먹는데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 교회의 제직이 그가 보는 앞에서 버젓이 ‘우상에게 바쳐졌는지도 모를“ 고기를 먹고있는 까닭입니다.

나의 믿음으로는 세상에 속된 것이 없되 스스로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속된것인줄 알기 때문에, 술집에 들어가는 것이 전혀 거리낌이 없는데 이것이 나를 바라보는 형제에게는 거리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는지 알고도 내가 그 행동을 계속 할 때 이는 사랑으로 행치 않아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할 때, 나는 나에게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으로 행한 것임에도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거나, 근심케 하거나,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것일 때 우리는 이것까지도 삼가므로 비방꺼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여기 판단이나 비방꺼리는 성경상에 명백하게 하라-하지말라 말씀한 바 없는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은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일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나라에 속한 일들은 사소한 시비꺼리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백성들이 감당하고 이루기를 원하시는 일들은 하나님나라의 속성--곧, 의와 평강과 희락을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에 속한 일인 화평과 덕을 세우는 일들을 감당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20-21절에서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식물이란 시비꺼리를 말합니다. 때로 이 시비꺼리로 정작 더 중요한 하나님의 사업은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어느 정도 이루어놓은 사업도 망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교회의 주요한 시비꺼리중 장로선출의 문제와 성전건축의 문제가 있습니다. 장로선출이나 성전건축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사업 그 자체는 아니고 이를 위한 준비인데, 이러한 일들로 교회안에 분쟁이 심하거나, 교인중 얼마가 교회를 떠나거나 더 심하면 교회가 깨어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물론 주장하는 쪽은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러하겠지만 이러한 일들로 우리는 때로 더 크고 중심과제인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다시, 먹고 마시는 문제로 돌아가 보면,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까닭에 다 정하다고 말씀합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이 악하게 되는 것은 먹고 마시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 가운데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리낌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거리끼는 것을 먹고 마심으로 악하게 됩니다.
해서, 그는 그가 거리끼는 것을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합니다. 거리끼는 일을 할 때 이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바로 봄으로서, 거리낌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는 그의 먹고 마시는 일이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게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의 먹고 마심이, 나의 다른 어떠한 행동이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는 일이고 이를 내가 알았을 때, 이를 하지 않음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해서, 형제사랑을 믿음의 규범(規範)으로 삼는 우리는 우리의 먹고 마심과 행함에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는 것이 혹 없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발견하고자 힘 쓸 뿐아니라 발견하였을 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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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의 행동규범을 정리하여보면, 첫째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 우리의 행동가운데 거리낌을 주는 것이 있나 살펴 나에게 거리낌을 주는 것인데 아직도 그대로 먹고 마시고 행하는 것이 있다면 이를 버려야 합니다. 의심하고 거리낌으로 행한 모든 것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은 것으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나의 먹고 마시는 일, 다른 행하는 일에서 우리는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거리낌이 없는 것은 나의 판단의 기준이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내가 알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 것은 내가 먹고 마시고 행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그러나 나의 거리낌이 없는 먹고 마심과 다른 행함으로 내 주위의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고 근심하게 하고 넘어지고 망하게 한다면 우리는 이를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사랑의 으뜸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말씀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췬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자이며 우리의 매무새를 바로 고치는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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